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길 물속보다 힘든 게 샘 파기여!”

[70년대 사람과 삶 1]개인 우물 작두샘(펌프샘) 파던 첫날

등록 2005.01.04 00:36수정 2005.01.04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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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물 찾으면 지금도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다.
샘물 찾으면 지금도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다.김규환
상수도 보급률 90% 대에 이른 지금 샘 파는 걸 본 적이 있는가. 단독주택인 경우 자가 급수 시설을 위해 업체에 맡기면 시추와 시공에 몇 백만원 주면 모터까지 완벽하게 설치하여 물을 콸콸 쏟아낸다. 더구나 요새는 수도가 전국에 걸쳐 각 가정에 보급되고 있다.


도시화와 생활환경의 변화로 주거형태가 초가집에서 기와지붕으로, 기와지붕에서 개량된 슬레이트 단독주택으로 바뀌더니 이젠 단독주택을 누르고 아파트 가구에 거주하는 인구가 더 많다. 가마솥 밥 한번 먹으려면 돈깨나 써야 한다.

이에 70년대 식생활과 일상을 돌아봄으로써 우리가 현재 어디까지 와있는지 알아보려 한다. 또 예전의 삶도 단지 고달프지만 않고 인정미가 풀풀 넘쳤음을 잔잔하게 그려보고자 한다.

물을 길어 밥하고 쇠죽 쑤던 그 시절이 먼 옛날이 아니지만 우리가 잊고 지내온 30~40년의 세월이 어찌 이리 멀단 말인가. 이제 그곳은 노인들만 외로이 지키고 있지만 언젠가 다시 찾아갈 고향을 위해 삶의 복원 차원에서 글과 확보된 사진으로나마 그 추억의 한자리를 비집고 들어가 본다.

여기에 등장하는 나는 실제 필자다. 70년대 중후반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관찰하고 어른들과 함께 일했던 어렴풋한 기억을 하나하나 떠올려 그릴 참이다. 마침 세상에서 알아주는 골짜기에서 살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뭉클하게 우리를 어린 때로 안내하기만 해도 족하리라. 완벽한 사투리 구사는 1~2년 뒤에나 다시 시도해볼 일이다.


요즘엔 상수도 없는 곳이 거의 없이 호강을 하며 살고 있다. 물맛은 그 다음 일이다. 수도 꼭지만 안에서 틀면 콸콸 쏟아져 나온다.
요즘엔 상수도 없는 곳이 거의 없이 호강을 하며 살고 있다. 물맛은 그 다음 일이다. 수도 꼭지만 안에서 틀면 콸콸 쏟아져 나온다.김규환
큰 집 누나들은 혼기가 찼다. 위로 셋은 이미 혼인을 했고 셋째와 사촌형 그리고 손 위 누나와 할머니가 물을 길어 밥을 해먹기는 힘에 겹다. 더군다나 집안 살림에 별 낙이 없었던 큰아버지가 물지게 한번 지고 다니는 걸 본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던 어느 해였다. 할머니가 어둑어둑한 눈길에 마을 샘에서 물동이를 이고 오느라 다리를 삐끗했던지 아버지가 더 서둘러 우물을 파자고 했다. 작두샘(펌프샘) 하나라도 있어야지, 자칫 조카딸들과 당신의 어머니가 크게 다치면 온 집안사람들이 생고생을 하기에 직접 나선 것이다. 어머니도 나락 몇 가마 파는데 동의를 하셨고 큰아버지도 흔쾌히 승낙을 하셨다.

요맘때쯤이면 얼추 물이 빠질 때가 되었으니 집안 마당에 우물파기에 적당한 시기다. 계절별로 봄과 가을에도 문제될 게 없으나 그 때는 농사일로 바쁘기에 조금 형편이 풀린 사람들 집에선 겨울 한철 인부를 얻어 살림하는 사람들 일손을 덜기 위해 물부터 확보하고자 한다.


