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권 열 네 장으로 다시 찾아 온 사람

사연을 묻어 둔 채 빈 웃음으로 떠나 간 사람

등록 2004.02.25 10:32수정 2004.02.25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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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봄날 농사일 준비를 한다. 리어카를 고친다.
맑은 봄날 농사일 준비를 한다. 리어카를 고친다.전희식

그에게서 편지가 또 왔다. 두 번째 편지다.


그제 마당에서 한참 일을 하고 있는데 글씨를 곱게 만년필로 쓴 그의 편지가 왔는데 나는 겉봉투에 쓰인 이름을 보지 않고도 그 사람인 것을 알았다. 집배원에게서 편지봉투를 받아 들면서 직감적으로 그 사람이 떠올랐다. 봉투를 받아 든 감촉만으로 그를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가 보냈던 첫 번째 편지의 특별한 감촉이 여태 내 손끝에 살아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편지를 들고 일하던 자리로 가 곁에 놔둔 채 하던 일을 계속하였다. 여러 해 동안 사용하면서 이제는 낡고 부스러진 리어카 깔판을 바꾸는 일이었다. 톱으로 베니어판을 자르면서도 그가 생각났다. 곁에 있으면 나무판을 맞잡아 주면서 얘기를 나눌 텐데 싶었다. 밑판을 바꾸다보니 곁 판도 부실하여 갈아 끼기로 했다. 리어카를 엎어놓고 철사로 동여매기도 하고 홈통을 대고 뒷막이 판을 새로 만들어 댔다.

그의 억센 남도 사투리가 들리는 듯했다. 짧은 머리 짧은 말투 굵은 얼굴 선. 그와의 만남이 짧았기에 모든 인상이 다 살아났다.

나는 편지를 뜯었다.


역시 이번 편지도 주유권이 들어 있었다. 빳빳한 주유권의 감촉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14장의 주유권을 돌돌 말아 싼 편지지에는 꼭 세 줄의 글이 있었다. ‘농주님이 여기저기 많은 곳 쫓아다니는 데에 필요할 것 같아’ 보낸다는 글이었다.

FTA 시위다, 부안 주민투표 참관인이다 쫒아다니면서 기름값으로 보태라는 것이었다. 새 지폐처럼 깔깔한 14장의 주유권을 한 장 한 장 세어 보면서 너무도 짧게, 단 한 번 보았던 그 사람이 수수께끼처럼 떠올랐다.


버스도 안 타고 걸어 다녔던 사람.

<오마이뉴스>에서 내 귀농일기를 발견하고 며칠에 걸쳐 처음부터 끝까지 죄다 읽고는 나를 만나러 열흘인가 보름인가를 걸어서 우리 집까지 온 사람. 전남 여수에서 우리 집까지 그 먼 길을 배낭하나 달랑 메고 걸어서 왔던 사람이 이렇게 또 주유권을 보내 온 것이다.

두어 달 전 편지에서도 주유권을 14장인지 9장인지를 넣어 보냈다. 그분의 첫 인상처럼 보내오는 주유권의 매수도 꽉 차지 않고 살짝 모자라는 숫자다. 그를 닮았다. 채워지지 않은 주유권의 매수는 어떤 의미일까?

잘못 세었을까 싶어 두 번 세 번 세어보는 ‘반듯한’ 내 습관을 나무라듯 주유권은 14장이었다. 주유권 매수에 담고자 했던 메시지가 뭘까 하다가 나는 픽 웃었다. 그 사람 성격상 기념으로 한 장을 자기가 빼 썼을지도 모르겠다 싶어서였다. 내 기억 속 그는 그런 사람이다. 사연을 묻어 둔 채 빈 웃음으로 떠나 간 사람이었다.

나는 이번에도 주유권 14장 중 10장을 벌써 다른 사람과 나눠 쓰고 있다. 내 주변에 서울과 대구와 안산과 남원으로 종횡무진 공무에 분주한 사람에게 열 장을 주었다. 지난번 주유권도 다섯 장은 아는 후배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렇게 하는 데는 내가 그분의 남다른 생각과 행동을 은연중에 널리 퍼뜨리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보내 온 주유권. 벌써 10장은 나눠 주었다.
그가 보내 온 주유권. 벌써 10장은 나눠 주었다.전희식
그분의 첫 인상이 어땠기에 '살짝 모자라는 주유권 매수‘가 그를 닮았다고 하는가.

지난 늦여름.

지루한 장맛비가 오다말다 하던 어느 날. 밭에서 흙투성이가 되어 일을 하고 있는데 머리는 비에 젖어 꾀죄죄하고 두꺼운 안경에는 빗방울이 송송 맺힌 그가 밭에 들어섰다. 내가 사는 모습을 한 번 보고 싶어 왔다고 하는데 한눈에 먼 길을 걸어 온 사람에게서만 풍기는 누추함과 생기가 동시에 느껴져 왔다.

동네 입구에서 내 이름 대신 새들이 아빠를 찾았단다. 이 역시 걷는 사람들만의 지혜다. 동네 할머니가 그 사람의 위아래를 한참 훑어보다가 ‘쌔돌이네 집에는 맨 날 웬 이상한 사람들만 온디아’라더란다.

집으로 와서도 끝내 방으로는 들어오지 않고 마루에 걸터앉아 담배 두 대 피우고 가버렸다. 천안으로 해서 인천으로 간다고 했던가.

몹쓸 병이 있어 여러 달 휴직을 했다가 이제 복직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아 보고 싶은 사람들을 보려고 길을 나섰다고 했다.

재작년에 ‘우리쌀 지키기 100인 100일 걷기운동’을 알고 나서 그 사이트에 있는 모든 게시물을 다 프린트하여 싸 짊어지고 다니며 밑줄 쳐 가며 읽었다는 사람이다. <길동무> 보따리학교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다 외고 있었고 내가 썼지만 기억이 희미한 내 글들을 그는 다 알고 있었다.

<길동무> 후원계좌에 두세 번 목돈을 넣었던 이름이었다. 게시판에 글 한번 올린 적 없고 전화 한번 나눠본 적 없이 바람처럼 왔다가 구름처럼 가버렸던 사람이 주유권 14장으로 다시 나를 찾아 온 것이다.

리어카를 다 고쳤다. 이 리어카를 3년 전 내게 주었던 아랫집 할아버지가 보면 아주 대견해 하실 텐데 집에 안 계시는지 기척이 없으시다. 30대 중반 나이에 걸린 병이 무엇이었을까. 완치는 되었을까.

잘 고쳐진 리어카를 끌어 보면서 그가 건강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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