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공청소기에게 꾸벅 절을 하게 된 사연

교사의 사랑에 약한 아이들

등록 2004.06.13 10:30수정 2004.06.13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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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토요일이면 평소보다 30분 일찍 학교에 갑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손이 미처 가지 않은 도서실 구석구석까지 먼지를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학교가 높은 지대에 있다보니 운동장의 흙먼지가 바람에 실려 실내로 곧장 들어옵니다. 도서실에서 가장 먼지가 많이 쌓이는 곳은 창틀과 서가 그리고 서가에 꽂힌 책들입니다. 특히 책에 붙어 있는 먼지는 책장을 펼치는 순간 아이들의 입으로 곧바로 들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해하지요.

작년까지만 해도 서가와 서가에 꽂힌 책의 먼지만은 학부모 도우미들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청소당번이 있기는 하지만 바닥을 쓸고 닦는 것만으로 시간이 빠듯할뿐더러, 고1짜리 남학생들이 세심하게 먼지를 닦아낼 리는 없기 때문이지요. 학부모들은 먼지를 닦아 내는 일에 혼신의 힘을 쏟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걸레에 묻어 나오는 흙먼지가 고스란히 당신 자녀의 입 속으로 들어갈 것을 생각하면 끔찍하기도 하겠지요.

청소도구는 진공청소기와 걸레와 빗자루. 그 중에서도 흙먼지 제거에는 진공청소기가 으뜸입니다. 창틀에 쌓인 흙먼지를 없애기 위해서는 진공청소기를 분해하여 대롱을 직접 창틀에 갖다대면 효과만점입니다. 서가나 책에 붙은 먼지는 주로 걸레로 닦아내지만 가끔은 진공청소기를 이용하여 먼지를 빨아들이기도 합니다.

a 가끔은 내 안의 더러운 먼지도 없애주는 우리학교 청결지킴이, 도서실 진공청소기

가끔은 내 안의 더러운 먼지도 없애주는 우리학교 청결지킴이, 도서실 진공청소기 ⓒ 안준철

청소를 마치고 한결 깨끗하게 정돈된 도서실 소파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문득 한 쪽 구석에 놓인 진공청소기에 눈이 갔습니다. 그런데 마치 먼지 구덩이에 있다온 아이처럼 그 몰골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아차 싶었습니다. 꽤 오래 전에 진공청소기를 구입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진공청소기를 청소해준 기억이 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공청소기는 안팎을 다 청소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청소기 안에 흙먼지가 가득 차게 되면 기계가 자동으로 작동을 멈추기 때문에 기계를 계속 사용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무심한 사람이라고 해도 안에 있는 내용물을 비어주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겉 몸통인데 진공청소기는 원래 청소를 하는 도구라고만 생각을 했을 뿐, 청소기를 청소해 주어야한다는 생각은 미처 못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저는 걸레로 청소기의 몸통에 묻어 있는 먼지를 깨끗이 닦아주었습니다. 두 번 세 번. 그래도 불과 1분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흙먼지를 닦아주고 나니 진공청소기는 마치 가출했다가 돌아와 새 옷으로 갈아입은 소년처럼 때깔이 아주 고왔습니다. 문득, 모든 것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관심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열심히 도서실 청소를 도맡다시피 해온 진공청소기가 정작 자신은 먼지투성이로 방치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저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그것이 혹시 제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는지. 교사라는 직업을 아이들의 잘못된 습관이나 행동을 깨끗하게 청소를 해주는 직업으로 비유할 수 있다면, 정작 교사 자신의 내면을 청소하는 것은 게을리 하거나 까마득히 잊고 살아온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되니 가슴 한쪽이 찡해오면서 도서실 한쪽에 놓인 진공청소기에게 고마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고 게으름을 피우기도 하지만 그것이 한 순간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의 습관이나 인격으로 형성된다면 큰일이지요. 그럴 뻔한 것을 청소기가 일깨워주었으니 그에게 다가가 절을 꾸벅한 것이 크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a "선생님, 3교시가 저희반 수업이잖아요. 고생하실 텐데 미리 케익 좀 드세요"

"선생님, 3교시가 저희반 수업이잖아요. 고생하실 텐데 미리 케익 좀 드세요" ⓒ 안준철

저는 절을 하고 난 뒤에 진공청소기 앞에서 잠시 서 있었습니다. 반질반질하게 잘 닦인 진공청소기가 마치 스크린이라도 된 듯 전날 수업시간에 있었던 일이 한 아이의 얼굴과 함께 필름처럼 스쳐지나갔기 때문입니다. 날이 더워서 그랬던지 전날 아이들 대부분이 다 지쳐있었고, 저 또한 많이 지쳐 있었습니다.

