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斷腸記)- 97회

등록 2005.01.13 07:54수정 2005.01.13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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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기가 다가오자 갈인규가 아무 말없이 포권을 취했다. 악연(惡緣)이라도 그는 자신의 외숙(外叔)이다. 아무리 등을 돌렸다 하나 그래도 웃어른이다.

“훌륭하게 컸구나. 경(璟)아가 보았으면 좋아 했을게다.”


그의 여동생 당일경(唐逸璟)을 말하는 것일 게다. 갈유의 아내이자 갈인규의 모친이다. 말하는 당일기의 얼굴엔 따뜻한 미소가 흐르고 갈인규를 보는 눈엔 정(情)이 감돈다. 하지만 갈인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부친은 저들에게 많은 핍박을 받았다. 그의 부친은 아내를 사랑했기에 그것을 감내했다. 하지만 자신은 아니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자신의 생모에게 막연한 그리움은 있을지언정 무슨 애틋한 정이 있으랴!

오히려 자신의 부친이 애써 외면하려 했고, 피하려 했던 당문에 대해 그는 원망을 가지고 있었다. 갈유를 떠돌게 하고 아내를 그리워하게 만든 것은 그들이었다. 간혹 강호에서 마주쳐도 무시하던 그들이었다.

“욱이가 너를 심하게 대했구나. 이 숙부가 사과하마.”

분명하게 자신이 외숙부임을 밝히고 있었다. 지금까지 갈유를 당문의 식구로서 대접한 바도 없었고 외숙부라 하고 있는 당일기 본인도 지금까지 갈유를 매제(妹弟)로 대접한 적이 없었던 터였다.


“.....!”

하지만 갈인규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이 갑작스레 왜 자신을 감싸 안으려하는지 그 의도를 알 수 없었을 뿐더러 그러한 모습이 오히려 그에게는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갈인규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자 당일기는 고개를 흔들었다.


“네가 그러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네 잘못은 아니다.”

그 말과 함께 그는 고개를 돌려 구효기를 바라보면서 품속에서 조그만 약병을 꺼내 단약 한알을 꺼냈다.

“구거사...! 아이들이 장난을 친 모양이오. 드시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오.”

해약(解藥)이라는 말이다. 그 말에는 자신은 모르지만 자신과 함께 온 조카들이 중독시켰다는 의미다. 어찌 그가 모르는 가운데 당욱 등이 독을 쓸 수가 있으랴! 더구나 어찌 천하에 모르는 것이 없다는 구효기가 그 속내를 모르랴. 하지만 구효기는 해약을 쾌히 받아들며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고맙소이다. 당문까지 노부를 위협하려 했는지 알았소.”

이쯤에서 끝내는 것이 좋다. 지금 그에게 따진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해독은 사실 핑계였고, 반드시 와야 했기에 온 이 자리에서 그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허..하여튼 미안하게 됐소이다. 노여움을 푸시오.”
“노여움은 무슨.....”

그 말에 당일기는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부득이하게 하독은 했지만 누구라도 통천신복 구효기와 적이 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구효기는 점만 보는 단순한 점쟁이가 아니다. 만박거사라는 다른 외호에서 나타나듯이 그가 모르는 무림의 일이란 별로 없다. 그의 무공수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를 호위하는 도영이란 청년의 도는 결코 무시할만한 수준이 아니다.

더구나 무서운 것은 그의 세치 혀다. 아마 구효기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의 두뇌와 세치 혀로 한두 개 무림문파를 멸문시킨다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것을 모를 당일기가 아니다.

“구거사의 너그러운 마음...소제가 잊지 않겠소이다.”

말투나 행동에 절제가 있고 정중하다. 그의 호에 왜 군자(君子)라는 말이 들어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허나 몸을 돌려 담천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미미하나마 날카로움을 뿜고 있었다.

“잘못한 것은 당욱이지만 어차피 집안일이었네. 집안일에 어찌 외인이 끼어들었는가?”

독혈군자 당일기의 말뜻은 명백했다. 어찌되었던 그들은 외사촌이었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이라 해도 집안일이라는 말은 틀린 말은 아니다. 집안일은 어른이 타이르고 혼을 내야 한다. 그 집안 어른이 아닌 타인이 끼여든 것은 그 가문을 욕되게 하는 일이다.

당일기의 말뜻을 파악한 담천의는 일단 가볍게 포권을 취해 보였다. 어찌되었던 무림의 선배에 대해 예의를 갖추는 것이 우선이다.

“후배가 손을 쓴 이유는 두 가지요.”

담천의는 숨이 막힐 것 같은 기세를 뿜고 있는 당일기와 마주서 있으면서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오히려 담담한 미소가 물려 있었다.

“두 가지...?”

“인규와 후배는 남이 아니오. 동생이 맞고 있는데 가만히 있을 형(兄)은 없소. 그것이 첫 번째 이유요.”

