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나 스크루지 영감 맞아!"

책 속의 노년(68) : 〈크리스마스 캐럴〉

등록 2003.12.23 10:04수정 2003.12.24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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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나를 구두쇠로도 모자라 수전노(守錢奴)라고 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인색하고 냉정하고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사람의 대명사로 쓰고 있지. 그렇게 이름 붙여진지도 하도 오래 돼서 도대체 언제부터인지 내 기억에도 가물가물할 지경이야.

바로 내 이야기인 '스크루지 영감 이야기'는, 예전에는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어서 아이들이 서로 스크루지와 과거·현재·미래의 유령 역할을 나눠 맡아 촌극을 하기도 했는데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군.


아주 오래 전 영국의 소설가 찰스 디킨스가 내 이야기를 써서 〈크리스마스 캐럴〉이란 제목으로 발표를 했는데,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잘 알고 있는 내용일 것이네. 하지만 오늘은 내 이야기를 내 입으로 한 번 말해 보겠네. 사람에게 귀가 두 개 있는 것도 다 양쪽 이야기를 골고루 들어보라고 그렇게 생겨난 게 아니겠는가.

크리스마스 전날 밤, 욕심 많고 인색하고 사납고 얼음장같이 차가운 내게 7년 전에 죽은 동업자 제이콥 말리의 유령이 찾아왔네. 그는 죽어서도 편히 쉬지 못하고 쇠사슬에 묶여 있었는데, 그 쇠사슬은 글쎄 금고, 열쇠, 자물쇠, 장부, 증서, 강철로 만들어진 무거운 돈지갑들로 만들어져 있었지 뭔가.

말리 유령은 유령이 돼서도 동업자의 의리가 남아 있었는지, 생전 처음 유령을 만나 정신이 혼미해지고 두려움에 덜덜 떠는 내게 '아직은 나와 같은 운명을 피할 기회와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나타난 것이라고 설명을 하더군.

그러면서 세 유령이 차례로 나를 찾아올 것이라고 알려 주었네. 나는 물론 유령들의 방문이 전혀 달갑지 않았지. 그렇지만 유령들의 방문을 받지 않으면, 말리 그 친구가 걸었던 그 길을 피할 희망이 없다고 해서 할 수 없이 가만히 있었네. 그래도 참을 수가 없어 끝내 한 마디 묻고 말았지. "한꺼번에 그 세 유령을 다 만날 수는 없을까, 제이콥?"

웃지 말게. 세 유령을 차례로 만나는 두려움을 어떻게든 줄여 보려고, 한꺼번에 당하고 말겠다며 매달리는 내가 우스꽝스럽고 가련해 보이겠지만 그 때는 정말 절박하고 다급했다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걸세.


세 유령 중 처음 만난 유령은 '과거의 크리스마스 유령'이었지. 우리 둘은 내 고향, 내가 소년 시절을 보낸 곳으로 갔는데,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은 외로운 아이 하나가 텅 빈 학교에 남아 있더군.

다른 아이들은 크리스마스 휴일을 즐기기 위해 다들 집으로 갔지만, 집에 갈 수 없었던 아이는 학교에 혼자 남아 꺼져 가는 난로 곁에서 책을 읽고 있었지. 아이를 보는 순간부터 흐느낌이 터져 나오더니 끝내 나는 의자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말았다네. 그 아이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거든.


이어서 본 것은 나의 청년기였지. 벌써 내 얼굴에는 탐욕스럽고 욕심 많고 초조한 기색이 보이더군. 이미 허욕이 내 안에 뿌리를 내렸다는 증거겠지. 나의 첫사랑 벨은 어떻게 그 사실을 그렇게 빨리 눈치채고, 자기 대신 황금을 우상으로 섬기기 시작한 내게 칼로 자르듯이 작별을 고했던 것일까. 생각해 보면 그녀가 참으로 현명했던 거지.

그런데 유령을 따라 벨의 집에 들어서서 그녀의 딸을 보고 있으려니 또 다시 눈물이 나기 시작하는 것이었어. 내게도 저런 딸이 하나 있었더라면 나를 아버지라고 불러 주었겠지, 겨울 같은 내 인생에 봄을 가져다주었겠지…. 정말 후회스럽더군. 바보 같은 나를 견딜 수가 없었지.

있었던 사실 그대로를 본 것이지만 나는 정말 괴로워서 미칠 것 같았네. 지칠 대로 지쳐 곯아떨어진 내 앞에 드디어 '현재의 크리스마스 유령'이 나타났지. 우리 둘은 내 밑에서 일하는 서기인 봅 크래칫의 집으로 갔지. 솔직히 내가 그를 얼마나 인색하고 완고하고 인정머리 없이 대했는지 모른다네.

그 집은 가난하고, 아이들은 많고, 그 중에 또 한 아이는 장애를 가지고 있었지만, 놀랍게도 식구들 모두 행복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이좋게 살아가고 있었어. 나는 정말 그러는 그들이 신기했지. 거기다가 나를 위한 건배라니….

