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배기보다 장맛이라고?

[고향의 맛 원형을 찾아서 82]장맛, 솜씨 그리고 그릇과 솥

등록 2004.12.27 18:38수정 2004.12.28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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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은 양은냄비에 끓여야 맛있다.
라면은 양은냄비에 끓여야 맛있다.김규환
양은 냄비 라면이 맛있어


'뚝배기보다 장맛'이라고 한다. 겉모양은 보잘것없지만 속이 꽉 차 훨씬 뛰어남을 이르는 말이지만 곧이곧대로 이야기 하자면 '화려한 그릇이나 장식보다 우리 음식의 기초인 장맛이 우위에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이젠 끓이는 솜씨, 담는 그릇, 장맛 이 세 가지로 우열을 가리기보다 요리하는 솥과 내놓는 그릇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아보려 한다.

즐겨먹는 라면은 요즘 다시 우리 곁으로 찾아온 노란 양은냄비에 끓여야 맛있다. 못 살던 때마다 다시 등장하는 동그란 손잡이 달린 양은냄비는 물을 붓자마자 달달달 끓는다. 순식간이다. 어렸을 적 먹었던 라면이 대개 그렇다. 면발을 넣고 대파 하나 찾아 자르는 짧은 시간 동안 발발 끓는다.

재료를 넣어도 금방 다시 끓어주니 연탄불이든, 석유곤로든 양재기 하나면 참말로 맛난 라면이 야들야들 잘도 익었다. 라면이 양은 냄비가 맛있는 까닭은 열이 일찍 전달되어 꼬들꼬들한 맛을 앗아가지 않아서다. 퍼지기 전에 먹어치우면 그만이다. 솥 가격도 싸니 들판에서도 불을 피워 끓였다가 색깔이 변하면 지푸라기 한줌 뭉쳐 모래로 닦아도 아깝지 않다.

여기에 양은주전자에 담기면 더 맛있던 것이 있다. 막걸리다. 소시적 이야기하다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아버지 심부름 가서 막걸리를 홀짝홀짝 들이켜 해롱대다가 냇가 물을 채워왔던 한 되짜리 주전자. 막걸리가 맛있는 건 대개 스테인리스 주전자나 그릇은 쇠 맛이 나는데 반해 양은은 미미하게 느끼므로 일면 설득력이 있다.

막걸리 주전자도 양은이 맛이 좋은 건 추억 때문일 게다.
막걸리 주전자도 양은이 맛이 좋은 건 추억 때문일 게다.김규환
진한 국물이 그립거든 뚝배기가 좋지

설렁탕, 된장찌개, 갈비탕, 순두부 찌개는 보글보글 끓는 뚝배기가 맛있다. 옹기(甕器) 질그릇으로도 불리는 뚝배기는 진하다. 처음에는 멀건 국물이었다가 한 번 보글보글 끓이다보면 국물이 졸아들어 걸쭉해진다. 뚝배기가 최고인 것은 뼈나 살코기에 있는 진한 육수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우러나게 해서 먹는 동안 고루 섞이게 하는 매력에서 찾는다.


그릇 하나에도 달라지는 게 우리 음식 맛이다. 특히나 국물을 중요시 하는 음식 습관에 길들여진 우리는 더 하다. 그런데 가스안전공사에서는 우리 전통과 맛을 자랑하는 뚝배기를 쓰지 말라고 한다. 한번 데우려면 가스비가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란다.

에너지를 절약한다고 하니 일면 타당성이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뜨끈한 국물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맞지 않다. 설득력이 없다. 파르르 끓기는 하지만 불에서 냄비를 꺼내자마자 식어가기 시작하여 한두 술 떠먹고 나면 다 식어빠져 음식 맛이 사라져서 다시 데워야 하는 이중삼중의 불편함을 겪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소형 가스레인지를 옆에 두고 지속적으로 끓여주노라면 오히려 더 많은 열량 손실을 초래한다.