70년대 중반쯤 내 고향마을에서도 몇몇 집이 개인 우물을 팠다. 상수도라는 건 한참 뒤였다. 마당 제일 끝이자 물 빠짐이 좋은 곳을 골라 사나흘에서 길게는 열흘 남짓까지 허비하는 대공사에 들어간다. 기계화가 되기 전까지는 사람 손으로 일일이 파고 돌을 쪼개서 모아둔 모래와 흙 돌멩이를 걷어 올렸다.

남들 집보다 이삼년 뒤늦게 시작한 큰집 우물 파기는 실로 고된 작업이다. 새벽녘부터 일이 시작되었다.

“박샌, 이샌은 왜 안 와쓸까?”
“밥 묵고 올테제라우.”
“엄니, 그건 그렇고 막걸리나 한잔 주싯쇼.”
“미리 받아놓았응께 물길이나 잘 잡드라고.”


여든 넘은 할머니께선 김장김치에 막걸리를 대접에 따라 주신다. 그 사이 지관노릇을 했던 아버지는 젓가락처럼 긴 철사 줄 두개를 반듯하게 들고 마당 한켠을 이리저리 왔다갔다 움직인다. 몇 번을 서성이더니 발로 무슨 표시를 했다.

방향을 바꿔 그 자리를 지날 때마다 철사가 가운데로 합쳐지듯 했으니 수맥을 찾는 사람들이 하는 모양새와 하등 다를 바가 없는 일이었다. 필시 그 자리가 물길이 제일 세다고 점찍은 게 분명했다.

“냉기양반, 물 잘 나오겄소?”
“물은 적당히 있는디 땅속을 내가 어찌 알겄는가. 파봐야 알어. 요 자리가 물은 충분헌디 바윗덩어리가 있는지 모래구덩이가 있는지 내사 모른당께. 열길 물속보다 더 힘들단 말이시.”
“여기부터 우리집 깽번(깽변, 강변)까지는 모래밭일 것인디요.”
“그거야 알제. 허지만 땅 속은 모르는 것이여. 샴(샘)을 파다보면 위에는 자갈이다가도 진흙이 나올 때도 있고 몽글몽글한 좋은 흙이었다가 다섯 척이 모래일 때가 태반이여. 그뿐인가. 독 덩어리가 콱 버팅기면 옴짝달싹 못한단 말이시.”

“어쨌거나 파봐야 것소. 연장은 헛간에 있제라우 성님.”
“험험 조금 늦었구만이라우.”
“이샌 아직부터 어딜 댕겨오는가 보이. 탁주 한잔 마시고 하세나.”
“아니네 정때까장은 자리를 잡아야 헝께 나는 그냥 헐라네. 자네나 내꺼까장 마시게나.”
“아따 이 사람아 한잔 마시랑께 그쌌네. 심이 덜 든단마시.”


얼추 팠다 싶으면 도르레에 걸든 사람이 직접 잡아당겨 아래에 있는 흙과 자갈, 깬 돌을 들어 올린다.
얼추 팠다 싶으면 도르레에 걸든 사람이 직접 잡아당겨 아래에 있는 흙과 자갈, 깬 돌을 들어 올린다.신안군
일찍 돌아가신 큰어머니가 없는 큰댁에 50여 차례나 있던 제사 등 대소사엔 어머니가 늘 출동을 했다. 나까지 세명이나 큰집으로 갔으니 큰집 식구에 우리까지 사람들이 꽤 불어있었다.

곡괭이, 괭이삽과 정, 해머, 쇠망치가 너부러져 있다. 지렛대로 쓸 긴 빠루 망치 두 개에 고무 삼태기와 싸리나무로 만든 삼태기 두 개씩에 짚삼태기 하나 그리고 깨지지 않을 양동이까지 연장이랬자 이게 다였다.

한 사람이 두 팔을 벌려 나무 작대기로 빙 둘러 동그란 원을 하나 대충 긋고 “읏샤” “퍽” 소리를 내며 땅을 파간다. 맨 윗부분은 얼어 있다. “쩡쩡” “쨍” 소리를 내며 연장이 튄다. 얼마간 얼었던 곳을 쪼개나가자 마당에 들여온 적토와 윗집인 우리 집에서 떠내려 온 거무튀튀한 흙이 층이 져 나온다.

