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5

등록 2003.11.24 14:29수정 2003.11.24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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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제장

그날 저녁 무렵 적군들이 몰려와 이난나 신전 벽 둘레에 역청을 발랐다. 무지개 빛 유약벽화가 검푸른 역청으로 온통 개칠이 되었다. 내일 아침까지 그대로 두면 해가 다시 그 무지개를 되살릴 것이었다. 그것은 침략자들에게 전혀 유리한 조화가 아닐 것임으로 그 빛을 미리 그렇게 차단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거기다 불을 지를지도 모른다. 역청은 휘발성도 강해 불길에도 잘 응하니까. 그렇다면…'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대사제장은 생각했다.

'그래도 벽은 무너지지 않는다. 곡괭이를 들이댈 때까지는…'

일을 끝낸 군사들이 이번엔 지하 경배실로 몰려갔다. 이제 그들은 신전 보물을 약탈할 것이다. 대사제장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제들을 일찍 해산시킨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사제들을 피신시킨 것은 점심 때였다. 왕비와 왕자까지 참수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직후였다. 때문에 적군들이 몰려왔을 때는 사제관마다 비어 있었고 적군들은 사제들 대신 사원의 재물들만 약탈해갔다.

날이 어두워졌다. 오늘도 달은 떠오르지 않았다. 달조차도 수모를 당한 이난나의 신전 벽이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여신이여, 저는 지금 당신의 모욕을 방관하고 있나이다. 용서하소서…'

군사들이 경배실에서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사제장은 급히 몸을 돌렸다. 그는 그 길로 곧장 만신 전 성탑으로 향했다. 성탑은 궁정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궁정은 경비가 삼엄해 자칫하면 적군에게 들킬 수도 있었다. 그는 궁정 반대편, 공원길로 에돌아갔다.

그의 긴 아마포 자락과 어깨 숄이 걸음걸이에 따라 펄럭거렸다. 그 아마포 차림은 사제신분이며, 이 도시에서 그것은 특권층과도 같아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그 누구에게도 구속받았던 일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절이 아니었다. 그는 작은 소리라도 줄이려고 손으로 옷자락을 거머쥐고 살처럼 걸었다.

마침내 저만치 성탑이 보였다. 둘레 삼면에 계단이 걸쳐진 지구라트, 그 피라미드형의 사원 성탑은 전과 다름없이 우뚝 솟아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대사제장은 그 우람한 모습을 잘 볼 수 있었다. 그가 평생을 걸쳐 모셔온 신들이 그 성탑에 계시고, 그가 어린 사제일 때는 날마다 그곳에서 불을 밝히는 일을 했다.

그는 조용히 멈춰 서서 양 손바닥을 겹쳤다. 성소에 오면 절부터 올리는 것이 사제의 도리였다. 그는 허리를 꺾어 깊숙이 절을 올린 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사방을 살피기 시작했다.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정면이나 동 서쪽의 계단 앞에도 무엇 하나 어른거리지 않았다. 아직 적군의 손길이 거기까지 미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정면 계단 앞으로 다가가서 위를 쳐다보았다. 계단 저 위의 드높은 성문도 그대로였다. 백여 년 전에 우르 남무 왕이 쌓기 시작한 수호의 성탑이었다. 그때는 도시민들도 참가했다.

구티 족이라는 그 포악한 야만인들, 신전을 짓밟고, 검은 머리 사람들의 중요한 기록물인 점토판마저 깡그리 부숴버린 뒤 그 자리에 조각인형들이나 세워둔 미개인들, 그들로부터 구해준 우르 왕조가 고마워서, 이제 다시는 검은 머리 사람들이 수모를 당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도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그 울력에 참가했다.

그 공사가 끝났을 땐 시민들이 먼저 감탄했다. 얼마나 우람하고 또 아름다운 건축물인가. 기본 벽돌단의 높이만 해도 큰사람의 키 일곱 배에 달했고 그 위에 세워진 양 겹의 아치 성문 또한 얼마나 근사한가. 그 아치 성문 뒤쪽으로 포개져 앉은 3층 건물은 또 얼마나 짜임새가 있는가. 그리하여 수메르의 모든 신들도 동의를 한 것이다.

'우리가 그 성탑에 머물겠노라. 그 성탑이 곧 우리의 처소로다'라고.

대사제장은 계단으로 올라섰다. 수없이 이 계단을 올랐지만 그때마다 그의 다리는 경건함으로 떨렸고 지금은 양 어깨까지 뻣뻣해지는 기분이었다.