반대로 뚝배기는 한 번 끓이면 오랜 동안 열을 머금고 있어서 여러 사람이 함께 먹을 때도 잘 식지 않아 좋다. 그 뿐인가. 흥건하던 국물도 먹기 좋은 농도로 졸아들어 걸쭉한 맛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겐 안성맞춤이다.

따끈한 국물이 생각나는 계절엔 뚝배기 설렁탕 한 그릇이 딱이다.
따끈한 국물이 생각나는 계절엔 뚝배기 설렁탕 한 그릇이 딱이다.김규환
질그릇, 뚝배기, 항아리 옹기는 우리 음식의 역사야!

사람들은 흔히 집안 살림규모와 솜씨를 이야기 할 때 장독대를 들먹인다. 항아리, 옹기, 질그릇이 얼마나 많이, 어떤 쓰임새에 따라 올려져 있는가가 살림의 잣대가 된다. 같은 장단지에도 햇간장, 작년 것, 이태 혹은 삼년 묵은 간장단지가 있다. 된장단지에는 봄, 가을 두 철과 해마다 담근 된장이 따로따로 나눠 담겨 있다. 이토록 지혜와 정성을 쏟아부었기에 우린 단지의 수효를 헤아려 식구 수를 짐작하고, 상에 차려졌을 때 맛을 미리 가늠하기도 한다.

장독대에 차려진 그릇이야말로 숨쉬는 그릇이다. 안팎이 통하는 소우주(小宇宙)다. 질박하지만 둥그런 모양은 고조선 시대에 시작하여 고구려 때 자리를 잡고 현대로 이어지는 우리 역사다. 중국의 역사왜곡 '동북공정'에 맞설 유일한 무기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포근해지고 손으로 버무린 어머니를 다시 생각나게 하고 잠시 잊고 있던 시골집을 그립게 하고 조르기도 하는 풍경이다. 마음의 안식처다.

웬만한 온도에도 까딱없이 바깥 변화에 둔감하게 반응하면서 내부에선 발효가 진행된다. 더울 땐 더운 대로 추울 땐 추운 대로 잘 적응하여 외부 열을 차단하고 내부 음식을 보존한다. 습할 땐 습기를 머금어버리기만 한다. 건조하면 안에 있던 내용물로 바깥 공기 유입을 막는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항아리, 옹기만 같아라'는 법칙이 적용된다. 이토록 보존성이 뛰어나다.

우리네 전통 그릇은 윗부분부터 다르다. 위로 넓게 펴졌다기보다 가운데가 제일 배가 부르고 위로 올라오면서 차츰 줄어든다. 투박하기 이를 데 없다. 질박하다. 볼품없어 보이는 그릇과 솥은 수천 년 내려온 과학이다. 떠먹기나 설거지하기엔 조금 불편하다. 깨지기 쉽고 무겁다는 단점이 있다.

이런 악조건을 수습하고서 보면 전혀 새롭지 않은 나름의 오묘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뚝배기나 질그릇이라면 쌀뜨물 한 바가지나 행주 한 장으로 설거지가 가능하다. 그냥 문지르면 말끔해지니 환경에 치명적인 세제를 줄일 수 있다. 온도조절 능력이 탁월해 음식이 쉬 변치 않는다는 점에 관심을 기울이면 다른 그릇 쓰기 아깝다. 깨지지 않는 한 오래될수록 진가를 발휘하는 건 덤이다.

앞으로 내가 살 집엔 항아리를 대체 몇개나 들여놓아야 부자 소리 들을까? 그것만 쳐다봐도 밥맛이 절로나고 배가 부를 텐데...
앞으로 내가 살 집엔 항아리를 대체 몇개나 들여놓아야 부자 소리 들을까? 그것만 쳐다봐도 밥맛이 절로나고 배가 부를 텐데...김규환
그릇과 솥을 알면 음식이 보인다고요?