손에 침을 한번 뱉어 곡괭이질을 하자 겉흙은 거의 벗겨진 듯했다. 이어 자갈과 모래가 섞인 흙이다. 옆에선 파낸 흙을 옮겨준다. 이 때부터는 주위 사람들 손길도 바빠졌다. 모래와 자갈이 뒤섞였지만 괭이로 박박 긁어 삼태기에 담자 금세 하나 가득 채워진다. 이를 멀찌감치 치우는 건 지켜보는 집안사람들 몫이었다.

옆구리에 힘껏 받쳐서 끙끙대며 한쪽으로 치우노라면 한쪽 어깨와 겨드랑이, 발이 결린다. 아홉시 무렵 어머니께서는 사촌누나들과 함께 밥을 해놓고 사람들을 불렀다.

“지워분께(지치니까) 진지들 들고 허싯쇼.”
“아짐 고새 밥 때가 됐다요?”


이 집 저 집 불려 다니며 일을 해내는 사람들 집안 살림은 말이 아니다. 노가다라고 할 것도 없이 반은 머슴, 반은 종노릇이나 다를 게 없는 동네 밑바닥 몇몇 사람들은 겉보리 한말, 쌀 서너 되 받아가는 것도 감지덕지였고 남의 집 일할 때나 보리밥이나 쌀밥에 고깃국 한번 배부르게 서너 차례 먹어보는 것이다. 벌써 막걸리 해장술을 두 잔이나 마셨던 박샌은 깨잘깨잘 떠먹는다.

“어이 박샌, 좀 나서 드시랑께. 그래각꼬 실한 일 허겠는가.”
“됐어라우. 배고프면 찬찬히 쉬었다 하믄 되제라우. 막걸리도 있는디 뭐가 아쉽다요.”
“글도 김칫국에다가 말아서 한술 뜨시랑께. 몰국만 묵지 말고.”
“아따 성님도 걱정도 팔자요. 지 속이 다 알아서 헝께 냅둣쇼.”


어머니는 집에서 가져온 따끈할 때 막 무친 콩나물을 푸짐하게 한 접시 내온다.

“"많이들 드싯쇼. 갑자기 날짜가 잽힌께 장만한 것이 없어라우.“
“성수 뭔 말씀이요. 이렇게 걸면 넘들은 놉이라도 맘대로 부를 수 있다요. 맛나기만 허구만.”


아침밥을 먹으면서도 쉴 새 없이 작업 공정에 대한 말이 오갔다. 이만하면 곧 좋은 땅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와 바윗덩어리 하나가 감지되었으니 이러다 너럭바위가 나타나면 그 자리를 물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소리, 웬만한 크기 돌이라면 정으로 깨고 가야 좋은 물이 나온다는 거다.

석간수(石間水) 물맛이 최고니 그만한 걸 감수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 분은 큰아버지를 대신한 아버지였다. 이왕지사 시작한 일이니 날짜가 대수냐는 말도 잊지 않았다.

장독대 옆에 샘을 팠다. 그것도 따스한 햇살이 내리 쬐는 겨울에. 농한기에는 집안 일이 그렇게 많았던 시절이다.
장독대 옆에 샘을 팠다. 그것도 따스한 햇살이 내리 쬐는 겨울에. 농한기에는 집안 일이 그렇게 많았던 시절이다.김규환
“거시가 성균이집에 핑 가서 막걸리 한말 가져 오니라.”
“지가라우? 겁나게 먼디라우.”
“지게 지고 가면 될 것 아니여.”


구경 온 사람들 수가 늘어가자 막걸리 한두 주전자 가지고는 누구 코에 붙일지 염려스러웠는지 큰아버지는 여덟 살 때부터 지게지고 나무하러 다니는 나를 보고 믿음이 갔던 건지, 하는 일 없이 마음만 바빠서인지 한말짜리 둥그런 한 통을 내게 가져오라신다.

