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43

등록 2004.02.11 09:21수정 2004.02.1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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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장- 정벌지

'애초에 딜문이 있었다. 거기엔 질병도 죽음도 없었다.
오직 순결로 빛나는 생명의 땅이었다. 과일은 풍성하고
초원은 푸르게 펼쳐진 성스러운 낙원이었다.(수메르의 낙원신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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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월씨국을 출발해 마슈하바트를 지나올 때 군사들은 눈보라를 만났다. 출정 사흘째였다. 산도 없는 벌판이라 눈과 바람이 바로 앞에서 꽂혀와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에인이 강 장수를 불렀다.

"강 장수, 걷기는 무리인 것 같은데 쉬어 가는 게 어떻겠소?"
바람에 한번 혼이 난 적이 있어 에인이라 더럭 겁이 났던 것이다. 더욱이 이번에는 보병이 1천이나 되었다. 오직 발로만 5천여리나 걸어야 하는 그들에게 무리를 주어서는 아니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예, 잠깐…."
강 장수는 그렇게 대답한 후 먼저 대열을 돌아보았다. 말도 사람들도 고개를 숙이고 걷고 있었다. 바람이 정면에서 표창처럼 날아들 때는 보병들의 얼굴이 마치 땅속으로 기어들듯이 더욱 수그러지곤 했다.

"사실 눈앞이 보이지 않으니 걸어봐야 크게 거리를 줄일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겠지요? 계속 걷다가는 주저앉는 사람이 속출할 수도 있겠고…. 하다면 어떤 방법이 있겠소? 벌판이라 눈보라를 피할 수 있는 곳도 없으니 말이오."

"천막을 치면 눈보라는 피할 수 있지요."
"이 바람에 천막들은 칠 수 있겠소?"
"걷는 것보다는 쉽지요. 군사들도 훨씬 좋아할 것이구요."
"그럼 명령을 내려주시오."


명령을 일임하자 강 장수는 대열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군사들을 향해 큰소리로 고함을 쳤다.
"보행을 중단하라! 그리고 천막을 치고 눈바람을 대피하라!"

보병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말도 마차도 차례로 멈추었고 앞 대열 군사들은 벌써 마차로 달려가 천막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군사들 역시 어서 빨리 악천후를 피하고 싶었던지라 그들의 손길은 재빨랐다.


온 벌판이 천막 치는 무리로 부산했다. 눈보라는 계속해서 몰아쳤고 군사들은 마치 전투를 치르듯 바람과 싸우며 천막들을 치기 시작했다. 그런 중에도 벌써 한 둘 천막이 세워지고 있었다. 다행이 땅은 얼어 있지 않아 막대기도 잘 꽂혔다.

에인과 장수들은 군사들이 천막을 치는 동안 그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장들의 통솔력도 뛰어났고 군사들도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주었다. 어느새 천막 안으로 든 군사들은 그들이 지나갈 때 '안방이 따로 없어요'라거나 '불을 피울 수만 있다면 안방이 정말 안방일 텐데'하고 주절거리기도 했다.

"천막이 준비되었습니다. 이제 장군님도 안으로 드시지요."
책임선인이 다가와 말했다. 그는 장수들과 함께 천막 앞으로 갔다. 말에서 내리자 천둥이가 머리를 흔들며 자기 콧등에 앉은 눈을 털어냈다. 에인은 그 말에게도 눈보라를 대피시켜주고 싶어 얼른 천막을 바라보았다. 그 입구는 좁아서 말이 들어갈 수가 없었다. 다시 장수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이미 말에서 내려 그가 먼저 안으로 들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천둥아, 어떡하니? 넌 여기에 있어야겠다."
그는 출정 첫날에 천리마의 이름을 천둥이라고 지어주었다. 그리고 몇 번 부르자 녀석은 벌써 자기 이름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귀를 세웠다. 지금도 천둥이는 귀를 세우다가 그만 장수들의 말 옆으로 가버리는 것이었다. 불과 사흘이 지났는데도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한 것이었다.

천막으로 들자 완전 별세계처럼 온화했다. 그만만 해도 살 것 같은데 책임선인은 불을 피울 수 없어 따뜻한 것을 준비할 수 없다고 미안해했다. 그는 장수들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장수들, 좋은 기회인 것 같지 않소? 이참에 앞으로의 계획도 느긋하게 이야기 해볼 수 있으니 말이오."
"정말 그렇군요."
"어떻소? 보병들도 아무 탈 없이 목적지까지 잘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소?"

에인은 먼저 궁금하던 것부터 물어보았다. 강 장수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말을 받았다.
"실은 그 문제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사실 자신들은 그간 거리를 앞당기는 데만 주력했다. 해뜨기 전에 식사를 끝내고 진종일 걸었으며 해가 지고 어두워야만 야영을 했다. 아직은 초기이니 별문제가 없지만 이런 식의 강행군이 계속된다면 정작 전투에 임할 때는 군사들의 기력이 어떨지 자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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