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斷腸記)- 105회

등록 2005.01.25 08:08수정 2005.01.25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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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무영보(無影步)와 탄신무영(彈身無影)을 따라올 인물은 없다. 오십 오년을 살아오면서 신법에 관한한 자신을 능가할 인물은 만나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아랫배가 갈라져 내장이 삐쭉 고개를 내미는 몸으로 두시진 이상 움직인다면 아무리 그라 해도 버티기 힘들다.

그는 왼손으로 아랫배를 누르며 냄새나는 골목 속으로 소리 없이 들어섰다. 걷기에도 불편할 정도로 좁은 골목길은 지저분했고, 지분 냄새와 오물 냄새가 뒤엉켜 기이한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이곳은 역사를 자랑하는 고도(古都) 장안의 또 다른 이면(裏面)을 보여주는 싸구려 홍등가였다. 기루(妓樓)나 주루(酒樓)에서 몸을 팔았던 노류장화(路柳墻花)들이 마지막 머무는 곳. 운이 좋아 꽃다운 시절에 소실(小室)로 들어가면 다행이다. 억척스러워 자신과 같은 노류장화 몇 명을 데리고 장사를 시작한 경우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하지만 그녀들 대부분은 꽃이 시들고 말라가면서 병들면 버려질 수밖에 없다. 숨 쉬는 마지막 날까지 그저 어둠 속에서 피는 독버섯처럼 남은 불꽃을 피어 올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지나가는 그의 귓가로 거친 숨소리들이 들린다.

(결국 함정이었어….)

그는 이번에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얼마간 몸을 사리고 숨어 있어야 했다. 그들이 영원히 포기하지 않을 물건을 가졌다면 아예 여생 동안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 했을지 모른다. 마지막이라 생각했던 욕심과 판단 잘못으로 그는 생사의 기로를 헤매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죽지 않아….)


추적자는 이미 따돌렸다. 부상당한 몸이었지만 아직 그는 숨이 붙어 있었고, 숨이 붙어 있는 한 누구도 그를 붙잡기는 어려웠다. 그는 갑자기 몸을 돌려 좌측으로 들어섰다. 처마와 처마가 붙어 있는 길도 아닌 곳으로, 몸을 가로로 하여 게걸음 할 수밖에 비좁은 틈이었다. 이곳의 지리를 잘 알지 못하는 자는 이런 틈이 있는 줄도 모를 것이다.

“…!”


그는 게걸음으로 십여 장 정도를 비집고 가다가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자 앞에 보이는 창문을 열고 스르륵 미끄러지듯 방으로 넘어들어 갔다.

“이제 오나? 운중학!”

그의 발이 방바닥에 닿는 순간이었다. 어둠 속에서 감정이 한 올 섞이지 않는 목소리가 들렸다.

(헉…!)

그 사내다. 자신을 뒤쫓고 있던 무리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그 회의무복의 사내. 도망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바람보다 빠르다는 두 발은 굳어 버린 듯 움직일 수 없었다.

“피는 멎은 것 같군. 피곤하지 않나? 앉아서 쉬어.”

그 말에 그는 정말 피곤하다고 생각했다. 이미 자신의 운(運)은 다했다. 이제는 더 이상 도망칠 수도 없었고, 더 이상 도망치기도 싫었다. 이곳까지 알았다면 이미 자신의 모든 것을 안 것이다. 그는 조그만 탁자에 기대며 의자에 몸을 실었다.

팍----!

불을 켠 것일까? 갑자기 방안이 환해지는 듯 했다. 하지만 불을 붙인 게 아니었다. 침상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양손을 가슴으로 모아 합장을 한 그 양손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빛이었다. 요사스러울 정도로 영롱한 붉은색의 광휘는 점점 더 그 기세를 더해 마치 대낮과 같았다.

화르르---르----

그 사내의 양손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어찌 양손이 합장한 상태에서 저런 불꽃을 피워 올릴 수 있을까? 허나 천변무영객 운중학은 고개를 돌려 방 한 귀퉁이의 기둥을 바라보았다. 방기둥을 파내어 만들어 두었던 비밀 장소. 그 덮개가 열려져 있었다.