집으로 달려가 작대기를 챙겨 지게를 지고 주막으로 갔다. 작대기로 받쳐 세운 채 막걸리를 져달라고 했다. 통 손잡이에 띠꾸리(짐 실을 때 앞뒤로 고정하기 위해 매달려 있는 줄)를 한번 넣고 둥근 막걸리통을 두어 번 둘러 단단히 묶었다.

“갈 수 있겄냐?”
“하믄이라우.”
“뽈딱 일어나봐라.”
“째까만 밀어 주싯쇼.”
“그려 민다잉, 한나 둘 서이.”
“끙.”


무게는 별 것 아니었지만 출렁거리는 술통인지라 뒤뚱뒤뚱 취권(醉拳)을 하듯 흔들린다. 몸을 간신히 추슬렀다. 똑바로 서서 한번 짐을 추어주고 지게를 바짝 붙이고 나서 뒤뚱뒤뚱 걸었다. 다시 멈춰 서서 움직이지 않게 띠꾸리 줄을 오른손에 단단히 쥐었다.

약간 오르막인 골목을 걷자 다리가 팍팍했다. 막걸리가 새어나와 목 줄기를 타고 흐른다. 내 몸에선 시큼한 술 냄새가 풍긴다. 사타구니까지 내려간 모양이다.

“엄니, 엄니. 얼른 술통개 받으싯쇼.”

불끈 들어서 내리자 잔뜩 긴장한 탓인지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다. 네모난 통이었으면 힘들지 않았을 게다. 그 때까지 세발 자동차가 비포장도로를 사나흘 간격으로 배달했던 시골 막걸리는 무슨 영문인지 언제나 동그란 통에 담겨 있으니 지게엔 찰싹 달라붙지 않아 옮기려면 옹색하기 그지없었다.

구경 온 어른들까지 열댓 명이나 되었다. 담뱃대를 만지작거리는 사람, 필터 없는 ‘새마을’을 뻐끔뻐끔 빨아대는 분, 뒷짐 지고 골똘히 들여다보는 사람, 이들은 파기 쉽지 않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을 늘어놓으며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석 자(尺 1자는 30.3cm)가웃 파들어 갈 무렵엔 말목 다섯 개를 비스듬하게 움집 뼈대 세우듯 가운데로 모아 웬만한 무게에 끄떡없이 흔들리지 않게 단단히 고정한다.

이제부터는 한 사람씩 안으로 들어가서 작업한 것을 바로 담아서 두레박처럼 끈에 묶어 놓으면 위에서 줄을 당겨 꺼내서 버려야 한다. 둘이 들어갔다가는 연장을 맘대로 쓸 수 없으니 차선책으로 선택한 방법이다.

“자, 들어 올릿쇼.”
“알았응께 저짝으로 비켜있으라구.”


헬멧이 없기도 하거니와 안전모에 해당하는 어떤 장치나 기구도 없었다. 그냥 수건 하나 두르고 땀이나 닦는 인부들은 돌덩이가 떨어지면 맞는 게 다반사고 때론 파 들어간 한쪽이 무너져 머리통보다 큰 바위가 떨어져 직격으로 맞으면 뇌를 다치기도 하고 흙구덩이가 허물어지면 안에 갇혀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나오는 경우 허다했다. 뼈가 으스러져버리는 위험한 순간이 상존했으니 깊어질수록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애초에 그런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작업환경이 그러하니 궂은 일 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던 건 부인할 수 없다. 몇 시간째 '바케스'가 올려지고 물과 모래, 자갈이 섞여 나왔다. 가마니를 묶어 달래서 내려주자 어른들 혼자서 들기 쉽지 않은 돌덩이가 올라왔다.

조금 더 지나자 부스러지는 돌처럼 썩어가는 바위가 나오는가 보다. 정과 망치가 들어갔다. “떵떵” “탁탁탁탁” 돌을 잘게 부숴 쪼갠다.

“어이~ 교대허자고.”
“물이나 한바가지 주싯쇼. 글도 허던 사람이 마저 해놓고 나가야제.”
“나오란 말이시.”
“심란해라우.”
“글면 마저허소.”


