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할미, 초가집을 스레트로 바꾸다

진도군 의신면 회동리 신비의 바닷길

등록 2004.09.10 19:58수정 2004.09.14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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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군 고군면 회동리와 의신면 모도리 사이 2.8km의 바다가 조수간만의 차로 해저의 사구 '신비의 바닷길'로 알려진 갯벌이 드러난다. 1975년 이 현장을 목격한 주한 프랑스대사 피에르 랑디가 '한국판 모세의 기적'이라 감탄하고 프랑스 신문에 소개한 것을 계기로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일본TV에서 이 장면을 촬영하여 일본 현지에 방송되면서 일본 관광객들이 단체로 찾기도 하였다. 진도군은 1991년 지방자치제 실시이후 대형 주차장, 청소년수련관 등 부대시설을 만들고, 대형 야외 공연장과 '뽕 할머니' 동상을 세워 대표 축제 만들기에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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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초가지붕을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꾼 영등 할미

‘영등’은 하늘에 사는 ‘바람신’으로, 음력 2월 초하루에 인간이 사는 땅에 내려온다고 한다. 지역에 따라 3일, 15일, 20일을 머물다가 올라가는데 내려올 때 딸을 데리고 내려 오면 일기가 편안하지만 며느리와 함께 오면 바람이 많이 불고 일기가 불순하다고 한다.

날씨와 직접 관계되어 농사의 풍흉, 어업의 풍어를 결정하기 때문에 영등 할미와 며느리에게 제를 지내는데 이를 ‘바람 올린다’라고 하기도 한다.

영등굿놀이는 <동국여지승람>과 <동국세시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는 마을굿(제사)로 음력 2월 초하루에 들어와 2월 보름 무렵에 나가는 영등신, 즉 영등 할미를 모시는 제사이다. 제주의 경우 영등 할미가 내려와 보말이라는 고동을 까먹으며 미역씨, 전복씨, 소라씨 등을 제주 해역에 뿌려 번식하게 하고 올라 간다고 전해지고 있다.


어민들은 2월을 ‘영등달’이라고 부른다. 바람이 많기 때문에 고기잡이를 삼가지만, 영등사리(‘영등살’이라고도 함)라고 해서 바닷물이 가장 많이 들고나는 시기라 바지락, 소라, 낙지 등 갯벌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매우 바쁜 시기이다. 양력으로 3월과 4월은 계절적으로 겨울과 봄이 교체하는 시기로 김과 미역 등 해조류 양식이 마무리되는 시기이다. 그리고 삼마이(고기잡는 그물)나 낭장망 등 고기잡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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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1976년 프랑스대사를 처음으로 만났던 일을 당시 회동마을 이장이었던 박상기(75)씨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내가 76년도 이장하고 지도자를 겸해서 할 땐디. 누가 이장을 찾는다고 그래, 만났단 말이여. 한국말도 잘 하드만. 불란서 대사관이여. 귀향하게 되었는데 진도가 작품이 유명해서 작품하고 진돗개하고 사려고 왔다가 마침 이 광경을 보았어. 묘하게. 저것이 뭐냐고 깜짝 놀랐어. 몇 백 년부터 그랬고, 바지락도 많이 파고, 소라, 낙지도 잡고 싶은 대로 잡는다고 그랬어. 세상이 이렇게 좋은 것을 놔두고 자기들만 보았냐고 하는 것이여, 탄복을 하고 갔어.

그 뒤에 바로 군수가 전화가 와서 불란서 대사를 만났던 곳에 표석을 세우라는 것이여. 그리고 우리 부락에 초가집이 전부 스레트(슬레이트)로 바꿨어. 동네 이장하면서 혼났그만. 타 동네는 스레트가 있도 안은디 개명되어버리니까 뭔 일인고 하고 놀래 부렀제.

일본 놈들이 어떻게 알고 나무로 100m까지 올려서 사진 촬영을 했어. 한국 비행기를 차대해 가지고 지상, 지하 촬영을 해서 그래 가지고 일본 가서 떼돈 벌어 부렀다구만. 그래 가지고 일본 놈들이 일년에 4~5천 명이 왔제."

공식적으로 전하는 뽕 할머니의 이야기는 이렇다. 서기 1480년경 손동지라는 사람이 제주도로 유배 도중 풍랑으로 표류하여 지금의 회동마을에 살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호랑이의 침해가 심하여 마을을 '호동'이라 불렀다. 그 후에 호랑이의 침해가 날로 심해져서 살기가 어렵게 되자 마을 사람들이 뗏목을 타고 의신면 ‘모도’라는 섬마을로 피해갔다. 그런데 황망 중에 뽕 할머니 한분을 호동마을에 남겼고 뽕 할머니는 헤어진 가족을 만나고 싶어서 매일 용왕님께 기원했다.

