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35

등록 2004.01.19 14:01수정 2004.01.19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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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어두워진 이후에야 일행들은 식사를 시작했다. 그들 몫으로는 큰 통돼지 한 마리가 주어졌다. 에인과 에인 아버지, 제후에게는 살점만 따로 주어졌고 그 밖의 일행들은 돼지 앞에 둘러앉아 환담과 함께 고깃점을 뜯고 있었다.


군사들은 게걸스레 먹어댔고, 그 먹는 소리가 하도 맛나게 들려 강물 소리도, 여기저기 켜진 횃불조차 자기들도 아니 먹고는 못 견디겠다는 듯 야금야금 어둠을 베어 먹고 있었다.

"부족하면 한 마리 더 가져오라 이를 테니 양껏들 먹어요."
아버지가 일행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당신 앞에 주어진 나무판 위의 고기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입맛이 없는 것 같았다.

에인은 슬며시 일어나 마차 쪽으로 갔다. 거기에 남겨온 치즈가 있었다. 그 치즈는 소호 국 사람들에겐 익숙하지 않은 누린내가 있었지만 그래도 소금기가 많아 먹기가 수월했다.

그는 치즈 한 덩이를 들고 돌아와 아버지에게 내밀었다.
"아버님, 이 양유떡과 함께 고기를 드셔보십시오."
아버지는 귀퉁이를 조금 뜯어먹고는 다시 아들에게 내밀었다.
"이놈은 비상용으로 넣어두어라."

그 말을 듣고 제후가 나섰다.
"양유떡과 양젖은 가는 도중에도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아, 그래요."


대답은 그렇게 해놓고도 아버지는 더 이상 먹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오래오래 불길만 바라보았다. 그 불길이 서서히 사그라 들고 식사도 파장으로 접어들 때 재상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나 먼저 가 있겠소. 식사들이 끝나면 천막으로 오시오."
에인도 따라 일어섰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었던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사람들을 피해 물 가까이로 내려가더니 거기서 다시 몸을 돌려 위쪽으로 향했다. 그는 아버지 옆으로 다가섰다.


"아버님."
"오냐."
대답은 반갑게 했지만 그 목소리는 아주 무거웠다. 강물 소리도, 그 위에 덮인 어둠도 아버지 목소리처럼 무겁게 내려앉는 듯했다.

"무슨 걱정이 있사옵니까?"
"아니다."
"한데 왜 식사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마음이 왜 그렇게 무거운지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어서 그 기분을 풀어드리고 싶었다. 오룡거 이야기라면 아버지도 좋아할 것이었다. 또한 천신제 이야기를 하다 중단했던 터이기도 했다.

"아버님, 제가 소도 천신제 제주가 되었다는 말씀은 드렸지요?"
"그래,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다. 그래 잘 치렀느냐?"
"예, 마마께서 저에게 황포를 건네주실 때까지는 제가 잘 치러낼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 모든 제주들의 마음이 처음에는 그렇다고 들었다."
"그런데 아버님, 황포를 입는 순간, 별안간 제 몸에 날개가 달리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랬을 테지. 황포를 입는다는 것은 아주아주 특별한 일이니까."

재상은 잠깐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태왕이 아직 태자일 때 선왕도 황포를 벗어 태왕에게 입혀주었다. 그것은 곧 '너는 언제라도 왕이 될 수 있다'는 선포식과도 같았다. 자신은 단 한번도 태자 자리를 탐내본 적이 없었음에도 그때는 왜 그렇게 서운하던지…. 특히 형이 그 황포를 입고 천단으로 오를 때는 그만 끌어내리고 자신이 대신 오르고 싶기도 했다.

한데 그날 자정 무렵 형 태자는 아주 지친 몸으로 가마에 실려왔다. 신들이 응하지 않아 그렇게 지쳤다고 했다. 태자는 자리로 들면서 그를 불렀다. 그리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신들은 오시지 않았어. 어쩌면 내가 임자가 아니었는지도 몰라.'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형이 다시 더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였다. '한아, 네가 대신 황포를 입고 올라가보면 어떻겠니?'
그때 그는 참으로 부끄러웠다. 그래서 얼른 고개를 저었는데도 형은 다음 날 선왕 앞에서도 똑같은 말을 했다.

'아바마마, 한이가 집전하면 신들이 응할 것이옵니다.'
선왕이 껄걸 웃으며 대답했다.
'너의 그런 마음이 벌써 신이 응감하셨다는 징표다. 됐다. 한이는 평생 너와 함께 할 것이니 따로 제주가 될 필요가 없다.'

참으로 선왕다우셨다. 그는 자기 자식들의 운명까지도 손금처럼 환히 꿰뚫고 계셨다. 선왕은 태자의 그 정직함과 어진 마음으로도 능히 왕 자리를 지켜낼 수 있다고 확신하셨고 또 그 자리를 두 형제가 지켜갈 것도 미리 알고 계셨다. 그래서 스승을 모셔와 공부를 시키면서도 늘 두 형제가 함께 하도록 하셨다. 지식도 같아야 서로 돈독한 후견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신 것이었다.

한데 태왕은 또 그 황포를 자신의 태자보다 에인에게 먼저 입혀주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간에도 태왕은 에인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아왔다는 것을. 어쩌면 그것은 관심이라기보다 일종의 특별 관리였다. 태왕 스스로야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차기 왕권으로 에인을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는 에인이 소호국의 왕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태자 역시 후덕하고 지식이 깊으니 왕권은 얼마든지 보전해나갈 수가 있다. 에인은 다만, 자신이 태왕과 그러하듯 지금 태자와도 한 그릇에 놓인 수저처럼 그런 관계이기만 하면 된다. 왕권이 영광이라면 잘 지키는 것은 복락이며 그 둘이 함께할 때 왕통은 영원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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