음식을 할 줄 아는 사람은 두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첫째는 원재료에 대한 특성 파악이다. 둘째는 그릇이나 솥의 재질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원재료가 잘 물러지는가, 물기가 얼마나 배어있는가, 쪼글쪼글해지려면 얼마 만큼의 시간이 소요되는가를 알고, 소금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어떤 그릇에 담아내느냐에 따라 먹음직스러워 입맛을 당기기도 하고 앗아가기도 한다. 굳이 요란하게 장식할 이유까지 없이 오목하고 움푹 패기도 하며 널찍하고 반반한 걸 고르는 건 요리의 기본이다. 솥도 그릇이다. 솥을 알면 국, 찌개, 탕, 찜, 조림, 전골, 볶음, 전, 온반을 이해한다. 국물 양을 조절하는 능력은 솥의 생김새와 재질에서 나온다.

가령 조림이나 찌개를 한 번 끓여보자. 대개 센 불로 했다가 불을 줄이면 물이 줄어듦에 따라 바짝 타는 기운, 즉 원재료 내부에 있는 액체를 서서히 끌어내 마지막 물기를 소진하고서야 제대로 된 맛이 나는데 비해 코팅된 그릇은 외부와 내부 물기가 따로 노는 원리에 따라 물기는 줄어들지 않고 원재료인 무나 감자 따위가 물러터지기만 하는 것이다.

두들겨 만든 방짜에 담긴 전주비빔밥 재료. 보기만해도 침이 꿀꺽꿀꺽
두들겨 만든 방짜에 담긴 전주비빔밥 재료. 보기만해도 침이 꿀꺽꿀꺽김규환
진짜 방짜, 진짜배기 살려야지

주석과 황동을 혼합해 두들기기를 반복한 방짜로 만든 유기 놋그릇은 독이든 음식을 알아보는 리트머스다. 농약이 얼마나 있는지와 중금속이나 먹어서는 안 될 성분이 얼마나 들어있는지 알아낸다. 잘 닦인 놋그릇에 음식을 담으면 반짝반짝 멀쩡하던 그릇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버려 사람 눈을 의심케 하니 현대사회와 같은 오염된 먹을거리가 판을 치는 세상일수록 그 가치가 더 높다.

보온밥통 하나 없던 시절 출타한 아버지를 위해 어릴 적 어머니는 가마솥에서 밥을 퍼서 복개(覆蓋)를 덮고 이불속에 파묻어 놓았다. 아버지가 대여섯 시간 지난 뒤 돌아오시자 뚜껑을 열면 김이 모락모락 났다. 그렇게 뜨끈한 밥을 먹었는데 지금은 전자제품의 이로움은 있지만 웬만한 고가의 솥이 아니고서야 김이 빠지고 꾸득꾸득 말라비틀어져 원래 밥맛을 잃기 일쑤다.

보름이 멀다하고 잿물 하나로 까맣던 그릇과 솥을 뻑뻑 문질러 설거지를 했던 그 시절의 그릇이 자꾸 생각나는 건 왜일까. 어머니의 수고로움은 뒤로하고 그 때 밥맛을 잊을 수 없음이다. 스테인리스 그릇에 길들여지고 점령당한 우리네 식탁을 매번 접하고서 이런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몇 년 전 아내와 약속을 했다. 돈 좀 생기면 방짜 놋그릇 몇 벌 사자고 했다. 몇 번이나 벼르고 별렀지만 아직 손아귀에 넣지 못했던 이유는 유기(鍮器)라고 다 같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난 이후다. 주물로 제작하고 겉만 번지르르하게 감쪽같이 만들어내는 가짜 상품엔 중금속 덩어리라고 하니 차일피일 미뤄 왔다. 이제 용기를 내서 방방곡곡 진짜배기를 찾아 나서야겠다.

7, 80년대 보글보글 냄비의 대명사. 이 솥이 나온 뒤로 음식 맛이 확 변했다.
7, 80년대 보글보글 냄비의 대명사. 이 솥이 나온 뒤로 음식 맛이 확 변했다.김규환
간절한 가마솥 누룽지 맛

80년대 초중반까지 우리를 먹여 살렸던 가마솥. 왜 이리 다른 건가. 신당동 중앙시장 그릇가게를 지나칠 때마다 나는 가마솥 구경하느라 승용차 출발 시점을 놓치는 일이 잦다. 돼지기름을 발라 놓아 반들거렸고 예닐곱에서 열두어 명까지 한 솥에 밥하고 국을 끓였던 대단한 존재다.