어느날 꿈 속에 용왕님이 나타나시어 “내일 무지개를 내릴 터이니 바다를 건너가라”는 선몽이 있어 모도에서 가까운 바닷가에 나가 기도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호동의 뿔치와 모도 뿔치 사이에 무지개처럼 치등(모래등)이 나타났다. 그 길로 마을 사람들이 뽕 할머니를 찾기 위해 징과 꽹과리를 치면서 호동에 도착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나의 기도로 바닷길이 열려 너희들을 만났으니 이젠 죽어도 한이 없다”는 유언을 남긴 채 기진하여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를 본 주민들은 뽕 할머니의 소망이 치등으로 변하였고 영(靈)이 등천하였다 하여 영등살이라 칭하고 이곳에서 매년 제사를 지냈다. 그 후 자식이 없는 사람, 사랑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출처, 진도군 홈페이지).

a 뽕할머니 제당에 영등축제의 소망달기

뽕할머니 제당에 영등축제의 소망달기 ⓒ 김준

생계를 이어 주던 갯벌

이곳 어민들에게 바닷길은 신비롭기보다는 생계를 이어 주는 갯벌이었다. 물이 빠지면 갯벌에 나가 낙지와 소라를 잡고, 바지락을 파기도 하였다. 양식어업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 바다가 열리면 주는 대로 가져다 먹기도 하고 팔기도 했다. 회동 수퍼에서 만난 주민의 이야기이다.

"옛날에 우리들 20세 미만 때는 짐으로 져 날렸어. 아, 이 앞에 모도 뒤에 나가면 작은 섬이 세개 있는데 그곳에 조기가 바글바글 했어. 요새도 돔도 낚고 고기도 겁나게 잡아. 낚시로. 바닷길이 났다 그러면 바지게를 갖고 소라, 낙지, 바지락은 말할 것도 없고. 엎져 들어가던 초가집 살던 시절에 그것 팔아다 먹고 살았제."

축제가 시작되면 마을 횟집 3곳에서는 선착장에 나가 횟감에 술 장사를 하고, 주민 너댓 명은 마을 입구에서 함지박을 놓고 갯벌에서 뜯은 해조류와 건어물 등을 팔기도 한다. 회동에는 숙박 시설이 없기 때문에 마을의 집들은 모두 민박으로 전환했다.

7~8년 전까지만 해도 영등제에 참여하려면 한달 전에 민박을 예약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교통이 발달하고 도로 사정이 좋아져 당일치기로 구경하고 가 버리기 때문에 민박집 운영이 잘 되지 않는다. 한참 때는 축제가 시작되면 차들이 해남 읍내까지 막히기도 했고, 회동에 와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는 사람이 많았다.

축제 첫날 갯벌에 나간 사람들은 미역, 다시마를 한부대씩 건져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물길따라 빠져 나가지 못한 고기들을 주울 수 있고, 낙지도 잡을 수 있다. 물론 호미 등 도구를 가지고 가면 바지락도 마음껏 파갈 수 있다.

이제 회동을 비롯한 인근 어민들은 김 양식과 그물어업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과거에 생계를 이어 주던 갯벌을 축제라는 이름으로 외지 사람들에게 내어 주고 있는 셈이다. 지금도 물이 빠지면 주민들은 갯벌에 나가 바지락을 파고, 반찬거리를 만들어 오고 있다.

a 신비의 바닷길에서 해조류를 채취하는 관광객들

신비의 바닷길에서 해조류를 채취하는 관광객들 ⓒ 김준

김발로 먹고 사는 회동사람들

회동 사람들은 김발로 먹고 산다. 회동이 김발로 생계를 유지하기 시작한 것은 30여 년 전부터이다. 인근 완도에서는 일찍부터 김발이 시작되었지만 갯벌이 발달하지 않는 진도에서는 김보다는 미역이 유명했다. ‘진도곽’으로 알려진 진도 미역은 딸 가진 어머니가 혼수 감으로 미리 준비할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초기 양식 기술로는 갯벌이 발달하지 않는 곳에서 김 양식이 불가능했다. 깊은 바다에서도 김 양식을 할 수 있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회동을 비롯한 진도 지역에도 김 양식이 널리 확대됐다. 회동을 비롯한 모나리, 가계, 모도, 그리고 원포리 등 진도의 동남쪽의 어촌에는 김 양식이 발달했다. 회동은 가구당 100줄로 200때(40m가 한때로 두때를 묶어서 양식을 하고 있다)를 양식하고 있다.

9월에 시작해서 4월까지 김발을 하게 되는데, 9월 초에 김발을 제작하여 중순 무렵까지 포자를 붙인다. 포자는 대여섯때의 김발을 묶어서 그 위에 포자(김 종자)가 붙은 패각(조개 껍질)를 뿌리고 차광막으로 싼다. 이를 다시 비닐로 싸서 잘 묶은 다음 바다에 넣어 둔다. 이렇게 대여섯 나날이 지나면 김발에 포자가 붙는다.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바다에서 꺼내어 부표를 달아 수일 내에 양식장으로 옮겨서 김 양식을 시작한다. 이후 40여 일이 지나면 초사리(첫 채취)를 할 수 있다. 날씨에 따라 다르지만 겨울철에 가장 활발하게 채취를 하며 가격도 좋고 품질도 좋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생산량과 품질이 떨어진다. 양질의 김을 얻기 위해서는 적절한 햇볕 노출과 바람을 맞아야 한다.