두레박 양동이에 따라 내려간 물 한 바가지를 맛나게 드신 박샌 아저씨는 쉬지 않고 일하고 나서 위로 올라왔다. 안쪽엔 벌써 일부 그늘이 져 있다. 갈치조림과 고등어를 구워 점심을 먹고 나서도 일이 지속됐다. 이제 공정의 1할이나 됐을지 모른다.

무척 많이 파내려간 우물. 먹는 샘은 안에까지 시멘트  콘크리트를 바르지 않고 겉모양만 만들었고 여기에 작두처럼 생긴 펌프를 매설하였다.
무척 많이 파내려간 우물. 먹는 샘은 안에까지 시멘트 콘크리트를 바르지 않고 겉모양만 만들었고 여기에 작두처럼 생긴 펌프를 매설하였다.신안군
“안 될랑갑소. 돌멩이가 여간 딴딴해서 자드러지지를 않는당께.”
“화강암인가 몰러. 글씨 말여 걱정이구만…. 한삐짝으로 옮기면 째까 옮겨서 파면 안 될랑가?”
“너럭바위처럼 자리를 잡아불었당께요.”


한숨이 마룻바닥에 가득 퍼졌다. 지금껏 파 들어간 깊이도 깊이지만 장독대 주위에서 그만한 자리를 잡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주인이 우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괜히 우겼다가 속이 상해 안 하겠다고 가버리면 큰 낭패다.

“안 되겠는가? 한번 돌아감서 쪼사불자구.”
“한 사나흘은 더 잡아야 헐텐디요.”
“그래도 한번 해봄세.”
“나는 몰라라우. 성님들이 하라면 해야제라우.”


더디 올라오는 건 둘째 치고 돌 쪼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미끄러지는가 싶더니 정이 튀고 만다. 쩡쩡 울리는 소리가 퍼졌다.

“아이쿠 아구구구.”
“이샌, 왜근당가?”
“손묵땡이(손)를 때려부렀당께.”
“조심허지 않고….”


힘이 빠질 때도 됐고 돌이 깨지지 않아 어거지(억지)로 하다보니 그리 된 것이다. 적당한 휴식과 좋은 연모가 일 진척을 돕지만 산골마을에 있던 거라곤 빤하고 구조상 다치기 딱 좋다. 이씨 아저씨 손엔 피가 흘렀다. 교대하여 사람들이 들락거렸다.

석회암 동굴에 종유석과 석순이 만들어지려면 석회암이 수만 년 동안 흘러 응고가 되어야 하는 것과 비슷하게 석공(石工)이 집채만 한 바위 하나 깨트려 산산조각 내려면 한 곳을 쉬지 않고 수천수만 번 두들겨 파열구(破裂口)를 내야 하는 이치다.

오후 다섯 시가 되자 찬바람이 불고 날이 쌀쌀해졌다. 아래에 한번이라도 들어갔다 온 사람들은 더 춥다고 야단이다. 모닥불을 피워보지만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가 서산에 걸리자 몰라보게 집안이 어두워졌다.

불도 없는 곳에서 밤새 일을 한다는 건 위험천만하다. 얼지 않게 거적으로 덮어씌우고 연장을 헛간에 치우고 나서 저녁을 먹고 다음날 일찍 다시 하기로 했다.

덧붙이는 글 | 김규환 기자는 2년 남짓 써왔던 고향이야기 600여 편 중 몇 개를 묶어 <잃어버린 고향풍경1>을 냈다. 고향의 맛을 찾는데 열심이다.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cafe.daum.net/hongaclub) 대표이며 올해 말에 전남 화순 백아산으로 귀향하여 <산채원(山菜園)>을 만들 작은 꿈을 꾸고 있다.

덧붙이는 글 김규환 기자는 2년 남짓 써왔던 고향이야기 600여 편 중 몇 개를 묶어 <잃어버린 고향풍경1>을 냈다. 고향의 맛을 찾는데 열심이다.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cafe.daum.net/hongaclub) 대표이며 올해 말에 전남 화순 백아산으로 귀향하여 <산채원(山菜園)>을 만들 작은 꿈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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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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