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라일락꽃 그늘 아래 - 5회(1부 : 큐피드의 화살)

- 첫사랑은 아픈 거예요

등록 2004.12.01 13:16수정 2005.01.03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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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태
교무실로 돌아온 나는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풀어헤친 머리카락 같은 먹구름사이로 계속해서 비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마치 샤워기를 비집고 쏟아지는 욕조의 물처럼.

커피를 한잔 다시 타들고 아예 창가로 가서 비구경을 하기로 하였다. 오늘이 6월 24일. 그러고 보니 초희가 사고를 당한 바로 그 날이었다. 안 간다, 안 간다 해도 벌써 10년하고도 한참의 세월이 지나갔다.


"김 선생님, 퇴근 안 하세요?"
같은 국어과 교사인 이 선생이다.
"으응, 먼저 가."
"그럼, 좋은 주말 보내세요"

"좋은 주말?"
"네, 오늘 토요일 아닙니까?"
"아! 참 오늘이 토요일이지. 고마워. 이선생도 좋은 주말 보내. 요즈음 청춘사업은 잘 되고 있는 거지?"

"김 선생님께서 먼저 국수를 주셔야 저도‥‥‥."
"나야 이미 틀렸고‥‥‥."
"틀렸다니요? 삼십대 후반이면 아직도 싱싱한, 아니 중후한 총각?"
"하하, 놀리지 말고 어서 가."
"네, 그럼 먼저 갑니다."

"김 선생, 퇴근 안 해?"
이번에는 동학년의 최 선생님이다.
"예, 나가야지요. 먼저 가십시오."
"그럼 좋은 주말 보내게."

여기저기서 '좋은 주말 보내세요, 좋은 주말 보내세요' 한다. 좋은 주말이라 좋은 주말이라‥‥‥. 학교에 계속 남아 비구경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청승궂은 것 같아 일단을 차를 타고 교문을 빠져 나왔다. 신트리 4거리를 지나 목동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서 라디오를 틀었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언제나 말이 없던 그 사람 사랑의 괴로움을 몰래 감추고 떠난 사람 못 잊어서 울던 그 사람 외로운 병실에서 기타를 쳐주고 위로하며 다정했던 사랑한 사람…….

언젠가 나의 기타 반주에 초희가 불렀던 노래다. 나는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았다. 뒤에 오던 차들이 빵빵거리고 야단이다. 분명 가수 심수봉의 목소리인데, 왜 초희의 목소리처럼 들리는 것일까? 언제 들어도 늘 슬픔이 묻어 나오는 저 노래.


나는 집으로 가려다 핸들을 돌려 서부간선도로로 진입했다. 그리고 그 길로 곧장 달려 서해안고속도로를 탔다. 여전히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진다. 서평택 나들목을 빠져 나와 39번 국도를 탔다.

교통상황을 들을 수 있을까 싶어 고속도로 접어들면서 껐던 라디오를 다시 틀었더니, 이번에는 내가 좋아했던 가수 김창완이 목소리다. 그의 노래 <창문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가 추억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가버린 날들이지만 잊혀지진 않을 거예요. 생각나면 들러봐요. 조그만 길모퉁이 찻집 지금도 흘러나오는 노래는 옛 향기겠지요.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가버린 날들이지만 잊혀지진 않을 거예요.

아산만 방조제에 이르렀다. 비가 내리는 장마철인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안개꽃까지 짙게 피어 앞이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이 길을 지나면 충남이다. 충청도, 온통 그녀의 체취가 묻어있는 땅. 그녀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지금껏 그곳을 벗어나 서울에서 귀양살이하듯 갇혀 지냈는데 결국 이렇게 다시 충청도 땅을 밟게 되는가?

차를 길가에 세우고 내렸다. 우산을 쓰는 듯 마는 듯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방조제에 서서 아산만의 호수인지 바다인지를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가없이 물안개가 피어올라 물색이 온통 회색빛이다.

빗줄기는 아까보다 약간 시들해졌다. '계속 갈까? 아니면 되돌아갈까? 간다면 대전으로 갈까? 천수만으로 갈까?' 내 머릿속도 회색빛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작년, 재작년에도 여기까지 왔다가 되돌아갔었다.

초희의 마지막 말처럼 그녀를 잊어 주는 것이 그녀와 모두를 위한 길이라 확신했다. 내가 여기저기 다니며 그녀의 기억을 더듬는 것은 아물어 가는 상처를 건드는 일이라 생각했다. 또는 평안히 잠들어 있는 그녀를 깨우는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독하게 마음먹고 되돌아서곤 했던 것이다.

갈매기 몇 마리가 힘겨운 날갯짓으로 서해에서 방조제 쪽으로 날아오다가 다시 방향을 바꿔 바다 쪽으로 날아간다. 그런데 그 중 한 마리는 다시 돌아서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다. 우아하게 날갯짓 하는 갈매기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한 마리 학처럼 보였다. 점점 가까이 날아온다. 점점 가까이.

"아니! 저것은‥‥‥."
나는 깜짝 놀라 잡고 있던 우산을 그만 놓치고 말았다.

"저것은 초희, 초희의 모습이 아닌가!"
분명 초희였다.

초희가 천사처럼 흰옷을 입고 내가 있는 쪽으로 물위를 걸어오듯 사뿐사뿐 다가오고 있었다. 초희! 하고 불러보려는 순간, 때마침 불어오는 비바람에 우산을 놓치고 말았다. 우산이 제멋대로 추락하고 있었다. 시선을 잠시 우산에 빼앗긴 사이 그녀는 온데 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너무도 아쉬워

"초희! 초희! 초희!"
연거푸 목 놓아 불러보았으나 역시 그녀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내가 환영에 사로잡혔던 것일까? 환영이라도 좋으니 <이생규장전>의 최 처녀처럼 초희가 다시 짠- 하고 나타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 거야. 아니 아니야 그렇게 생각할 것만은 아니지. 어쩌면 영화 <사랑과 영혼>의 남자 주인공처럼 초희도 지금 이 순간 내 옆에 와있는지도 모르잖아. 정말 그럴지도 몰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 6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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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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