20여년 전 정부미 부대로 한가마니면 당시 3만원 정도 했다고 하는데, 작년의 경우도 가격이 비슷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당시 김이 얼마나 숱했는지 알 수 있다. 요즘 한철하면 평균 5천만원 이상의 소득을 올리는데 포자 값, 영양제 값, 시설비 등을 제하고 나면 3천만 원 소득은 되는 모양이다.

a 김발을 만들고 있는 주민

김발을 만들고 있는 주민 ⓒ 김준

갯벌과 바다가 ‘영등할미’다

김 양식이 끝나고 신비의 바닷길이 축제로 부산해질 무렵이면, 어부들은 겨우내 잘 보관해 둔 그물을 끄집어 낸다. 회동 옆 모나리 마을은 ‘삼마이’로 유명하다. 자망을 응용해 만든 삼마이는 그물이 삼중으로 되어 있어 양쪽의 그물은 코가 좀 크고 가운데 그물은 코가 작다. 많지는 않지만 멸치 낭장망을 하는 가구도 있다. 가계, 회동, 모나리 등 인근 마을에 십여 가구가 낭장망을 통해 멸치를 잡고 있다. 그물을 이용한 고기잡이는 봄에 시작해서 가을까지 계속된다.

회동 앞 갯벌에서 조도군도까지 이어지는 바다는 다양한 어종들이 서식하고 산란하는 곳이다. 소형 그물로 고기가 잡힌다는 것은 바다와 갯벌이 양호한 생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멸치 낭장망의 경우 한 사람이 대여섯 틀을 가지고 멸치를 잡는다. 물살이 살아 있는 사리에 그물을 쳤다가 조금에 빼내기 때문에 태풍이나 바람 등이 없다면 한달에 최소 두 번은 물을 볼 수 있다. 멸치 낭장망이나 김발을 하는 사람들 중 일손이 없는 사람들은 직업소개소에 한달 120여만원의 월급을 주고 일손을 구해서 어장 일을 한다. 하지만 이 경우도 걸핏하면 도망가기 때문에 늘 일손 부족을 염려해야 한다.

a 낭장망을 손질하는 회동 어민

낭장망을 손질하는 회동 어민 ⓒ 김준

a 낭장망을 바다에 넣기 위해 정리하고 있다

낭장망을 바다에 넣기 위해 정리하고 있다 ⓒ 김준

회동에서 유일하게 멸치 낭장을 하는 68세의 박아무개씨는 아내와 아들, 그리고 한명의 일꾼을 사서 멸치 낭장과 김발을 하고 있다. 금년에 벌써 세번째 태풍이 오면서 멸치 낭장은 재미를 못보고 김발을 준비해야 할 판이다. 6틀을 가지고 멸치를 잡는데 얼마 전에는 열박스도 채우지 못했다. 한박스에 1만8천원에 위판되기 때문에 수수료와 경비를 제하면 적자라며 한숨만 몰아 쉰다.

삼마이로 고기를 잡는 어민들은 박대나 장대를 주로 잡으며, 봄철에는 숭어도 많이 잡힌다. 박대와 장대는 말려서 건어물로 판매하는데, 장대는 kg 3천원, 박대는 5천원 정도 하는데 보통 400~500kg 정도 잡기 때문에 2백만원 벌이는 하는 셈이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조도는 한때 조기잡이로 유명했다. 3월 조기잡이 철이 되면 팔도에 배들이 조도에 모여 들어 조기잡이를 시작해 연평까지 조기를 따라가며 그물질을 했다. 뽕 할머니의 가족들 동상이 세워져 있는 모도 뒤쪽에 상병도, 중병도, 하병도 등 작은 섬들이 있다. 이곳엔 요즘 돔을 비롯해 각종 고기들이 올라와 낚시꾼들의 차량이 회동과 모나리 일대에 줄을 지어 서기도 한다. 40여년 전 그곳에서 조기들을 무수히 잡혔다.

내년 4월이면 영등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곳 갯벌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신비로운 바닷길을 걸으면서 바지락도 파고, 다시마와 미역도 건져 올릴 것이다. 다행히 그 곳 바다는 축제로 온갖 상처를 안은 갯벌을 다시 풍성하게 치료하여 어민들에게 돌려 준다. 그 곳에서 옛날처럼 황금 조기를 잡을 수는 없지만 여전히 낙지와 바지락이 있고, 낚시꾼들을 유혹하는 손맛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그 갯벌이 있었기에 회동 사람들은 큰 힘을 받고 생활할 수 있고, 국가로부터 각종 지원을 받고 있다. 바다와 갯벌은 어민들에게 바로 ‘영등할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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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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