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녹색 피라미드 (34회)

등록 2005.02.17 12:58수정 2005.02.17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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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방에 처음 들어갔을 때 김 경장은 먼저 방안을 채우고 있는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 여자 혼자 사는 집에서 맡을 수 있는 독특한 향취였다. 화장품과 향수와 비누 냄새가 적절하게 어울린 냄새. 그는 냄새를 통해 새삼 여자 방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방안의 모습은 보통의 여자 집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다섯평짜리 좁은 방 한쪽에 한평 정도의 크기로 돗자리가 깔려 있고, 그 위에 책상이 놓여 있었다. 벽의 세면은 책장으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바닥에 쌓아 올린 종이 상자와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전자 제품에 가려 윗부분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상자에 든 것은 종이류인 듯했다. 그 모두가 그녀가 공부하고 있는 고조선과 관련된 것이었다.


"책이 무척 많군요."

"대부분 한국에서 구한 것들이에요. 한국에서 유학하는 동안 닥치는 대로 사 모은 것이죠."

싱크대가 달린 부엌은 방 입구에 있었고, 그 옆에 작은 욕실이 딸려 있었다. 김 경장이 세수를 하고 나오자 채유정이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디 가세요?"

"손님 대접할 음식을 준비해야죠."


"같이 나가요. 그놈들이 우릴 노릴 줄 몰라요."

집 앞 정육점에서 그녀는 돼지고기를 샀고, 근처 가게에서 두부와 표고버섯과 옥수수 캔과 완두콩을 샀다. 김 경장은 밖에서 그녀가 물건을 고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집으로 들어간 그녀는 곧 주방에 달라붙어 한참 동안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해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순간만큼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는 듯했고, 실제로 고개 한번 돌리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는 천장에서 큰그릇을 꺼내더니 솜씨 좋게 이인분으로 나누어 담았다.

그녀가 만든 것은 표고버섯을 넣은 두부볶음이었다. 매우 감칠 맛이 났고 달콤한 맛도 느껴졌다. 중국에서 살아서 그런지 기름기가 많아서 조금 흠이었지만 그런 대로 먹을 만했다. 호텔 앞의 음식점에서 사 먹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차는 제가 준비할 게요."

김 경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을 뒤졌다. 싱크대 위의 찬장에 자스민 차가 들어 있는 통이 있었다. 그걸 유리로 된 주전자에 넣고 끓였다.

"기름진 음식을 먹고 나서 자스민 차를 먹어야 한다면서요?"

그녀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가만히 김 경장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그들이 왜 하필 그 노인에게 비행장의 위치를 물었을까요?"

"그야 비행기를 타려고 했겠죠."

"비행기를 타고 어디를 가려고 했다는 말인데……."

"그것보다 왜 하필 비행기를 타려고 했을까요? 택시나 다른 교통 수단도 많은데 말에요."

"그들 셋이 비행기를 타려고 했던 이유라……."

"안 박사가 류 교수를 무순에 데리고 간 이유가 무엇일까요?"

"두 분은 학계에서 날선 대립을 보이던 분이셨어요. 무순이 고조선의 유적지가 많은 곳이라면 안 박사님이 무언가를 보여주려고 그랬겠죠."

"그 무엇을 빨리 보여주려고 비행기를 찾았을까요?"

"비행기를 탄다고 빨리 갈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비행장을 찾고 또 비행을 수속하려면 한참의 시간이 걸리죠."

"빨리 가기 위해 비행기를 타는 것이 아니라면……."

문득 김 경장은 머리가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아주 작은 구멍이 서서히 확대되고, 그 틈으로 빛이 스며들었다.

"아!"

불현듯 그의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자신의 무릎을 세게 내리치며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다.

"무엇을 보려고 했을 겁니다."

채유정이 턱을 앞으로 내밀었다. 무슨 말이냐는 표정이었다. 김 경장의 말이 이어졌다.

"하늘에서만 볼 수 있는 그 무엇을 보려고 비행기를 찾았을 겁니다. 하늘에서만 볼 수 있는 그 무엇."

"하늘에서 내려다 보아야만 확인할 수 있는 유적지가 있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습니다."

그제야 채유정의 얼굴도 밝아졌다.

"그걸 왜 진작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하고 말하면서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점퍼를 입으며 가방을 손에 들었다.

"어서 가요."

"우리도 비행기를 타자는 말씀입니까?"

"굳이 비행기를 탈 필요는 없어요. 높은 산에 오르면 부근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을 지 몰라요."

"하지만 지금은 밤입니다. 지금 간다고 해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겁니다."

"무순까지는 꽤 먼 곳입니다. 부지런히 달려가면 새벽에는 높은 산에 오를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가 먼저 집을 나섰다. 나오면서 책장에서 책을 한권 꺼내어 들었다. 김 경장도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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