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나보다 방이 더 중요하지요?"

우리집 늦둥이 은빈이의 사랑이야기(16)

등록 2004.07.16 12:32수정 2004.07.16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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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은빈이(초2년)는 어질러 놓는데 선수입니다. 은빈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거실이고 안방이고, 내 서재고 마구 어질러 놓고는 하나도 치우질 않습니다. 어제 잠시 외출하고 돌아오니 안방 가득히 책이며 스케치북, 크레파스, 인형 등등 얼마나 어질러 놓았는지 발을 디딜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은빈이가 어딜 갔는지 보이질 않는 것이었습니다. ‘은빈아!’하고 크게 불렀더니 화장실에서 대답을 합니다.


a 아빠!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아빠!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 박철

“은빈아! 너 방 그만 좀 어질러라. 어질러 놓았으면 치울 줄도 알아야지.”

내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아무 대꾸가 없습니다. 이 녀석이 화장실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문을 열어 보았더니 화장실 거울 앞에서 머리에 물을 찍어 바르고는 멋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머리를 좌우로 움직여 가면서 똥폼(?)을 잡는데 자기 딴에는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습니다.

요즘 은빈이가 거울을 자주 봅니다. 아침에 학교에 갈 때에는 옷과의 전쟁입니다. 은빈이가 좋아하는 옷은 주로 짧은 치마입니다. 좋아하는 남자친구가 있냐고 물어보면 없다고 펄쩍 뛰면서도 요즘 들어서 부쩍 모양을 냅니다. 어느 때는 아내 화장품을 찍어 바르기도 합니다.

내 얘기를 들은 척 만 척 하고 있는 은빈이게 화장실 문을 연 채로 말했습니다.
“은빈아! 너는 만날 남자애들에게 예쁘게 보이려고 멋은 부릴 줄 알면서 자기 방 하나 치울 줄 모르냐?”
그랬더니 은빈이는 입이 비쭉 나와서 나를 쳐다보며 말합니다.
“아빠! 아빠 진짜 우리 아빠 맞아요? 그리고 아빠는 내가 중요해요 방이 중요해요? 아빠는 나보다 방이 더 중요하지요?”

오늘은 은빈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여름방학을 하는 날입니다. 은빈이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노래를 크게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듣는 노래였습니다. 오늘부터 방학이라고 신이 난 모양입니다. 아내가 은빈이에게 묻습니다.


“은빈아! 너 지금 부르는 노래가 무슨 노래냐?”
“응, 쥬얼리 노래야.”
“야, 초등학생이 동요나 학교에서 배운 노래를 불러야지 어른들 노래를 부르냐? 그 노래 처음 듣는 노래인데 누구한테 배웠니?”
“쉬워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거 몇 번 따라하면 금방 배울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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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철

아침부터 은빈이가 수다를 떨다가 학교에 갔습니다. 그런데 학교에 간 지 한 시간쯤 되었을까 은빈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비가 오는 날 가끔 구내전화를 이용하지요.


“아빠! 지금 나 데리러오면 안돼요?”
“벌써 학교 끝났어?”
“예. 오늘 방학이라 금방 끝났어요.”
“은빈아, 지금 비가 오지 않는데 슬슬 걸어와라. 알았지.”
“아빠 미워. 아빠 잠깐만. 와 비온다. 아빠, 빨리 데리러 와.”

가느다란 실비가 오고 있었습니다. 어쩔 수없이 차를 몰고 은빈이가 다니는 학교에 갔습니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장대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만치서 은빈이가 손우산을 하고 뛰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와, 만세다. 오늘부터 공부 안 해도 된다!”
“야! 무슨 학생이 공부 안하게 되었다고 만세를 부르냐? 너 학생 맞냐?”
“아빠! 아빠 진짜 우리 아빠 맞아요?”
“은빈아, 아빠는 오늘부터 걱정이다. 너 이제 만날 집에서 뭉그적거리고 잔뜩 어질러 놓고 아빠 못 살게 굴 거잖아?”
“아니에요. 방학동안에 효도 많이 할 거예요.”
“어떻게 효도 할 건데?”
“엄마 일도 도와드리고, 할머니 말동무도 해 드리고, 다롱이(개 이름) 밥도 내가 다 줄 거예요.”
“야, 아빠를 위해선 아무 것도 안 할 거야? 아빠 다리도 주물러 주고 그럴 거냐?”
“…네”(간신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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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철

자동차를 구멍가게 앞에 세웠습니다. 내가 천원짜리 지폐 두 장을 주면서 돈으로 아이스크림 사먹으라고 했더니 좋아서 펄쩍 뜁니다.
“와! 우리 아빠 최고다.”

집에 도착해서 잠시 묵상기도를 하고 사진집을 보고 있는데 은빈이가 내 서재에 들어왔습니다.

“아빠! 나 지금 방 청소 하고 왔어요. 오빠가 어질러 놓은 거 내가 다 치웠어요.”
“정말? 참 잘했다.”
“아빠! 엄마가 외출하셨는데 아빠랑 둘이서만 대룡리 시장에 가서 자장면 사먹으면 안될까요?”

은빈이는 여전히 나보다 한 수 위입니다. 여름방학 기념으로 은빈이와 둘이서 아무래도 자장면 사 먹으로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밖에는 다시 실비가 오고 있군요. 좋은 날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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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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