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미학의 시작 ‘분청사기’

[이철영의 전라도기행 40]광주광역시 충효동 분청사기 도요지

등록 2005.03.15 20:13수정 2005.03.16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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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분청사기 가마터. 반지하식의 등요(경사진 곳에 있다는 의미)

분청사기 가마터. 반지하식의 등요(경사진 곳에 있다는 의미) ⓒ 이철영

국운이 다해가던 고려는 변방의 백성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고려의 하늘빛으로 청자를 빚어내던 강진, 해남의 도공들도 왜구들의 노략질이 미치지 않는 내륙으로 옮겨 가야 했다. 그들은 무등산 자락에 둥지를 틀고 새로운 가마를 열었다.

왕실과 귀족들이 쇠하니 청자를 써 줄 이도, 만들 일도 없었다. 세상은 요동치고 있었고 시대와 시대 사이, 힘의 공백과 긴장은 그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불어 넣었다. 그들은 생전 느껴 보지 못했던 자유로운 공기를 호흡하며 예술혼을 각성시켰다. 역동하는 새 시대의 기운과 자유로운 영혼으로 그들은 분장회청사기(紛粧灰靑沙器)를 만들어냈다.


a 분청사기 인화국화문 항아리. 이것은 ‘인화기법’을 사용한 것으로 국화문양의 도장으로 그릇의 표면에 문양을 새긴 뒤 그 자리를 백토로 메워 모양을 냄.

분청사기 인화국화문 항아리. 이것은 ‘인화기법’을 사용한 것으로 국화문양의 도장으로 그릇의 표면에 문양을 새긴 뒤 그 자리를 백토로 메워 모양을 냄. ⓒ 이철영

분청사기는 온전한 조선의 것이었다. 거기에는 부패하고 무능한 왕조를 무너뜨린 힘과 활력, 격식을 파괴하는 재치와 활달함이 담겼다. 그것은 과거의 지배세력들이 갖추지 못했던 새로운 덕성의 표현이기도 했다. 투박함 속에 용기와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무욕한 정신은 시원한 여백을 남겼다. 조선의 미학이 여기에서 시작됐다.

a 가마터에서 수습한 파편을 모아 복원한 15세기 경의 분청사기.

가마터에서 수습한 파편을 모아 복원한 15세기 경의 분청사기. ⓒ 이철영

무등산 북쪽 기슭의 광주시 충효동 지역은 15세기 조선 최고의 분청사기 생산지였다. 분청사기는 상감청자의 쇠퇴기에서 출발한다. 청자가 원재료인 흙을 물에 개어 5 ~10%의 고운 입자만을 걸러내는 수비(水飛)과정을 거치는데 반해 분청사기는 이 과정을 거치지 않은 흙을 그대로 사용한다. 시간과 노동력을 줄이는 엄청난 변화였다. 생산성은 크게 증대되었고 많은 이들이 그들의 그릇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a 분청사기 단지. 조화기법으로 만든 것(조화기법은 그릇의 전면에 백토로 분장한 후 원하는 무늬를 선으로 새겨 그릇의 회색 바탕색이 무늬색으로 나타남)

분청사기 단지. 조화기법으로 만든 것(조화기법은 그릇의 전면에 백토로 분장한 후 원하는 무늬를 선으로 새겨 그릇의 회색 바탕색이 무늬색으로 나타남) ⓒ 이철영

그러다 보니 흙의 재질을 따라 표면이 거칠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백토(白土)를 입혔다. 연극인들처럼 두껍게 분장을 하는 셈인데 그래서 붙인 원래의 이름이 ‘분장회청사기’다. 거기에다 청자의 상감기법을 사용하거나, 꽃문양 도장을 이용해 표면에 음각한 뒤 거기에 백토를 채워 넣고 굽는 인화문 기법을 사용했다.

a 분청사기 ‘귀얄 단지’. ‘귀얄’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백토를 바른 것으로 거친듯 하면서도 생동감 있는 표현.

분청사기 ‘귀얄 단지’. ‘귀얄’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백토를 바른 것으로 거친듯 하면서도 생동감 있는 표현. ⓒ 이철영

또 일종의 붓이라 할 ‘귀얄’에 백토를 묻혀 그것이 지나간 결을 그대로 속도감 있게 드러내는 ‘귀얄기법’도 있었다. 어쩌면 날림이라는 느낌이 들 만큼 슬쩍 비질하듯 지나가는 이 기법은 역설적이게도 소박함, 질박함, 대담함, 서민성을 오롯이 드러내는, 분청사기의 전형을 보여준다. 귀얄로 그려낸 그릇 안팎의 소용돌이는 매우 혼돈스러워 보이지만 들여다볼수록 정연해진다. 질서와 혼돈의 대별은 인간 의식의 영역일 뿐 당초 한 몸이 아니던가. 그 속에서 고려 말 조선 초의 카오스와 새로운 사회 건설의 희망에 전율했던 시대정신을 읽는다.

a 분청사기 ‘귀얄 대접’.

