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노동으로 피어난 '꽃무릇'

내게로 다가온 꽃들(95)

등록 2004.10.15 17:26수정 2004.10.16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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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꽃무릇의 원래 이름은 석산(石蒜)입니다. 이파리와 꽃이 만나지 못하는 '화엽불상견(花葉不相見)'이라 상사화(相思花)로 불리기도 하지만 전혀 다른 꽃입니다.

상사화와 꽃무릇의 꽃 이야기는 거의 비슷한데 상사화는 스님을 짝사랑한 소녀가 죽어 핀 꽃이라는 설이 있고, 꽃무릇은 소녀를 짝사랑한 스님이 소녀를 생각하며 사찰근처에 심은 꽃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사찰 근처에서 피는 꽃들 중에서 많은 것은 수련과 연꽃, 부처꽃 등 물을 좋아하는 식물인데 상사화와 꽃무릇도 이에 해당하겠죠. 상사화보다 독성이 강한 알뿌리를 가지고 있는 꽃무릇이지만 알뿌리에 있는 성분이 탱화를 그릴 때 섞어 쓰면 색이 변하지 않고 오래가기 때문에 사찰 주변에 많이 심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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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꽃무릇이 활짝 핀 모습을 보면 마치 불꽃놀이를 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이 꽃은 여름의 끝자락을 붙잡고 피어나는 꽃이며, 가을의 초입에 피는 꽃이니 가는 여름을 아쉬워하며 꽃들이 모여 불꽃놀이를 하는 것만 같습니다.

꽃들의 축제라고나 할까요?

꽃무릇은 독성이 강해, 함평에서는 '눈에피꽃'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가까이 하면 눈에서 피가 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아름다운 꽃이라 하여 함부로 가까이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너무 아름다워서 근접할 수 없는 존재 같은 꽃 그리고 그 상징성으로 인해 속세에서는 멀리하는 꽃입니다.

충정도나 전라도에서는 '상여꽃'이라고도 한답니다. 이파리와 꽃이 만나지 못하는 이별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상사화는 '과부꽃'이라 하여 집 안에 심으면 남편과 사별하게 된다는 속설이 있어 해안가나 섬에 사는 이들에게는 집안에 심는 것을 삼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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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너무 예뻐도 이렇게 가까이 하지 않는 꽃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신이 꽃을 만들 때 예쁜 꽃들은 꺾이기 쉬우니 가시도 주고, 독성도 품게 해서 그들을 지켜가게 했는가 봅니다.


꽃무릇은 청명한 가을하늘을 배경으로 보는 것이 가장 예쁜 것 같습니다. 거기에 뭉게구름이 살짝 배경으로 깔리면 더 예쁘죠. 그런데 올해 제주는 꽃무릇이 피어있는 기간 내내 맑은 하늘을 볼 수가 없었답니다. 아쉬운 일이었지요.

꽃무릇의 화사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꽃을 피운 후 길어야 이틀정도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다 시들어버립니다. 그러나 군락지에서는 서로 순서를 기다렸다 피는 듯 피어나기에 한동안 꽃무릇이 물들여 가는 붉은 들판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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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그렇게 짧은 순간을 위해서 알뿌리는 일년 내내 인내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꽃무릇의 알뿌리가 대견스럽습니다. 그리고 꽃과 만나지 못하는 이파리도 꽃을 피우는데는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합니다. 광합성을 함으로서 꽃을 피우는데 필요한 영양분들을 공급하는 것이죠.

많은 사람들은 당장에 내가 어떤 결실을 맺는 것이 아니라면 도외시하고, 자기가 땀 흘린 것은 자기가 얻어야만 직성이 풀립니다. 그러나 그저 묵묵히 내가 열매를 거두지 못하더라도 그 누군가가 그로 인해 행복해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행복해 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기에 살만한 세상, 아름다운 세상이겠지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영국 고전파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가 그의 저서 <도덕감정론>(1759)과 <국부론>(1776)에서 표현한 유명한 말인데, 시민사회에서 개인의 이기심에 입각한 경제적 행위가 결과적으로는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에 이바지하며 이러한 사적 이기심과 사회적 번영을 매개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각 개인은 자기의 이익을 뜻대로 추구하고 있는 동안에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상상치 못했던 사회전체의 이익을 가져온다고 보았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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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인간이 자연에 순응하면서 살아왔다면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의 개념이 옳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철저하게 반자연적인 삶을 살아오면서 사회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일한다고 하면서 철저하게 개인적인 삶을 살아감으로 결국 자신까지도 파멸에 이르는 길을 열어놓은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될 때가 많습니다.

자연은 '보이지 않는 손'의 법칙대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자기의 모습만 그대로 나타내 보이고, 때로는 자신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서 생존투쟁을 하면서도 늘 그렇게 넉넉하게 어울려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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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그림자 노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집안 식구들끼리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서로 보살피고 거드는 일을 의미하는데 이 그림자 노동은 한 집안 식구들 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몸담고 있는 모든 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삶이 어쩌면 이 '그림자 노동'을 하는 이들의 헌신으로 살아가는 것이겠지요.

꽃무릇의 이파리와 알뿌리가 바로 이 '그림자 노동'을 함으로써 예쁜 꽃을 화들짝 피어내는 것이니 꽃만 보고 예쁘다 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뿌리와 꽃이 피기 전 푸르던 이파리들에게도 예쁘다는 칭찬을 해줘야겠습니다.

피어난 꽃이여,
너를 예쁘다 함은
보이지 않는 그 손길까지도
예쁘다 하는 것이니
홀로 자만하지 말아라
<자작시-예쁜 꽃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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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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