숟가락은 없어도 '조새'는 있다

태안반도의 끝머리 개목마을1

등록 2004.12.03 23:53수정 2004.12.04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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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여섯 평 되는 비닐하우스 안에 세 명의 아낙들이 굴을 수북하게 쌓아놓고 열심히 '조새'로 까고 있다. 바닷가로 쭉 둘러서 비닐하우스가 눈대중으로 열댓 개는 되어 보인다. 아침 숟가락을 놓자마자 이곳 주민들, 특히 여성들이 시작한 조새질은 날이 저물 때까지 계속된다.


태안반도를 타고 들어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곳에 이르면 작은 해수욕장을 왼쪽에 끼고 바다가 끝이 없이 펼쳐지고, 오른쪽에는 바다 건너편에는 한반도 최대의 모래사구 신두리가 보인다. 바로 이곳이 충남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 개목마을이다. 1960년대 간척되지 않았을 때는 영락없이 '개미의 목'(개미의 蟻, 목항 項)처럼 반도 육지와 가느다랗게 연결되어 있다.

개목리는 '큰 마을'을 기준으로 저쪽에 형성된 '작은 마을' 월촌(越村), '재너머'(赤峴) 등 세 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130여 가구에 40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1960년대 가장 많은 사람이 살았던 때가 680여명에 100여 가구였던 점을 고려한다면 다른 농어촌에 비해서 인구가 거의 감소하지 않았으며, 가구는 오히려 더 늘어났다.

a 물이 빠지자 개목리 어민들은 부산해졌다.

물이 빠지자 개목리 어민들은 부산해졌다. ⓒ 김준


a 물이 빠지면서 드러나기 시작한 굴더미

물이 빠지면서 드러나기 시작한 굴더미 ⓒ 김준


보리밥에 능정게 빨아 먹으며 살았어유

개목리는 큰 마을과 작은 마을을 연결한 원(제방)을 막기 전 1960년대까지는 농사지을 땅이 거의 없었다. 당시에는 밭에 배추, 고구마, 콩, 땅콩, 밀, 마늘, 고추 등을 심어 자가소비를 했다. 그리고 일부(땅콩, 고추, 고구마, 마늘 등) 농산물을 팔기 위해서는 멀리 농작선(농사를 지을 때 이용한 배)을 타고 1시간, 그리고 2시간 반을 걸어서 태안읍장까지 나가야 했다. 그나마 배를 이용한 경우는 다행이지만 걸어서 가야 할 경우에는 다섯 시간을 걸어야 했다. 개목리까지 버스가 다니기 시작한 것도 20여 년 전이었다.

당시 100여 세대 중 20여 세대가 논을 갖지 못했고, 이들은 5~6월 보리가 나오기 전에는 심한 '보릿고개'를 겪어야 했다. 이 시기에 미군정에 의해서 '평화를 위한 식량'이라는 이름으로 제공된 것이 '밀가루'였다.


이 밀가루는 큰 마을과 작은 마을을 연결하는 간척공사에 동원된 주민들에게 일당으로 3.7킬로그램씩 제공되었다. 이렇게 해서 1960년대 말 공사가 완료되었고 1970년대에는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전형적인 어촌마을에서 반농업반어업의 마을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이 무렵 투석식 굴양식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개목리는 새로운 농업과 어업자원이 형성되면서 다른 농어촌에 비해서 인구유출을 억제했던 것이다.

이 시기에 개목리의 여성들은 농한기를 이용해 여름에는 삼베길쌈을, 겨울에는 명주길쌈을 해 옷을 지어 입었고, 갯벌에서 능정게 등을 잡아 반찬거리로 삼았다. 신두리에서 18세에 시집와 60여 년을 개목리에서 살고 있는 최씨 할머니(88, 아들이 횟집 경영)의 당시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막아지기 전에 여그서 낙지도 잡고, 게 잡아먹고 능정게. 그런 것 잡아먹고 그렇게 살았제. 겨울에는 명 길쌈, 여름에는 삼베 길쌈, 보리방아 찧어서 밥해먹고, 떨어지면 옷 해 입고. 옛날은 산 것은 살아서 산 것이여 지금처롬 좋은 것 먹고 실컷 쓰고. 옛날에는 보리밥에 능정게 빨아먹고 살았어요. 간장에 담근 것 빨아먹고. 입금(지금) 세월 가는 것이 너무 아까움지. 더럽게 고생해서 살다가 시방 살만해서 먹을 것 실컷 먹고 옛날에 못 먹던 것 먹어 가면. 세월이 너무 빨리 가는 것 같잖여."

최근 충청도 일대에 투기 붐을 타고 이곳도 평당 15만 원 정도에 거래되던 땅들이 많게는 100만 원 적게는 50만 원까지 거래되고 있다. 대부분 서울 사람들과 거래가 이루어지며 급기야 규제지역으로 제한조치를 받고 있다. 얼마 전 이곳에서 땅을 매매를 둘러싸고 외부의 땅 주인이 사기혐의로 구속되기도 하였다.

a 신두리에서 시집와 평생 굴을 까며 살아온 최씨 할머니

신두리에서 시집와 평생 굴을 까며 살아온 최씨 할머니 ⓒ 김준


a 서울에 거주하는 개목이 고향인 여성은 주말에 이곳에 들려 자연산 굴을 까 가져갔다.

