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건지 빠지면 단팥빵에 팥 빠진 거나 진배없어!

[고향의 맛 원형을 찾아서 79]싱건지, 떠먹고 비비고 국 끓여 야참에 고구마까지

등록 2004.12.02 13:22수정 2004.12.02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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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치미가 소화도 잘 된답니다. 조금 수고스럽더라도 풍족한 겨울을 나기 위해 꼭 준비하렵니다.
동치미가 소화도 잘 된답니다. 조금 수고스럽더라도 풍족한 겨울을 나기 위해 꼭 준비하렵니다.김규환

장모님께서 보내주신 김장김치가 익어가고 있다. 몇 해째 김장을 하지 마시라고 말려도 딸 사위 불러 놓고 김장을 하신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싱건지는 생략을 하신다는 거다.


어릴 적 어머니는 행여 큰 추위에 무 뿌리 얼까봐 날짜를 앞당겨 싱건지 동치미를 담갔다. 배추김치, 바개지(섞박지) 따위 김치를 담그기 열흘 전쯤이었다. 그 시절 겨울에 먹을 거라곤 싸레기죽에 김치와 밥뿐이었으니 김장은 한 겨울이 아니라 늦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식량을 비축하는 중요한 행사였다.

김장하던 날은 동네 축제였다. 목삼겹살을 삶아 농주 따로 빚고 소주 대병 갖다 놓으면 온 동네 사람들 몰려와 가닥김치에 싸서 오물오물하는데 "맵다, 매워!"를 연발하면서도 배부르게 잘들 먹었다. 오늘은 우리 집, 내일은 성호네, 글피는 병문이네로 돌아다니며 품앗이를 한다.

무를 깨끗이 씻어서 천일염에 불려 이틀만 두면 됩니다. 유자랑 청각, 생강도 같이 넣고 배도 잊지 않겠습니다.
무를 깨끗이 씻어서 천일염에 불려 이틀만 두면 됩니다. 유자랑 청각, 생강도 같이 넣고 배도 잊지 않겠습니다.김규환

싱건지가 빠지면 단팥빵에 팥소 빠진 거나 진배없다. 국 없는 밥상이라고나 할까. 그래도 싱건지는 식구끼리 해도 되었다. 칼로 대충 수염뿌리와 흙을 털어내고 이틀간 소금에 불렸다가 배 두 개, 쪽파 한 무더기, 유자 한 개, 말린 고추 서너 개를 항아리에 넣고 맑은 물 적당히 붓고 마름으로 둘둘 말아 보온을 하고 날이 추워지길 기다린다.

"싱건지 익었을랑가?"
"벌써라우? 사나흘은 더 지달려야 헐 것인디라우. 글도 한 번 맛을 봐봐야 쓰겄네요."

시래깃국에 물린 탓일까 아버지 채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시큼한 싱건지에 살얼음이 동동 뜨면 소화제 싱건지가 먹고 싶다. 널찍한 그릇 하나 챙겨가서 칼 끝으로 얼음을 푹푹 깨서 뿌리와 속잎을 꺼내고 물을 떠서 후딱 정지로 들어가 깍두기마냥 사각으로 또각또각 썰고 조금은 밥 비벼먹게 채를 썬다. 썰면서 몇 개를 입에 넣고 색다른 맛에 취한다.


이제 국에 반찬을 차리고 가족이 오순도순 앉아 있다.

"아부지! 진지 잡숫쇼."
"오냐."


항아리에 담아두면 숨을 쉬니까 더 맛있겠지요. 맑은 물은 어머니 제사 때 고향마을에서 1말 받아왔답니다.
항아리에 담아두면 숨을 쉬니까 더 맛있겠지요. 맑은 물은 어머니 제사 때 고향마을에서 1말 받아왔답니다.김규환

쇠죽 쑤던 아버지까지 오시길 기다렸다. 식구가 여덟이나 모였으니 한 상으로는 부족해 남녀 상이 구분되었다.

후루룩 후루룩 국을 떠먹기 전에 깔끔한 숟갈로 싱건지 국물에 뿌리나 서걱이는 잎을 기분 좋게 씹는다. "음…. 맛이 들었구만. 올핸 제대로 됐어." 아버지 먼저 뜨신 뒤 숟가락이 일시에 몰린다.

"금순아, 가서 양판 갖고 오니라."
"참기름도 갖고 오끄라우?"
"그려."

