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민중의 한을 품고 핀 '피뿌리풀'

내게로 다가온 꽃들(57)

등록 2004.05.31 23:00수정 2004.06.01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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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수
이번에 소개해 드리는 꽃은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꽃이고, 제주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제주의 동부지역에서 드물게 만날 수 있는 귀한 꽃입니다. 그러니 참 귀한 꽃인 셈이죠.

작년에 고사리를 꺾으러 갔다가 우연히 만난 꽃, 첫 만남인데도 그 아름다움이 얼마나 선명하게 각인되었으면 봄이 시작되자 언제 만날까 마음을 졸였던 꽃이기도 합니다.


마음을 졸인 이유는 귀한 것이라면 무분별하게 채취해 가는 사람들의 소유욕과 마침 작년에 피뿌리풀을 만났던 그 근처에 무분별한 개발로 자연환경이 파괴되고 있었기에 올해는 못 보나 했거든요.

김민수
'피뿌리풀'이라는 이름이 붙은 내력은 뿌리의 색과 꽃의 색이 마치 핏빛 같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뿌리는 확인해 보지 못했지만 막 피어날 무렵의 꽃은 정말 핏빛 같습니다.

그런데 이 꽃은 희귀성을 떠나서 자생지가 아닌 곳에서는 활착이 매우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니 피뿌리풀은 가져서는 안될 꽃인 셈이죠. 섣불리 가지려고 하면 자신도 가지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이 꽃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기회마저 빼앗아버리는 것이죠.

그런데 야생화 사이트에 피뿌리풀을 찍어 올렸더니 꼭 한 번 실물을 보고 싶다는 지인이 계셔서 어디쯤 가시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 분이 다녀오셔서 30개체 정도 피어 있는 것을 보았고 20개체 정도는 뽑혀간 것을 보았노라고 분노하셨습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내년에는 그 곳에서 볼 수 있을 것인지 불안하기만 합니다.

김민수
꽃이며 뿌리까지 붉은 피뿌리풀의 자생지는 제주의 동쪽지역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제주의 동쪽은 제주에서 가장 소외된 곳이기도 하고, 어려운 시절마다 고난의 정점에서 고난을 당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제가 피뿌리풀을 만난 그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1948년 4·3항쟁 당시 토벌대에 의해서 사라진 마을이 멀지 않았기에 피뿌리풀은 제주 민중의 피를 품고 있는 꽃만 같았고, 예뻐서 뽑혀져 나가는 그들의 운명이 마치 외세에 의해서 삶의 근간을 위협 당하는 민중들의 삶을 보는 듯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제주 민중들의 피를 품고 핀 꽃, 그것이 바로 피뿌리풀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김민수
애들아.


제주는 여자와 돌과 바람이 많아서 삼다도라고 한단다. 그런데 왜 남자보다 여자가 많았을까? 그래, 전쟁이 잦으면 남자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많이 죽게 되니 자연 여자가 많아지는 것이란다. 그러니 제주에 여자가 많았다는 것은 전쟁이 많았다는 이야기와도 연결이 될 것이다.

삼별초항쟁, 일제시대, 4·3항쟁 등등 제주는 늘 전쟁의 크고 작은 소용돌이 속에서 늘 남정네들은 싸움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울 수밖에 없었단다. 제 구실을 하는 남자들은 모두 전쟁터로 끌려가니 생계를 위한 일은 여자들이 도맡아 할 수밖에…. 그러면서 제주의 여성들은 점점 더 강해졌어. 제주의 항일운동하면 해녀를 떠올리는 것도 이런 연유 때문이란다.

척박한 땅이다 보니 밭일과 가까운 바다에서 해산물을 채취해서 근근히 살아갈 수밖에 없었고 결국 여성들이 생계의 무게를 더 감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제주의 동쪽에는 오름이 많단다.

그 오름들 너머에 한라산이 있으니 어쩌면 제주의 동쪽은 천혜의 요새였고, 몸을 숨길 수 있는 좋은 곳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을 폭도로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공격의 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결국 제주 중산간, 그것도 동쪽을 중심으로 수많은 이들이 오름에서 들에서 죽어갔단다. 이 제주 민중들의 피를 먹고 피어난 꽃이 피뿌리풀이라면 믿어지겠니?


김민수
피뿌리풀을 보면서, 제주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서 '한라산'이라는 노래를 떠올렸습니다.

외로운 대지의 깃발 / 흩날리는 이녘의 땅 / 어둠 살 뚫고 피어난
피에 젖은 유채꽃이여 / 검붉은 저녘햇살에 / 꽃-잎 시들었어도
살 흐르는 세월에 그 향기 더욱 진하다


물론 유채꽃이야 60년대에 들어서면서 재배되기 시작한 것이니 '피에 젖은 유채꽃'이라는 표현은 틀리다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상징적인 의미로는 틀리지 않겠지요.

김민수
이번엔 몸이 영 시원치 않아 유채를 갈아 버렸수다게. 맴은 아팠지.

그러나 고건 하영 낫으로 베어야 하고, 말려서 다 털어 봐야 얼마 되지도 않으니 뙤약볕에서 죙일 그거 해봤자 본전도 안 된다말씨. 차라리 거름으로 쓰는 게 낫지. 작년에 그거 베느라 고생한 거 생각하면 지금도 오싹하네.


제주의 투박한 사투리를 그대로 옮기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래도 유채밭마다 유채를 베는 손길들이 분주하기만 합니다.

삶이란, 그 땀흘림이란 것이 다 물질로 보상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행복도 그러하기에 몇 푼 안 되는 것을 위해 그 이상의 땀을 흘린다고 할지라도 그냥 묵묵히 소금땀을 흘리는 것이 농심인 것이죠.

김민수
피뿌리풀.

이 꽃을 우리의 후손들도 보게 하는 것이 우리들의 책임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올 3월에 피뿌리풀을 재배하는 기술이 개발되어 조만간 자생지에 피뿌리풀을 심을 날이 올 것이라니 기대를 해 보기도 합니다.

참으로 예쁜 꽃, 참으로 슬픈 꽃을 만났습니다. 앞으로도 그 꽃이 필 무렵이면 나는 그 곳을 배회하며 그들과 눈맞춤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변방의 섬 제주의 역사를 점점 깊이 내 몸 속에 새기며 더욱 더 깊이 제주, 그리고 이 땅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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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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