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독대 옆에 샘을 팠다. 그것도 따스한 햇살이 내리 쬐는 겨울에. 농한기에는 집안 일이 그렇게 많았던 시절이다.김규환
“거시가 성균이집에 핑 가서 막걸리 한말 가져 오니라.”
“지가라우? 겁나게 먼디라우.”
“지게 지고 가면 될 것 아니여.”
구경 온 사람들 수가 늘어가자 막걸리 한두 주전자 가지고는 누구 코에 붙일지 염려스러웠는지 큰아버지는 여덟 살 때부터 지게지고 나무하러 다니는 나를 보고 믿음이 갔던 건지, 하는 일 없이 마음만 바빠서인지 한말짜리 둥그런 한 통을 내게 가져오라신다.
집으로 달려가 작대기를 챙겨 지게를 지고 주막으로 갔다. 작대기로 받쳐 세운 채 막걸리를 져달라고 했다. 통 손잡이에 띠꾸리(짐 실을 때 앞뒤로 고정하기 위해 매달려 있는 줄)를 한번 넣고 둥근 막걸리통을 두어 번 둘러 단단히 묶었다.
“갈 수 있겄냐?”
“하믄이라우.”
“뽈딱 일어나봐라.”
“째까만 밀어 주싯쇼.”
“그려 민다잉, 한나 둘 서이.”
“끙.”
무게는 별 것 아니었지만 출렁거리는 술통인지라 뒤뚱뒤뚱 취권(醉拳)을 하듯 흔들린다. 몸을 간신히 추슬렀다. 똑바로 서서 한번 짐을 추어주고 지게를 바짝 붙이고 나서 뒤뚱뒤뚱 걸었다. 다시 멈춰 서서 움직이지 않게 띠꾸리 줄을 오른손에 단단히 쥐었다.
약간 오르막인 골목을 걷자 다리가 팍팍했다. 막걸리가 새어나와 목 줄기를 타고 흐른다. 내 몸에선 시큼한 술 냄새가 풍긴다. 사타구니까지 내려간 모양이다.
“엄니, 엄니. 얼른 술통개 받으싯쇼.”
불끈 들어서 내리자 잔뜩 긴장한 탓인지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다. 네모난 통이었으면 힘들지 않았을 게다. 그 때까지 세발 자동차가 비포장도로를 사나흘 간격으로 배달했던 시골 막걸리는 무슨 영문인지 언제나 동그란 통에 담겨 있으니 지게엔 찰싹 달라붙지 않아 옮기려면 옹색하기 그지없었다.
구경 온 어른들까지 열댓 명이나 되었다. 담뱃대를 만지작거리는 사람, 필터 없는 ‘새마을’을 뻐끔뻐끔 빨아대는 분, 뒷짐 지고 골똘히 들여다보는 사람, 이들은 파기 쉽지 않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을 늘어놓으며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석 자(尺 1자는 30.3cm)가웃 파들어 갈 무렵엔 말목 다섯 개를 비스듬하게 움집 뼈대 세우듯 가운데로 모아 웬만한 무게에 끄떡없이 흔들리지 않게 단단히 고정한다.
이제부터는 한 사람씩 안으로 들어가서 작업한 것을 바로 담아서 두레박처럼 끈에 묶어 놓으면 위에서 줄을 당겨 꺼내서 버려야 한다. 둘이 들어갔다가는 연장을 맘대로 쓸 수 없으니 차선책으로 선택한 방법이다.
“자, 들어 올릿쇼.”
“알았응께 저짝으로 비켜있으라구.”
헬멧이 없기도 하거니와 안전모에 해당하는 어떤 장치나 기구도 없었다. 그냥 수건 하나 두르고 땀이나 닦는 인부들은 돌덩이가 떨어지면 맞는 게 다반사고 때론 파 들어간 한쪽이 무너져 머리통보다 큰 바위가 떨어져 직격으로 맞으면 뇌를 다치기도 하고 흙구덩이가 허물어지면 안에 갇혀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나오는 경우 허다했다. 뼈가 으스러져버리는 위험한 순간이 상존했으니 깊어질수록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애초에 그런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작업환경이 그러하니 궂은 일 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던 건 부인할 수 없다. 몇 시간째 '바케스'가 올려지고 물과 모래, 자갈이 섞여 나왔다. 가마니를 묶어 달래서 내려주자 어른들 혼자서 들기 쉽지 않은 돌덩이가 올라왔다.
조금 더 지나자 부스러지는 돌처럼 썩어가는 바위가 나오는가 보다. 정과 망치가 들어갔다. “떵떵” “탁탁탁탁” 돌을 잘게 부숴 쪼갠다.
“어이~ 교대허자고.”
“물이나 한바가지 주싯쇼. 글도 허던 사람이 마저 해놓고 나가야제.”
“나오란 말이시.”
“심란해라우.”
“글면 마저허소.”
두레박 양동이에 따라 내려간 물 한 바가지를 맛나게 드신 박샌 아저씨는 쉬지 않고 일하고 나서 위로 올라왔다. 안쪽엔 벌써 일부 그늘이 져 있다. 갈치조림과 고등어를 구워 점심을 먹고 나서도 일이 지속됐다. 이제 공정의 1할이나 됐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