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할망 지나갔으니 기지개를 켜야지

허물벗기 위해 몸부림치는 봄꽃들

등록 2005.03.25 13:45수정 2005.03.25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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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질투하는 바람의 신 '영등할망' 신들의 고향에서 살아가는 제주사람들에게 영등할망의 전설은 마치 현실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그녀가 머물었던 자리는 눈과 비와 바람의 소용돌이였다.

명자꽃이 기지개를 켭니다.
명자꽃이 기지개를 켭니다.김강임
비록 전설이긴 하지만 제주사람들은 아직도 음력 2월 초하루부터 보름까지를 영등할망이 신들의 고향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일까? 영등할망이 머물렀던 3월은 내내 눈과 비, 바람의 계절이었다. 특히 영등할망이 떠나간다는 음력 2월 보름(3월 24일)은 영등할망이 봄을 시샘하는 질투가 장난이 아니었다.

김강임
전설을 확인이라도 하듯 비와 바람은 물론 진눈깨비까지 내렸던 것을 감안하면 분명 영등할망이 딸과 며느리를 데리고 와서 딸의 의상을 과시하고 며느리의 옷을 더럽혔나 보다.


그런데 영등할망이 지나간 오늘은 완연한 봄이다. 이른 아침 한라수목원. 아침 산책을 즐기는 제주한라수목원은 봄꽃들이 기지개를 켜느라 아우성이었다.

김강임
한라 수목원에서 제일 먼저 봄을 알리는 것은 매실나무. 가까이 보면 매화처럼 생긴 것이, 멀리서 보면 벚꽃처럼 생긴 것이 가지 끝에 꽃잎을 주렁주렁 달았다.

아직 이파리를 틔우지 못한 나무 가지사이로 봄바람이 살랑댄다. 명자나무 가지에도 봄이 내려앉았다. 명자나무 꽃은 부지런하여 아침 일찍 기지개를 켠 듯 벌써 꽃잎이 아침 해를 흠뻑 머금고 있다.

김강임
표정없는 고목나무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꽃망울들이 마치 열매처럼 발갛게 익어간다. 그리곤 얼어붙은 땅속에서 새싹이 돋아나는 것처럼 진통이 계속된다. 아무래도 고목에서 피어나는 꽃은 기지개는커녕 하품조차 하려면 아직 멀었다.

이른 아침 산책로에서 만나는 나무들은 유난히도 가지를 흔들어 댄다. 아직은 새벽 공기가 차가운가 보다. 조금이라도 봄빛을 더 받고자 하늘높이 고개를 쳐든 목련. 아침에 뿜어대는 목련의 자태는 우아하기보다는 허물을 벗고 있다고나 할까? 겹겹이 쌓인 자신의 허물이 비로소 다 벗겨지는 날 꽃잎이 피어나겠지.

김강임
피어나는 목련을 보고 있으려니 날마다 자신의 허물을 벗기 위해 몸부림치는 인간의 실상을 보는 듯 하다. 철부지처럼 계절도 모르고 겨우내 피어 있던 털진달래도 진분홍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하얀 눈으로 흰목도리를 했던 진달래가 오늘은 목도리를 풀고 알몸을 드러낸다.

김강임
활짝 핀 진달래에 카메라를 들이대자 짓궂게도 봄바람이 불어와 가지를 흔들어 댄다. 내 손끝마저 떨린다. 아직은 차가운 아침공기가 손끝을 시리게 만든다.

겨울나무는 모두 칙칙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영등할망이 지나간 봄 동산은 옷 벗는 소리, 옷 입는 소리와 함께 기지개 켜는 소리까지 마치 '봄의 왈츠'를 연주하는 것 같다.


김강임
봄의 색깔이라면 아무래도 노란색이다. 봄에는 역시 상큼한 색이 어울리는 것 같다. 양지바른 곳에 초대된 개나리 옆에 서성대는데 발 아래 피어나는 보라색의 제비꽃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키가 큰 나무 아래 기지개 한 번 켜지 못하는 봄꽃을 보니 강자의 허세에 억눌려 사는 약자의 비참함을 보는 듯했다. 벚꽃 아래 햇빛 한 번 받아보지 못한 키 작은 수선화와 노란 복수초 그리고 이름모를 야생화들.


김강임
날씨가 해동하니 이른 아침 한라수목원에 산책 나온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이불 속이 따뜻하게만 느껴지던 삼월. 이제 영등할망도 지나갔으니 기지개를 한번 크게 켜 봐야 하겠다.

김강임
김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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