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파는 것도 죄가 됩니꺼?"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63> 공장일기<37>

등록 2004.06.03 13:40수정 2004.06.03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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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마산문화> 3집 '전진을 위한 만남' 표지

<마산문화> 3집 '전진을 위한 만남' 표지 ⓒ 이종찬

1983년 당시 내가 다닌 공장의 현장노동자 대부분은 S라디에타 노조가 사측의 불법적인 탄압으로 깨졌다는 이야기를 자세히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마산문화> 3집 <전진을 위한 만남>에 S라디에타의 노조구성과정과 와해과정이 'S라디에타 노조의 외로운 몸부림'이란 제목으로 꼼꼼하게 실리자 현장노동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더불어 의창군 진동면 신기리(지금 마산시에 편입) 농민들이 '신기농민회'를 만들어 지역 유지들의 지배질서를 거부한 내용을 다룬 '신기농민회 회원들과의 대화'와 진양군 "관방마을 농민들의 수세 현물 납부투쟁'을 다룬 글은 현장노동자들에게 사용자와 노동자의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심어주었다.

"니, 지금 보고 있는 그기 무슨 책이가?"
"아… 아무 것도 아이라예."
"그기 대체 머슨(무슨) 책이기에 숨기쌓고 그라노. 그라이 내가 궁금증이 나서 더 보고 싶다 아이가."
"아… 안됩니더."
"안 되기는 뭐가 안돼. 가만, 이… 이게 뭐야? 이런 이상한 내용이 담긴 책은 뺄갱이 자식들이나 읽는 거 아이가."


그랬다. 그해 겨울, 조립부에서 나와 같이 일하던 여성노동자 한 명이 점심시간에 <마산문화> 3집을 읽다가 공장간부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 여성노동자는 햇살이 잘 드는 공장 뜨락 잔디밭에 앉아 그 책을 넋 나간 듯이 읽고 있다가 공장간부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고 했다.

그날 오후 나는 또다시 총무부장에게 불려갔다. 총무부장실에는 이미 여러 명의 여성노동자들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고개를 푹 숙인 채 서 있었다. 내가 들어가자 그 여성노동자들은 무슨 큰 죄나 지은 것처럼 슬슬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중 여성노동자 한 명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동안 총무부장의 엄포와 집요한 추궁에도 불구하고 나한테서 책을 한 권 샀다는 그런 이야기만 하고 <마산문화>와 관련된 구체적인 이야기는 일체 하지 않았다는 표시였다. 다행이었다. 나는 숨을 크게 한번 들이 쉬었다가 내뱉었다.


"너, 인자(이제) 정신 차린 줄 알았더만 아직까지도 이상한 책을 내는 그런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었구먼."
"아… 아입니더."
"그라모 우째서 이렇게 심한 불온서적을 선량한 근로자들한테 팔면서 자꾸만 부추기노?"
"제가 무얼 부추겼단 말입니꺼? 그라고 여기 있는 이 가시나들은 저한테 책을 샀다는 거 빼고는 아무런 죄가 없습니더. 그라이 퍼뜩 돌려보내 주이소."
"아쭈! 그래도 그 주제에 알량한 의리는 쪼매 남아 있다 이 말이지."


그때 노무과장이 보안대에 있다는 그 신사, 까만 양복을 잘 차려입은 그 신사를 데리고 총무부장실로 들어왔다. 이어 생산부장과 공작부 황복현 과장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생산부장과 황복현 과장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또 무슨 일이냐는 투로 나와 여성노동자들을 쭈욱 훑어봤다.


그 신사는 총무부장과 잠시 무슨 귓속말을 주고 받더니, 생산부장에게 여성노동자들을 데리고 가라고 했다. 그렇게 생산부장이 여성노동자들을 데리고 나가자 황복현 과장이 나섰다. 황복현 과장은 내가 알아서 잘 설득을 시킬테니 그만 나를 현장으로 돌려보내라고 했다. 그러자 총무부장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몇 번 끄덕이며 내게 물었다.

"이 책 어디서 났어?"
"그 책은예, 내캉 아주 친한 친구가 내 보고 좀 팔아달라캐서 몇 권 판 거뿐입니더. 책을 파는 거도 죄가 됩니꺼?"
"그 친구가 누구야? 그 친구 주소하고 연락처 좀 대 봐?"
"그건 알려줄 수 없습니더. 그라고 그런 거까지 밝히라카는 거는 총무부장님께서 제 사생활을 간섭하는 기 아입니꺼?"
"인자 보이(이제 보니까) 이 친구 이것도 아예 빨간 물이 많이 들었구먼. 그래. 그 나이에 군대에 끌려가고 싶나?"


나는 총무부장과 책의 출처에 대해 잠시 실랑이를 벌였다. 하지만 보안대에서 나온 그 신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재미 있다는 듯이 총무부장과 나를 바라보며 그저 빙글거리고만 있었다. 잠시 뒤 그 신사는 황복현 과장을 바라보더니 턱짓으로 나를 데리고 가라고 했다.

"아니, 그렇게 당하고도 또 사고를 치냐?"
"죄송합니더."
"아, 밤 말은 쥐가 듣고 낮 말은 새가 듣는다는 우리 속담도 몰라. 하여튼 조심을 해. 특히 너 주변에는 보이지 않는 눈과 귀가 늘 너를 감시하고 있다는 걸 명심하고."


그랬다. 책 사건(?)은 황복현 과장의 도움으로 그렇게 대충 마무리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날 노무과장과 생산부장에게 퇴근 무렵까지 따가운 질책을 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또 한 번 각서를 썼다. 다시는 공장에서 그 어떤 책도 팔지 않겠으며, 공장 밖에서도 그런 이상한 친구들과 절대 어울려 다니지 않겠다고.

나는 그렇게 책 사건(?)이 무사히 마무리 된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1984년 새해 연휴가 끝나고 조립부에 출근하자 하얀 스카프를 쓴 여성노동자들의 시선이 일시에 나한테 쏠렸다. 그리고 저마다 부러운 듯이 나를 바라보며 '앞으로 잘 부탁해예'라는 말을 했다. 무슨 일일까?

-조립부 사원 이종찬. 1984년 0월 0일 부로 사출실 근무를 명함과 동시에 사보 사내기자로 명함.

그랬다. 나는 또 한 번의 부서이동과 함께 졸지에 사보 창원공장 사내기자로 임명되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를 그렇게 벌레 보듯이 하는 공장간부들이 왜 나를 사내 사보 기자로 임명했을까. 그리고 왜 다시 사출실로 가라는 것일까. 그렇찮아도 조립부에는 남성노동자가 나 혼자 뿐이어서 쩔쩔 매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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