그리고는 곧장 하나밖에 없는 조카 프레드에게로 갔지. 가난뱅이 주제에 크리스마스가 다 무슨 소용이고, 그 주제에 사랑과 결혼은 또 뭐냐며 비웃었던 조카거든. 그런데 그 조카가 나를 불쌍하게 여기고 있더군. 내가 늘 화를 내는 것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것도 결국은 다 나한테로 되돌아와 내가 행복과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는 거지.

조카 프레드의 집에서 열린 젊은 사람들의 크리스마스 파티는 정말 재미있더군. 옛날에 세상을 떠난 누이동생, 그러니까 프레드의 엄마지, 그 누이동생이 잘 부르던 곡을 듣고 있으려니 이상하게도 내 마음이 자꾸만 부드러워지는 게 아니겠나. 그러고 보면 나도 사실은 부드럽고 예민한 사람인데, 나 스스로 둔감한 사람이라고 자처하며 살아왔던 거지. 그런 사실을 남들은 꿈에라도 생각한 적이 없겠지.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나 보네. 이제 마지막 유령 이야기로 가지. '미래의 크리스마스 유령'을 만나 돌아다닐 때 나는 처음에는 내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네.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나도 슬프지 않은 얼굴로 누군가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었지. 하물며 날품팔이 여자와 세탁부, 장의사는 시체가 입고 있던 옷과 덮고 있던 담요까지 훔쳐와 고물상에서 셋이 마주치기까지 하더군. 어이가 없어서, 원.

그러나 나는 곧 깨달았다네. 그 시체는 '약탈당하고 돌봐주는 사람도 없고 울어주는 사람 하나 없는' 나의 시체라는 것을. 나의 죽음이 이 세상 단 한 사람에게도 슬픔이 되지 않았던 거지. 그 날까지 내게 빚을 갚아야만 했던 부부만이 나의 죽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군. 아, 정말 죽음 앞에서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지.

나는 이 일들이 반드시 일어날 일들의 환상인지, 아니면 단순히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의 환상인지 제발 가르쳐 달라고 '미래의 크리스마스 유령'에게 매달리기 시작했어. 내가 가망 없는 놈이라면 내게 왜 이런 환상을 보여주느냐 이거였지.

내가 내 생활 태도를 바꾸기만 한다면 내가 본 환상들을 이제부터라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제발 확실한 한 마디만 해달라고 조르고 또 졸랐지.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인생의 새 출발을 하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네.

어린 시절의 지독한 가난과 외로움, 천대받는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희망은 돈이었지. 내 인생의 목표는 오로지 돈, 돈이었어.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지. 남들처럼 먹고 마시고 놀며 펑펑 인심을 쓰면서는 절대 돈을 모을 수 없었어. 이런 나를 이해할 수 있겠나. 물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살긴 했다네. 이 세상에는 돈보다 더 소중하고 귀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하룻밤의 꿈이었지만, 다음 날 아침 깨어난 내가 어떻게 달라지지 않을 수 있었겠나. 나는 이제 비로소 알게 된 거지.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다 나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비록 뒤늦은 깨달음이었지만 그래도 내게 마음을 바꾸고 죄를 씻을 시간이 주어진 것은 정말 다행스럽고 좋은 일이었지.

서기 봅과 조카 프레드, 기부금을 거두러 온 신사 그리고 거리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즐거워서 죽겠다는 표정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네.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스스로 이런 말을 하기는 좀 쑥스럽지만, 나는 많은 선행을 통해 보기 드문 좋은 친구, 좋은 주인, 좋은 인간이 되었다네. 한 마디로 사람이 된 셈이지. 하하하.

그런데 참 모를 일이 하나 있더군. 사람들은 나를 '구두쇠 스크루지, 수전노 스크루지 영감'이라고 욕하면서도 내 이야기하는 것은 왜 그리들 좋아하는지 몰라. 전 세계적으로 내 이야기가 책으로 나온 것은 물론이고, 영화로, 연극으로, 뮤지컬로 끊임없이 공연되고 있다더군. 올해 한국에서도 크리스마스 시즌에 뮤지컬 공연을 하고 있다고 들었지.

곰곰 생각해 보면 나는 이미 오래 전에 꽤 괜찮은 사람이 됐지만,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나를 자꾸 끄집어내는 것은, 인색하고 매몰차고 인정머리 없는 과거의 내 모습에서 자기 모습을 보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나처럼 크리스마스에 새로운 스크루지로 태어나고 싶은 게 아닐까. 자기들이 직접 유령을 만나는 건 조금 그러니까 나를 통해서 대리 체험을 한다, 뭐 이런 것 같기도 해.

아무튼 이렇게 내 입으로 다 털어놓고 나니 가슴속이 시원하군. 내가 참 괜찮은 사람으로 변했지만 앞으로도 사람들은 여전히 나 스크루지를 구두쇠와 수전노로 기억할 걸세. 무척 억울하지만 선량하고 관대한 내가 참아야지 별 수 있나. 그래도 가끔은 나를 괜찮게 변한 인간으로 기억해 주면 참 고맙겠네.

돌아보니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야. 노년에라도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수정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 젊은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나처럼 유령을 만나지는 않더라도, 과거·현재·미래를 생각해 보면서 내가 과연 인생의 방향을 제대로 잡고 있나 꼭 한 번 살펴보게나. 긴 편지를 마치며 모두에게 이 스크루지가 2003년 크리스마스 인사를 전하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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