서울에 거주하는 개목이 고향인 여성은 주말에 이곳에 들려 자연산 굴을 까 가져갔다. ⓒ 김준


a 바쁘면 가족이 동원된다.

바쁘면 가족이 동원된다. ⓒ 김준


a 고창에서 시집와 횟집을 운영하며 손님들에게 낼 굴을 까고 있다.

고창에서 시집와 횟집을 운영하며 손님들에게 낼 굴을 까고 있다. ⓒ 김준


숟가락은 없어도 '조새'는 있다

개목리 어민들의 집에는 숟가락은 없어도 '조새'는 너댓개씩 있다. 아마도 이곳 여성어민들은 잠잘 때만 제외하고 종일 조새를 끼고 산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조새의 모양새만 보아도 몇 년 되었는지, 얼마나 돈을 벌어줬는지 맞춘다.

조새는 손잡이 아래쪽에 굴의 방을 내리쳐 굴의 껍질을 해체하는 방아쇠와 그 위쪽에 굴의 알맹이를 따내는 갈고리, 손잡이인 몽둥이로 이루어져 있다. 지역에 따라 이름이 다양하지만 크게 경남지역과 여수, 순천, 고흥의 갯마을 어민들은 '쪼시게'(경남)나 '조시게'(여수, 순천, 고흥)라고 부르며, 장흥, 완도, 무안, 함평, 신안, 영광, 전북, 충남 지역에서는 '조새'라고 부르며, 인천에서는 '죄'라고 부른다.

모양새도 갯벌의 환경에 따라 방아쇠 날이 한쪽만 있는 경우, 양쪽에 있는 경우가 있으며, 갈고리의 형태도 다양하다. 몽둥이도 멋스럽게 멋을 낸 놈부터 투박스럽게 손잡이 역할만 하는 녀석까지 여러 형태이다.

a 조새가족 삼총사(가운데 2년, 오른쪽 1년, 왼쪽 최근 사용)

조새가족 삼총사(가운데 2년, 오른쪽 1년, 왼쪽 최근 사용) ⓒ 김준


굴을 한참 까는 경우에는 가족들이 모두 동원되며, 굴양식을 하지 않는 주민들도 동원된다. 이곳에서 조새로 한철에 벌어들이는 돈이 많이 하는 집은 3천만 원에 이른다. 굴을 많이 까는 집은 하루에 25~30킬로그램을 깐다. 일부 사람을 사서 작업을 하는 주민들은 100킬로그램까지 깐다. 100킬로그램을 까면 6천원을 받는 데 깐 사람이 2천원, 주인이 4천원으로 나눈다.

이곳 여성들은 대부분 시집와서 처음으로 조새를 잡지만 한 철만 지나고 나면 모두 굴까는 전문가가 된다. 매일 조새를 쥐고 작업을 하기 때문에 조새 손잡이에 엄지손가락 부분이 닳아서 움푹 파이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하루에 현금으로 버는 돈이 적게는 10만원에서 몇 십만 원에 이른다.

낫 들고 바다로 간 이유

굴을 까는 일은 직접 양식장에서 작업을 하지 않고 굴이 매달린 줄을 낫으로 베어와 물이 적게 빠지는 조금 때(음력 8, 23을 전후한 2-3일)에도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얕은 곳에 보관해 둔다. 물이 많이 빠지는 사리 때는 굴을 까는 일보다 양식장에서 굴을 따오는 일(베어오는 일)이 더 중요하다.

a 바다에서 낫을 이용해 굴을 베고 있는 개목리 이장 문용배씨(54)

바다에서 낫을 이용해 굴을 베고 있는 개목리 이장 문용배씨(54) ⓒ 김준


a 굴을 운반하는 경운기

굴을 운반하는 경운기 ⓒ 김준


물이 빠지면 주민들은 가슴까지 올라오는 긴 장화를 싣고 경운기에 낫, 그리고 큰 함지박을 싣고 양식장으로 향한다. 수심이 얕은 곳은 갯벌이 쌓여 굴양식이 어려워 점점 깊은 곳으로 나가다 보니, 최근에는 채취용 무동력 배를 타고 양식장 사이를 누비며 양식줄을 베어 내고 있다. 혹은 물을 헤치고 들어가 베어낸 굴들을 물위에 띄운 함지박에 담아서 경운기로 옮겨 싣는다.

개목리의 굴 양식장은 물이 빠지면 완전히 양식장이 드러나는 곳, 일부가 물에 잠기는 곳, 간만의 차이와 관계없이 언제나 물에 잠겨 있는 곳 등 세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생산성이 가장 좋은 곳은 언제나 물에 잠긴 부류식 양식장이며, 그 다음은 물이 빠졌을 때 반쯤 잠기는 지주식이다.

a 개목마을의 굴

개목마을의 굴 ⓒ 김준


이곳 굴 수확은 줄 채 낫으로 베어 육지와 가까운 갯벌에 쌓아둔다. 바닷물에 씻겨가지 않도록 그물로 잘 싸서 보관해둔다. 물이 많이 빠지지 않아 양식장에서 굴을 가져오지 못하는 때는 가까운 곳에 보관한 굴을 비닐하우스로 이동해 굴을 깐다. 따라서 물때, 날씨 등에 관계없이 굴까는 작업을 계속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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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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