그 말에 구양휘를 비롯해 일행의 얼굴에 일제히 미소가 떠올랐다. 비록 관제묘에서 피를 섞고, 향을 피워 천지신명께 형제의 결의를 고(告)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들은 형제다. 이미 구양휘가 그들을 형제로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를 보인 후여서 그들의 마음을 대변한 것에 불과했다. 만약 갈인규의 사정을 다른 일행들도 알았더라면 담천의와 똑같은 행동을 했을 터였다.

“......!”

특히 갈인규는 뭉클한 감정이 솟아올랐다. 처음 볼 때부터 왠지 따르고 싶은 사람이었다. 음울한 고독과 아픔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자신과 같아 보였다. 그래서 형님이라 부르며 따랐다. 어떤 때에는 투정도 부리고 싶었고, 자신의 속내도 편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가 왜 손가장에서 자랄 수 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손불이의 처인 경여를 왜 어머니로 부르는지 자신의 신세를 허심탄회하게 말해 줄 수 있었다.

“두번째는..?”

당일기의 눈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것은 그가 화가 났다는 뜻이다. 억지를 부리는 것 같은 그의 말도 말이지만 무림인이라면 한수 접고 대접하는 자신에게 그는 한치도 물러서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정중히 사과를 했다면 망신을 당한 당가의 위신도 세우고 적당한 선에서 타이르려 생각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기선을 제압하려 했던 것인데 이 젊은 놈은 자신의 위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물러날 여지도 주지 않는다. 그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당문은 이런 자를 가만 놔 둔 적이 없다.

“두번째 이유는 외사촌 간이라 해도 한번 더 인규를 때렸다면 인규가 가만히 있지 않았을거요. 그러면 자연히 손을 맞대야 하는데 외사촌 형을 패면 사람들이 인규를 뭐라 하겠소? 패륜아의 낙인이 찍힐거요. 한가지 더 덧붙이자면 그런 후에 어찌 인규가 자신의 생모를 떳떳한 모습으로 만나 뵐 수 있겠소?”

갈인규 뿐 아니라 당가도 생각해 주었다는 말이다. 나름대로 논리정연한 말인 것 같았지만 실상은 갈인규가 당욱을 능가하는 실력이 있다는 말이었고 당가를 모욕하는 말이 될 수도 있었다. 당일기는 말문이 막혔다. 더구나 자신이 갈인규에게 보여 준 태도를 이용해 향후 갈인규가 당가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수도 있다고 말은 하나 어찌보면 차후라도 가문의 위세로 갈인규를 핍박하지 말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자네의 세치 혀는 노부의 독혈(毒血)보다 더 무섭군. 풍운삼절(風雲三絶)을 꺾은 실력이니 노부정도야 눈에 차지 않는 모양이지?”

당일기는 담천의를 알고 있었다. 당문은 무림에 별로 나타나는 바 없지만 결코 잠자고 있는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 말에 좌중은 새삼스레 담천의를 주시했다. 당욱은 무림인들이 아는 한 그리 쉽게 당할 인물이 아니다. 그의 빠른 출수와 냉혹한 성격은 그를 당문의 전형적인 인물로 꼽았다.

아무리 갑작스러운 공격이었다 하나 그런 당욱이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맞을 때부터 기이하다고 생각했던 터였다. 당욱은 절대 하수가 아니었다. 독비황(毒飛蝗)이란 별호 역시 거저 주운 것이 아니다. 당문의 암기 중 비황석(飛蝗石)이란 것이 있다. 비황이란 메뚜기와 비슷한 곤충으로 이를 본 따 만든 암기가 비황석이다.

기이한 각도를 그리며 날아드는 점에서는 호접표와 비슷하지만 그 속도는 비침이나 정(釘)과 같이 쾌속하여 눈을 뜨고도 방비하기 어려운 암기였고, 더구나 일곱가지의 극독이 묻어 있어 다른 암기보다 다루기 어려웠다. 그러한 비황석을 마음먹은 대로 사용할 수 있는 인물이 당욱이었다. 허나 풍운삼절을 은퇴시킨 인물이라면 그럴만 하다고 이해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초혼령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는데....초혼령의 위세를 떠는 것인가?”

그의 세치혀에 농락당한 느낌을 가진 당일기로서는 그냥 물러서기 어려웠다. 더구나 향후 당문을 이끌어갈 세 아이가 모두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로 망신을 당한 상태다. 상대의 위신을 세워주는 것으로 일단 자신들의 조카들이 당한 망신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고, 자신이 적당하게 손을 봐주는 것으로 당가의 위신을 일거에 회복하려는 의도였다.

“후배가 초혼령을 가진 것은 사실이나 당선배에게 위세를 떤 적은 없소.”

“헉.....!”

장안루 안에 탄식과 헛바람 소리가 퍼지더니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적막에 잠겼다. 지금까지 신비와 공포의 대명사였던 초혼령을 저 청년이 가지고 있다니..... 좌중에 담천의가 초혼령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초혼령을 가진 자가 나타나자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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