"집중하세요. 집중. 공부를 못하는 것은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집중을 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자, 한 번 더 말합니다. 집중하세요. 고개를 모두 모니터를 향하세요. 그리고 눈을 크게 뜨세요."


목소리를 높일 만큼 높여서 간곡하게 말하자 아이들은 귀찮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모두 자세를 고치는 시늉은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한 아이만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요지부동이었지요. 다시 한번 강조하여 말을 했지만 마찬가지였습니다. 강요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싫어하는 아이. 끼도 있고, 자기 생각도 있는 아이. 그래서 조금은 긴장을 느끼며 접근했던 아이. 지금은 누구보다도 나를 잘 따르는 아이. 이 아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성희는 고개 안 들을 거야?"

결국 그냥 지나치지 않고 지적을 하기로 한 것인데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여전히 요지부동. 제 입에서는 곧바로 이런 말이 튀어 나왔습니다.

"좋아. 네 마음대로 해. 날이 좀 덥고 몸이 피곤하다고 선생님이 이렇게 간곡하게 부탁을 하는데도 듣지 않고.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자 우리끼리 수업하자."

그 말에 몸이 비로소 움직이고 있었지만 얼굴 표정에는 짜증이 잔뜩 묻어 있었습니다. 그날 수업을 마치고 반장이 일어나 인사를 할 때도 그 아이는 저를 바라보지 않고 고개를 떨군 채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한 순간 미운 생각이 들면서 순간적으로 극심한 피로감이 밀려왔습니다. 아이들이 가버리고 없는 텅 빈 도서실에서 뜻밖에도 제 입에서는 이런 말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럼 날 더러 어떻게 하란 말이야?"

3교시 수업시간, 저는 모둠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 성희에게 조심스레 다가갔습니다. 그날 수업은 전날의 수업과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진공청소기 덕분이었지요. 가만 생각해보니 수업시간 아이들이 집중하지 않은 것은 아이들 잘못이 아니라 교사인 제 잘못이었습니다. 수업이란 아이들이 흥미를 느껴야 집중을 하는 것이고, 흥미 있는 수업을 제공해줄 책임과 의무가 교사에게 있다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청소기 앞에서 깨닫게 된 것이지요.

"성희, 오늘은 열심히 하네."
"감사합니다!"
"어디 보자. 어, 틀린 데가 몇 군데 있는데. 점수가 좀 깎기겠는데…"
"어디요? 선생님, 어디요?"
"그건 네가 찾아야지. 그런데 성희야…"

a 친구 생일파티를 끝내고 케익 한 조각을 들고 도서실을 찾아온 1학년 3반 귀여운 악동들

친구 생일파티를 끝내고 케익 한 조각을 들고 도서실을 찾아온 1학년 3반 귀여운 악동들 ⓒ 안준철

제가 아이의 이름을 불러놓고 잠시 뜸을 들이자 무슨 일일까 싶었는지 틀린 곳을 찾다가 말고 고개를 들어 까만 눈으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그 눈을 바라보며 배우가 연기라도 하듯이 표정을 그럴듯하게 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말이야, 작은 일로 다투어도 마음이 상하고 아픈 법이거든. 나 어제 너 때문에 속이 많이 상했어. 알고 있니?"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성희의 얼굴이 마치 감독의 지시를 받은 배우의 표정처럼 금세 환해지더니 뒤이어 풀잎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 맑고 투명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선생님, 죄송했어요. 다시는 선생님 속상하게 해드리지 않을 거예요."

정말이지 아이들은 교사의 사랑에 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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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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