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온 편지에 당신 필체가 있다면...

베트남에서 온 편지봉투에 자필이 적힌 사연

등록 2004.10.29 11:35수정 2004.10.29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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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베트남에서 온 편지

베트남에서 온 편지 ⓒ 고기복


“이거 많이 본 필첸데.”
“손으로 쓴 것도 아니고 복사한 것 같은데, 지난번 편지에 붙였던 걸 복사했나 봐.”


베트남에서 온 항공우편봉투에 내가 쓴 글씨임을 단숨에 알게 해 주는 악필로 적은 주소를 보며 집사람과 나눈 대화이다.

외국인 이주노동자들 중에 고향에 있는 가족친지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자신이 일하는 회사 주소를 적기보다, 평소 알고 지내던 한국인들의 주소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회사가 해외에서 오는 우편물을 잘 관리해 주지 않아서, 편지를 분실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는 게 한국인 지인들의 주소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핑계지만, 또 다른 이유는 일하던 회사에서 언제 어떻게 그만둘지 모르는 상황에서 좀더 안정적인 주소로 평소 알고 지내는 사람 신세를 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 역시 주소를 묻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그러다 보니 집주소와 우편번호를 묻는 친구들의 질문을 받을 때면 대개 명함을 건네주며, 명함에 나와 있는 영문 주소로 보내면 된다고 일러준다.

그런데 편지를 보낼 때는 문제가 없지만, 편지를 받을 때는 영문으로 쓴 주소가 정확하게 배달되지 않는다며, 받는 사람의 주소와 이름은 꼭 한글로 써야 된다고 답하는 친구들이 간혹 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우편번호만 정확하면 그런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고 답하면서도, 만에 하나라도 소중한 편지를 잃어버릴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는 것보다 확실히 하는 것이 낫다는 데는 의견을 같이 하곤 했다.

그런 친구들은 명함을 받고도, 갖고 온 편지 봉투 위에 직접 주소를 적어 주기를 요구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름대로 신경을 써서 예쁘게 써 보려고 노력하지만, 악필이 달리 악필이 아닌지라 우체국에서 제대로 읽을지 모르겠다고 농담을 하며 편지봉투를 건네주곤 한다.


그런 편지를 받았던 베트남 사람 중 한 명이 지난 8월부터 편지를 보낼 때마다 내가 손으로 쓴 흔적이 역력한 편지를 보내오고 있다. 아마 편지봉투에 적힌 한글주소를 가위로 오려서 복사를 한 다음, 편지를 보낼 때마다 사용하는 것 같다. 재활용치고는 대단히 이색적인 재활용이다. '글자'를 재활용하니 말이다.

해외에서 편지를 보내오는 사람들 중에는 그림을 그리듯 한글을 그려서 보내는 사람도 있지만, 한글을 모르는 외국인의 입장에서 제대로 적힌 것을 복사하여 사용하는 편이 훨씬 쉽고 정확하겠다 싶기도 하다.

해외에서 온 편지 봉투에 적힌 자필 주소를 보며, 묘한 생각이 들었다. 꼭 내가 해외에 있으면서 편지를 보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해외에 있으면서 적어 보낸 편지를 우리 땅에서 받아들고, 나는 지금 행복한 우체부가 되어 편지를 전달할 채비를 한다.

“여보세요?”
“베트남에서 편지 왔어요!”
“아, 그래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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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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