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말총 따위로 만든 먼지떨이'
국어사전에서 '총채'를 정의한 말이다. 지금은 많이 자취를 감췄지만 어릴 적엔 집집마다 총채 하나씩은 있었다. '안타깝게도' 총채는 사전적 의미로만 쓰이지 않았다. 성적이 하락하거나 거짓말을 한 게 들통이 날 때, 총채는 청소도구에서 순식간에 체벌도구(!)로 탈바꿈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대걸레 자루가 부러질 때까지 맞는 일이 종종 있었고, 체벌과 기합은 학생들에게 '당연한' 일상이었다.
군에 입대해서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명령과 복종만이 존재하는 그 곳에서 폭력은 초소에서, 화장실에서, 창고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25살 무렵이 되어 제대를 할 때까지 내 인생은 '체벌 혹은 폭력과의 전쟁'이었다. 부모님이 때리고, 선생님이 때리고, 선배가 때리고, 상급자가 때리는 사회 속에서 살아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체벌이 과연 '반성의 계기'가 될까. 셀 수 없을 만큼 체벌의 대상이 되었지만 적어도 내 경우에 그런 경험을 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체벌을 당하는 동안 가장 절실했던 바람은 '빨리 이 체벌이 끝났으면 하는 것'이었고, 체벌이 끝난 후엔 '절대 다시는 걸려들지 말자'는 다짐만이 존재했을 뿐이었다. 그건 반성이 아니라 '공포와 경계의 마음'일 뿐이었다.
체벌을 당하면 반성의 계기가 마련된다는 논리는 지나치게 체벌을 가하는 쪽만을 대변하고 있다. 체벌을 가하는 쪽에서는 편리한 논리지만 체벌을 당하는 쪽에서는 궤변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흔히 사랑의 매라는 말을 즐겨 쓰지만 맞는 사람이 생각해 보면 어불성설이다. 때리는 사람이 아무리 사랑으로 때려도 맞는 사람에겐 그저 육체적 고통에 불과하다. 그리고 백번 양보해서 때리는 행위가 사랑을 전하는 수단으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해도 왜 꼭 때리는 행위여야만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