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왕년에 노셨어요?"

한달 연수를 떠나기 전 아이들과 가진 가을 수업

등록 2004.09.02 07:11수정 2004.09.02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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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가을이 시작되는 첫날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아이들에게 하얀 종이를 한 장씩 나누어 주고 뭔가를 적어 보라고 했더니 제법 읽을 만한 것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해마다 하는 가을 수업을 올해는 연수 때문에 못하겠거니 하다가 조금은 아쉬운 마음도 들고, 또 아이들과 한달 넘게 헤어질 것을 생각하니 울컥 보고 싶겠다는 생각도 들어서 약식 가을 수업을 하게 된 것이지요.

"낙서를 해도 좋고, 그림을 그려도 좋고, 한참 낙서를 하다가 갑자기 시상이 떠오르면 한 쪽 구석에 시를 쓰면 더욱 좋고요. 시가 어려우면 편지를 써도 좋습니다. 나에게 쓰는 가을 편지 같은 것을 쓰는 것은 어떨까요? 모처럼 여러분 자신과 만나는 시간을 가져 보세요. 누군가 화해하고 싶은 대상이 있으면 화해도 하고, 그리고 혹시 선생님에게 섭섭했던 일이나 선생님이 고쳤으면 하는 것이 있으면 적어 주셔도 좋고요."

해마다 귀중한 수업 시간을 잘라 내어 가을 수업을 하는 이유를 굳이 설명하라고 한다면 아무리 못해도 원고지 50매 이상은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만큼 할 말이 많다. 하지만 그보다는 이번 가을 수업에 한 아이가 쓴 글을 대신 보여 주고 싶습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이 우리들에게 잘 해 주는 친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제껏 선생님과 함께 수업하면서 섭섭한 마음이 조금 있어요. 다른 친구들에게만 이야기를 잘 걸어주고 저에게는 눈빛만 주시는 선생님... 앞으로는 저에게도 아무 말이나 해주세요.(…)

만약 이 글을 수업을 마치고 교실을 나와 복도를 지나면서 읽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랬다면 다시 발걸음을 돌려 아이를 불러 내어 쉬는 시간 내내 말을 걸고 장난도 치고 했을 터인데, 불행하게도 저는 이 편지를 집에 와서 읽었습니다. 더욱 안타까웠던 것은 제가 연수를 떠나는 까닭에 그 아이를 만나려면 한달 남짓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아이들이 쓴 글은 무엇보다도 교사로서의 제 자신을 돌아 보게 하는 유익이 있습니다. 비교적 자아도취에 빠지기를 좋아하는, 그래서 왕자병에 걸렸다는 말을 가끔씩 듣기도 하는 저로서는 아이들이 들려 주는 이런 귓속말이 소중할 수밖에 없지요. 물론 아이들에게 자기와 만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도 크지만 말입니다.

내가 나에게 쓰는 편지를 쓸 수 있는 시간... 양선아, 나는 니 맘 속에 살고 있어. 나는 네가 기쁠 때 슬플 때 등등 잘 안다. 다른 사람이 모르는 것도 나는 너하고 이야기 할 수 있고 생각도 같이 할 수 있어... 아, 나에게도 마음이란 게 존재하기는 하는구나. 너무 작은 것에 아파하지마. 그럼 니 속에 있는 나도 아프거든. 우리 친하게 지내자. 그러면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잘 이겨낼 수 있을 거야. 아자!! 너는 잘 할 거야.


'아, 나에게도 마음이란 게 존재하기는 하는구나.'

올 가을 수업은 이 한 마디만으로도 충분한 수확을 얻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아파 오기도 합니다. 왜 아이들은 마음이 존재하는 것을 깜빡 잊거나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이런 생각에 조금은 심각해지려고 하는 저를 환히 웃게 하는 글도 눈에 띄었습니다.


제가 화날 때나 기분 안 좋아 보일 땐 가만히 놔두세요. 솔직히 선생님으로서 가만히 놔두시지 않겠지만 어쩔 수 없어요. 이해해 주세요. 선생님, 연수 가셔서 공부 잘하고 오세요. 멋있게 변해서 오시기 바랍니다. 전 열심히 살 빼고 있을게요. 참 선생님, 왕년에 노셨어요? 하하. 묻고 싶었어요.

'선생님, 왕년에 노셨어요?'

저는 이 말의 의미를 한참이나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도취가 심한 왕자병에 걸린 선생다운 결론을 내리게 되었지요.

'어디 학생이 선생님에게 기분 안 좋을 때 가만히 놔두라는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그만큼 내가 편하고 이해의 폭이 넓은 선생이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맞아. 바로 그거야. 왕년에 한 가락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아이들의 마음을 그렇게 넉넉하게 이해해 줄 수가 있겠어?'

저는 수업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집중하라는 말을 자주 하는 편입니다. 물론 교사로서 당연한 주문이지만 적어도 하루 7시간을 그 아이의 기분에 상관없이 무언가에 집중을 강요당하는 것도 그리 행복한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집중해야 하는 이유를 모른 채 집중해야 한다면 더욱 그런 기분이 들겠지요.

조금은 엉뚱한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가을 수업을 하는 이유 중에는 아이들에게 일년에 단 한 두 시간만이라도 '슬플 수 있는 자유'를 주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출석을 부르면서 아이들과 눈을 맞추다 보면 필경 몇 명은 낯빛이 우울하거나 슬픔에 가득 차 있는 것이 눈에 띄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 아이들도 제 수업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 슬픔의 이유가 무엇이든 그것을 익힐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을 터인데요.

요즘 들어 내 맘이 예전 같지가 않다. 점점 더 힘겨워져만 간다. 지금 내가 왜 이 자리에 서 있나?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자꾸만 이상한 생각들이 내 머리 속에서 맴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루고 싶었던 것들은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소중한 것들만 하나씩 자꾸 잃어만 간다. 이제 나도 한번쯤은 내가 원했던 것들, 이루고 싶었던 것들을 다 이루고 싶다. 지금 현재로선 모든 게 다 이겨내기 힘들겠지만 날 지켜 보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날 위해서라도 해 보는 데까지 해보고 싶다.

물론 한 순간 그런 결심을 한다고 아이들의 태도나 삶이 금방 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심하게 흘러가는 시간들을 잠시 멈추게 하고 자기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 보는 것은 개인의 삶에 큰 유익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아무리 성실한 삶을 살아도 그 안에 '자기 삶'이 없으면 공허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마지막으로 저와 '티격태격'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한 아이가 쓴 편지를 소개할까 합니다. 이 편지를 읽고 제가 얼마나 속이 좁은 선생이었는가도 알게 되었지요. 제가 먼저 장난을 걸어 놓고서도 아이가 장난이 심하다 싶으면 그래도 내가 '선생'인데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지요. 물론 그보다는 한 아이를 얻었다는 느낌이 더 컸지만.

선생님, 벌써 가을이네요. 맨날 영어 시간마다 티격태격하고 그랬는데요. 진심이 아니고 장난인 거 아시죠? 저희가 공부할 때 떠들어도 이해해 주시고 자상하시고…. 사실 선생님이 너무 잘해 주셔서 어린 아이처럼 떼 쓰고 그런 점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근데요, 제가 존경하고 정말 좋아하는 선생님이세요(아부 떠는 거 아니에요). 선생님 ♥해요. 한 달 동안 못 본다니 섭섭해요.

아, 저에겐 이런 아이들이 있습니다. 한달 동안의 연수로 영어 교사로서의 전문성도 높일 생각이지만, 정말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이 되어 돌아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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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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