솥을 걸기 쉽게 사방에 걸쇠를 삐죽 나오게 했을 뿐 여느 솥과 다른 바 없이 밑동이 둥그런 솥이다. 무쇠 솥이다. 가마솥에 밥을 하면 보리밥이든 쌀밥, 기타 잡곡밥이든 윤기 자르르하게 푹 퍼지게도 하고 뜸 들이는 불을 조금만 더 때주면 바닥에 맛난 깜밥이나 누룽지를 노릇노릇하게 눌려놓는다.

밥알이 밖으로 뛰쳐나갈 듯 바지런히 잘 퍼지고 밥맛이 뛰어난 건 솥단지 구조 때문이다. 네모지게 만들어도 그만이고 더 널찍하게 하거나 더 움푹 패게 또는 더 깊숙하게 할 수도 있었는데 언제나 그 모양에 그 형태로 우묵해진다.

고루 열을 받도록 바닥은 넓지만 위로 올라올수록 좁아드는 건 일단 받은 열을 잘 소화했다가 방안에서 느끼는 대류현상이 진행되도록 둥그렇게 시공한 지혜다. 돌고 돌아 고루 익히는데 두께마저 세상 어떤 솥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몇 겹에 해당하니 밖으로 새어 나올 뜨거운 공기가 없고 뚜껑마저 몇 근이니 김이 밖으로 삐쳐나갈 엄두를 못내는 것이다.

압력밥솥이든 어떤 전기밥솥이든 이를 따를까. 백철 솥이 가능하겠는가.

플라스틱 그릇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난다. 본드 냄새 비슷하다. 제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담아도 그렇다. 플라스틱만 없어도 좀 살려만...
플라스틱 그릇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난다. 본드 냄새 비슷하다. 제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담아도 그렇다. 플라스틱만 없어도 좀 살려만...김규환
이런 살림 한 번 해보고 싶어요

고무와 플라스틱도 우리 것이 아니며 유리도 우리와 친근하지 않다. 양철이나 코팅된 솥과 프라이팬이 부지기수로 나와 있다. 혼수 준비할 때 그릇 고르느라 며칠을 허비하지만 실상 그릇다운 그릇 고르는 일 없고 기껏 골라야 신혼 한때 장식품에 불과한 물건이 허다하다. 이제 그 쓰임새나 용도 그리고 두고두고 쓸 그릇과 솥단지를 골라야한다.

뚝배기 아류마저도 무척 많다. 실상 불에 올리거나 뜨거운 국물을 퍼 담으면 톡 튀어서 아무 쓸모가 없는 일을 겪곤 한다. 건강과 맛, 그리고 생활의 지혜를 찾는 법 주위에 널려 있다. 조금 규모가 있는 가까운 재래시장에 가면 모든 걸 구경하고 싼 값에 장만할 수 있다. 발품 파는 정성 하나면 밥상이 달라진다.

내 꿈은 이렇다. 장독대를 만들고 놋그릇에 밥 먹고 재로 설거지 하는 것이다. 또한 가마솥에 누룽지 팔팔 끓여 구수한 고향의 맛을 찾고 싶다. 마지막 한술을 뜰 때까지 식지 않은 맛있는 밥 한 그릇 먹어보는 게 소원이다.
가마솥. 불 때는 재미가 쏠쏠할 때다. 누룽지 한 그릇만 먹어도 웬만한 탕 한 그릇 못지 않다. 밥도 참 함치르르 맛있다.
가마솥. 불 때는 재미가 쏠쏠할 때다. 누룽지 한 그릇만 먹어도 웬만한 탕 한 그릇 못지 않다. 밥도 참 함치르르 맛있다.김규환

백철솥에 담긴 숭늉. 이건 억지로 태워야 맛이 나던가.
백철솥에 담긴 숭늉. 이건 억지로 태워야 맛이 나던가.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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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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