“어떻게 찾았소?”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물었다. 저곳은 아무리 철저하게 조사를 한다고 해서 찾아 낼 곳이 아니다.

“적멸안(赤滅眼)은 살아 있는 것이다. 수백만, 수천만의 생명이 담겨져 살아 있는 것이지. 그래서 우리는 적멸안이 십장 이내에 있다면 감응(感應)을 할 수 있다.”

화르르륵----

가슴께에 합장한 듯 양손을 모은 사이로 타오르는 불꽃은 더욱 맹렬하게 타올라 마치 그의 전신 모두가 타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불꽃이 그의 전신을 휘감고 굉렬한 빛이 뿜어져 그것을 바라보는 운중학은 눈을 뜰 수가 없을 정도였다.

허나 어찌된 일일까? 그렇게 맹렬히 불꽃을 피워 올리면서도 운중학은 단 한 점의 화기(火氣)도 느낄 수 없었다. 분명 불꽃은 타오르되 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하지 않다면 그의 주위에 있는 것은 모두 불이 붙어 타올랐을 것이다.

“누군가 고의로 오룡번의 소문을 냈다 하더니 철혈대주가 말하던 누군가가 바로 당신이오?”

“소문이 아니지. 그것이 분명히 오룡번 임을 네 자신이 알고 있지 않나?”

그 말뜻은 오룡번의 정보를 무림에 흘린 사람이 자신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철혈보 내에서도 몇 명만 알고 있다던 오룡번의 정보를 어찌 그가 알고 있었던 것일까?

“결국 노부를 잡기 위해 그랬던 것이오?”

“물론이다. 네 놈을 추적하고는 있었지만 쥐새끼처럼 잘도 피해 다니더군. 하지만 너 같은
인간들은 오룡번과 같은 보물이 나타났다고 하면 참지 못하지.”

천변무영객 운중학은 대도(大盜)다. 그에게 있어 모두가 얻기를 바라는 무가지보는 반드시 노려야 할 물건이다. 추적하는 자들이 두려워 그런 물건을 포기할 운중학이 아니다.

“사실 운이 좋았지. 만약 금적수사가 오룡번을 가지고 도망 나오는 일이 없었다면 아직까지 네놈을 따라 다녔을 테니까.”

그 순간 그 사내의 전신을 덮고 있던 불꽃들이 갑작스레 그의 전신을 휘감아 돌기 시작했다. 붉은 불꽃들이 점차 적색이 옅어지며 흰빛을 띠우기 시작했다.

“금적수사 부부가 추적하는 철혈대에 잡히지 않고 장안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천우신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만약 네놈이 신변의 위험을 느껴 나타나지 않으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되니까 말이다.”

그러다 문득 휘감아 돌던 불꽃들은 그의 양손 사이에 있는 적멸안으로 스며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전신을 감싸고돌던 마지막 불꽃이 운중악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헉…!”

불로 지지는 화끈한 느낌이 들더니 그 고통은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마치 전신이 불에 덴 듯한 지독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너는 장안에만 일곱 개의 토끼굴을 파 놓았더군. 그 중 한군데에 반드시 돌아 올 것이고, 그곳이 바로 네놈이 물건을 감춰둔 장소일거라 생각했지.”

그제야 밀려드는 고통 속에서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들은 장안루에서 언제인지 모르지만 이미 자신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을 죽이지 않았다. 토끼몰이였다. 부상당한 토끼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굴을 찾아가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굴은 자신이 가장 안전하고 먹이가 풍부하게 저장되어 있는 굴일 것이다.

“너는 약속을 어겼다. 우리는 너에게 약속한 막대한 돈을 지불했지만 너는 약속한 물건을 얻고도 팔개월 동안이나 우리에게 넘기지 않았다.”

“으--헉, 욱!”

정말 지독한 고통이었다. 아마 칼로 심장을 도려낸다 하더라도 이런 고통은 아닐 것이다. 염옥(炎獄)에 빠져 전신을 태우는 형벌이 이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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