분청사기 ‘귀얄 대접’. ⓒ 이철영

충효동 도요지에서는 다른 가마터에서 볼 수 없었던 흥미로운 유물이 두 가지 출토 되었다. 하나는 ‘분청사기 마상배(馬上杯)’. 마상배는 전쟁터나 주둔지에서 기마병들이 말 위에서 술을 마실 때 쓰던 잔인데 이것에 한글로 쓴 ‘어존’이라는 글자가 명확하다. ‘어존’이라면 임금이 쓰는 물건이 되는데 왕이 쓰는 물건치고는 조형이며 글씨가 너무도 어설프게 보인다.


a 한글로 '어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 분청사기 마상배.

한글로 '어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 분청사기 마상배. ⓒ 이철영

임금에게 바치려고 만들려다 만 실패작이었을까? 그것보다는 고려왕조의 해체를 지켜보며 ‘세계는 변화될 수 있구나’하는 진리를 깨달은 어느 도공의 해학이었을 것이란 상상을 해 본다. 절대 권위의 추락을 바라보며 자기 존재의 섬뜩한 자각을 경험한 어떤 이가 동료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우리도 임금의 술잔으로 한 잔 마셔보자”는 상황이 아니었을까? 그러면서 대역죄로 잡혀가다가 떨어뜨린 술잔이었을까?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 도자기에는 어느 한 점도 언문으로 글자가 씌어진 경우가 없다는데 그것도 임금께서 쓰시는 물건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 아닌가?

a 전국에서 하나 밖에 없는 매우 귀중한 유물. 갑발 안에 분청사기와 백자를 함께 넣어 구은 것으로 분청사기에서 백자로 넘어 가는 시기의 변천상을 한 눈에 보여준다.

전국에서 하나 밖에 없는 매우 귀중한 유물. 갑발 안에 분청사기와 백자를 함께 넣어 구은 것으로 분청사기에서 백자로 넘어 가는 시기의 변천상을 한 눈에 보여준다. ⓒ 이철영

또 하나는 분청사기와 백자를 동시에 굽던 도편의 출토다. 갑발(匣鉢, 도자기를 구울 때 재나 티 등이 도자기 표면에 내려앉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도자기를 넣는 그릇) 안에 분청사기를 넣고 그 안에 다시 백자를 넣어 굽다가 서로 붙은 채로 발굴된 이 도편은 분청사기에서 백자로 이행되었다는 이론을 눈으로 확인시켜 주는 희귀한 유물이다.


광주시 분청사기 전시실장(북구 금곡동) 정기진씨는 “백자는 분청사기보다 섭씨 50도 정도 소성온도가 더 높습니다. 게다가 실험해 보면 초벌, 재벌구이를 하는 동안에 최초 보다 부피가 10%정도 줄어드는데 그런 것들을 밝혀내기 위해 당시 도공들이 수 없는 실패를 거듭하며 몸부림치며 고심했던 흔적이라고 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a 분청사기 제기(祭器).

분청사기 제기(祭器). ⓒ 이철영

왕조의 기틀이 잡혀가면서 조선은 경기도 광주에 관요(官窯)인 분원을 설치했다. 그곳에 전국의 도공들을 불러 모았고 백자가 본격적으로 생산되었다. 새로운 나라의 질서가 수립되는 것은 새로운 억압의 탄생을 말하기도 하는 것. 분청의 자유로운 영혼은 얼마 가지 않아 백자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나 자유를 추구하는 현대의 영혼들이 역사의 무덤에서 분청을 불러내고 있다. 바야흐로 분청의 시대가 새롭게 열리고 있다고 할 만큼 도예가, 보통의 사람들까지 15세기 조선의 그릇에 열광하고 있다. 14세기에 시작된 이곳 충효동 도요지는 18세기까지 존속하며 백자를 만들어냈다.

a 분청사기 벼루.

분청사기 벼루. ⓒ 이철영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oil'사보 3월 호에도 실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s-oil'사보 3월 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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