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한마디에 목마른 아이들

교사의 언어와 '부메랑'을 닮은 아이들

등록 2004.05.22 06:20수정 2004.05.22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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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이었습니다. 작년에 담임을 맡은 혜미가 혼자서 교무실 계단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반가운 마음에 먼저 인사를 했습니다.

"어, 우리 혜미. 안녕!"
"선생님, 안녕하세요?"
"청소 당번, 아니면 주번?"
"교실에서 떠들어서 벌받는 거예요."
"앵! 그래도 열심히 청소하는 모습이 보기 좋은데."
"고마워요. 선생님. 앞으로는 안 떠들 거예요."

던지면 허공으로 사라지지 않고 되돌아올 줄 아는 부메랑을 닮은 아이. 상큼하고, 인사성 밝고, 감사할 줄 아는 아이. 혜미는 바로 그런 아이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잔뜩 찌푸린 날씨처럼 어둡고 무뚝뚝한 표정에, 너무 떠든다 싶어 좋은 말로 타이르면 나만 떠들었느냐고 따지는 아이. 그러다 보니 저와 사이가 좋을 리 없었습니다. 수업시간마다 신경이 쓰여 마음이 불편하던 중 하루는 혜미를 따로 불렀습니다.

"선생님이 널 미워한다고 생각하니?"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혼자만 떠든 것도 아닌데 왜 너만 혼내느냐고 그랬지?"
"그거, 그냥 해본 소린데…."
"넌 그랬는지 모르지만 난 마음이 아팠어."

그런 대화가 오고 간 뒤 혜미의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무엇이 아이의 마음을 움직인 것일까요? 그날 혜미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해본 소리라니, 넌 그렇게 생각이 없는 아이냐?"


사실, 그런 말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던 것입니다. 다행히도 저는 한 순간을 잘 넘겼고 그 결과 혜미는 저를 보면 쪼르르 달려와 인사하는 예의바르고 상냥한 아이가 된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혜미는 오래 전부터 교사의 긍정적이고 부드러운 언어에 목말라 있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언젠가 영어기초가 부족한 아이들을 위해 보충수업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아이가 저에게 무슨 말을 건넨 듯 싶어 가까이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금방 뭐라고 했니?"
"아, 아니에요."

무슨 말을 하려다가 정작 기회를 주면 얼버무리거나 아예 입을 다물어버리는 아이들. 요즘 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 교사 혼자서 수업을 하다보니 정작 학생들은 자기의사를 표현할 기회를 갖지 못한 탓입니다. 거기에 말을 꺼내보았자 본전도 못 찾는 경우가 자꾸만 생기다 보면 지레 겁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경우 아이를 다그칠 일만은 아닙니다.

"말해봐. 안 잡아먹을 테니까."
"부진아 보충수업 언제까지 해요?"
"부진아? 우리 그런 말 쓰지 말자."
"그럼 뭐라고 해요?"
"그냥 보충수업이라고 하면 되잖아."
"그럼 보충수업 언제까지 해요?"

저는 아이의 까만 눈을 바라보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가 보고 싶을 때까지."

저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지만 아이는 그 말이 듣기 싫지는 않았는지 이마까지 환해지며 까르르 웃었습니다. 대신 옆에 있던 한 아이가 이렇게 푸념을 늘어놓습니다.

"그럼 한도 끝도 없겠다."

한도 끝도 없으니 일찍 마음을 잡고 공부나 열심히 하자는 것인지, 아이들은 더는 군소리가 없었습니다. 신기할 정도입니다.

그 날 오후 교무실에서 작년에 담임을 맡았던 한 아이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 아이는 교무실 한 쪽에 서 있었는데 제 눈길을 피하는 것을 보고서야 교무실에서 벌을 받고 있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평소 수업태도도 좋았고 일탈행동을 일삼던 아이도 아니어서 저로서는 좀 의외였습니다. 그런 만큼 그 아이도 저와 눈을 마주치는 것이 싫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저를 아빠라고 부르며 따르던 아이였으니.

스승의 날, 그 아이에게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노란 편지봉투에 노란 편지지였습니다. 깨알같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아빠. 오늘 스승의 날이에요. 아빠의 날인 거 아시죠? (…) 전에 징계 걸려서 선생님이 "왜 우리 선영이가 저기 있냐고, 우리 선영이가 그럴 애가 아닌데" 라고 말씀하셨을 때 솔직히 선생님께 너무 고마웠어요. 저를 이렇게 믿어주시는데…. 그때 아빠 얼굴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어요. 너무 죄송스러워서 행여 저한테 실망하신 건 아닌지. 그런데 급식실에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대해주셔서 너무 감사했어요.

편지를 읽고 나니 어렴풋이 급식실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아이는 식판을 들고 제 앞으로 다가오다가 저를 보더니 깜짝 놀라며 식판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제가 평소처럼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자 그제야 아이는 가렸던 식판을 내리고 그늘이 걷힌 맑은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넌 그런 아이였구나!" 하는 의미가 담긴 눈빛으로 아이를 쳐다보지 않은 것은 정말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아마도 스승의 날 저에게 사랑의 편지를 보내오지는 않았겠지요. 오랜만에 만나도 아빠라고 부르며 달려오기는커녕 저를 피하거나 외면해 버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이들에게는 섣부른 질책이나 충고보다도 따뜻한 신뢰의 눈빛이 더 약이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교사의 긍정적인 말 한 마디, 따뜻한 눈빛에 금방 마음을 고쳐먹는 아이들이 아직은 학교에 있습니다. 던지면 허공으로 날아가지 않고 되돌아올 줄 아는 부메랑을 닮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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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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