고구마 참 먹음직스럽게 생겼죠? 물고구마나 호박고구마는 덜 팍팍하지만 밤고구마는 반드시 싱건지국물이나 신김치가 있어야 합니다.
고구마 참 먹음직스럽게 생겼죠? 물고구마나 호박고구마는 덜 팍팍하지만 밤고구마는 반드시 싱건지국물이나 신김치가 있어야 합니다.김규환

너도나도 양푼을 부탁했다. 큰 그릇이 상에 오르자 좁아서 그릇 놓을 데도 없다. 얇실얇실하게 채 썬 싱건지와 익어가는 김치에 된장국물 조금 넣고 푹푹 비비실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참기름 한 방울 "똑!" 떨어뜨려 휘저어주고 한 잎 몽땅 떠 넣으면 입 안에서 밥알이 녹았다.

게 눈 감추듯 일순간에 저녁식사가 끝나려는가.

"엄마 밥 쬐까 더 없능가?"
"이것 먹어라."
"아니 솥단지에 없냐구라우?"
"그냥 먹어. 엄니는 누룽밥 먹을란다."

속없이 먹어치웠다. 보리밥 누룽지까지 거들었다. 그날 밤 으슥해질 무렵 아궁이에 넣어뒀던 물렁물렁하고 쫀득쫀득한 물고구마를 꺼내 싱건지와 함께 야참을 먹었다. 식은 밥도 말아먹었다.

김장을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이 상에 있습니다. 아이들도 먹이달라는 제비새끼처럼 성가시게 하지만 그게 묘미 아닌가요?
김장을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이 상에 있습니다. 아이들도 먹이달라는 제비새끼처럼 성가시게 하지만 그게 묘미 아닌가요?김규환

설컹설컹 살얼음이 언 싱건지와 동지팥죽이 참 잘 어울립니다.
설컹설컹 살얼음이 언 싱건지와 동지팥죽이 참 잘 어울립니다.김규환

우린 지금도 싱건지 하면 사족을 못 쓴다. 싱건지가 알맞게 익으면 아침에 멸치 몇 개 넣고 싱건지국 끓인다. 돌아가신 큰 형님은 김 다음으로 싱건지국을 좋아했다. 식초 맛이 나 깔끔하고 시원하다. 밖에 둔 반쯤 언 동지팥죽과 함께 먹던 추억, 재 너머 외갓집 가면 솜씨 좋은 외할머니랑, 외숙모께서 담근 배추싱건지 맛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때 동치미는 왜 그리 맛있었을까. 물맛, 맑은 공기도 한몫 거들었고 어머니 솜씨, 너도나도 먹겠다고 바삐 움직인 때문이며 건강한 소리가 어울렸음인가. 밥맛이 없거든 식구 많은 집에 가서 먹어보면 뭔가 모를 맛이 있다.

11월은 가고 벌써 12월이다. 산간지역과 농촌은 대충 1년을 마무리하는 김장축제까지 마쳤다. 중부지방 도시에서도 이번 주에 김장과 동치미를 담글 적절한 시기다. 김장만 넉넉히 해 놓아도 올 겨울 잘 날 수 있으련만…. 우리 집은 이번 주말 동치미를 담글 계획이다. 꼭 속노란 배추도 몇 포기 넣어야지.

땅 팔 일이 걱정이지만 또 한 번의 뒤늦은 김장, 싱건지에 이번 주말을 요긴하게 써야겠다. 아직 우리 집 김장은 끝나지 않았다.
용도는 다양합니다. 국물과 무, 이파리 건져먹고, 국끓이고 비비고 무쳐먹고 밥 말아 먹고 고구마나 호박죽이랑 같이 먹어도 그만입니다.
용도는 다양합니다. 국물과 무, 이파리 건져먹고, 국끓이고 비비고 무쳐먹고 밥 말아 먹고 고구마나 호박죽이랑 같이 먹어도 그만입니다.김규환

눈밭에 갖힌 항아리 속에서 김장김치가 알맞게 익으면 좋겠네요. 올 한 해도 마무리 잘 하시고 따뜻한 겨울 되기기 바랍니다.
눈밭에 갖힌 항아리 속에서 김장김치가 알맞게 익으면 좋겠네요. 올 한 해도 마무리 잘 하시고 따뜻한 겨울 되기기 바랍니다.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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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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