마침내 첫 번째 아치성문이었다. 신과 만나러가는 첫 성문이었다. 그는 잠시 성문을 올려다보다가 그만 안으로 들어섰다. 제법 넓은 회랑식 복도가 나왔다. 양 옆에서 올라오는 계단도 그 복도에서 만나고 그 중심부를 가로 질러가면 다시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거기서부터는 층마다 독립된 건물이 피라미드식으로 올라 있어서 계단은 마치 건물을 타고 앉은 넓은 사다리 형상이었다.

그는 회랑을 지나쳐 다시 계단을 올랐다. 2층 건물쯤에 이르러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계단 왼쪽에 놓인 넓은 테라스가 희미하게 보인 때문이었다. 그 테라스 안쪽의 건물은 성탑에 소용되는 모든 물품들이 보관되어 있다.

그는 다시 오른쪽을 돌아보았다. 그 테라스 역시 어둠 속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 그곳은 역대 왕들의 유품이 진열되어 있다. 우르 남무도, 슐기, 아마르 신 왕도 사후 이곳을 거친 후 분묘, 그 지하궁전으로 갔다. 그래서 일명 통곡의 방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또한 '선조 왕들의 넋이 머무는 곳'이기도 했다.

왕들은 신과도 같아서 사후에도 그 넋이 아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장소에 남아 언제까지나 후손을 돌봐야 했다. 또 현세의 왕이나 왕비 자신들에게도 선조의 넋을 찾고 싶을 때 실제 방문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다. 불현듯 선조의 영혼을 만나고 싶거나 가끔 무언가를 결정하거나 의논하고 싶어진다 해도 꼭꼭 봉해진 분묘, 그 사자의 궁전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었던 때문이었다.

'한데 이비 신 왕께서는…'

사제장의 심장이 아프게 조여들었다. 그 왕은 끌려가고 없다. 생사도 알 수 없다. 달의 신과 그의 딸인 이난나 여신께서 그를 구해오지 않는 이상 그는 성골이 될 수 없고 따라서 여기에 남을 수도 없다.

대사제장은 현기증을 수습하고 3층으로 올랐다. 어서 빨리 성탑으로 올라가 신들을 만나야 했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간절한 기도로 신들을 설득해보는 길밖에 없었다.

3층 성탑은 테라스도 없이 통째 올려진 건물이었다. 2층에 비해 좁지만 대신 높이 세워졌으며 성단은 그 중앙에 있다. 그 성단에는 왕 중의 왕인 엔릴 신, 운명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일곱 신, 그리고 50분의 위대한 신들이 모여 성스러운 소리로 창조를 하시고, 계획을 하셨다. 여태까지는 그러셨다. 하늘의 신 엔키, 대지의 신 닌마, 태양 신, 물의 신, 등 수메르의 주요 신들께는 광폭하게 울부짖는 우주를 통제하셨고 대기의 신 엔릴은 그 진정된 현상을 하늘과 땅에 골고루 뿌려주셨다. 성스러운 목소리와 입김으로 그러하셨다.

왕들은 죽어 성골이 되어도 2층에 밖에 머물 수 없지만 이곳은 신들과 그 성령들이 기거하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그는 실내로 들어섰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담당 사제도 떠나고 없어 그 누구도 기름을 붓지 못한 모양이다. 사제는 다시 2층 집기 실로 내려가 기름을 가져다 부었다. 그리고 불을 켜자 성전은 금방 환해졌다.

이윽고 사제 장은 성단을 향해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양손을 포개고, 모든 신들의 이름을 차례로 불러가며 일일이 그렇게 절을 올린 후 조용히 꿇어앉았다.

'신들이여, 무엇을 합의하셨나이까? 우르의 멸망이오니까? 왜 갑자기 이렇게 벼락으로 치시나이까? 우리가 부정한 짓을 저질렀나이까? 저희가 신전을 돌봄이 부족했나이까? 하오나 신님들이여, 비록 우리가 무지한 소치로 신을 언짢게 해드렸다해도 부디 용서하시고 우리의 왕을 되돌려주소서….'

그는 하소연을 멈추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았다. 그 어떤 기척도 감지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 빌기 시작했다.

'엔릴 신이시여. 당신께서 법통을 세우신 이 나라, 그 검은 머리의 백성들이 통곡으로 당신께 비나이다. 부디 화를 푸시고 이 백성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이 도시를 구해주소서….'

"…"

"왕중의 왕 엔릴 신이시여, 어서 빨리 광풍과 번개를 불러 그들을 벌하시고 그리하여 이곳 신들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들로 하여금 깨닫게 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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