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곤증 날리는 찬란한 봄의 향기

[고향의 맛 원형을 찾아서 91]파, 부추, 풋마늘, 산부추, 산마늘, 양파

등록 2005.04.01 06:29수정 2005.04.01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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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 김치. 맵지만 정신이 화들짝 깨어난다. ⓒ 김규환

봄인가 했더니 나른하다. 실실 잠이 쏟아진다. 커피를 몇 잔째 마셨는지 모른다. 그래도 눈꺼풀 하나 지탱할 힘이 없다. 앉았다 하면 자고, 서서도 곧 잠에 빠지기를 반복하니 선잠을 깬 듯 피곤하기만 하다.

피부도 건조한 봄바람에 거칠어져 푸석푸석하다. 봄이건만 내 몸은 새 것을 맞이하기 위한 채비를 하기보다 외려 몽롱한 상태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으니 어쩔거나. 마치 뉴캐슬병 앓는 햇병아리마냥 비실비실 자올자올 정신을 못 차리겠다. 힘이 없고 의욕도 똑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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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래장 한 숟가락이면 밥 한 그릇. 혀가 노래를 한다. ⓒ 김규환

만물은 소생하여 땅 기운을 쭉쭉 빨아올려 펌프질을 해대느라 바쁜데 왜 이럴까? 건강에 적신호라도 온 건지 원…. 입맛도 떨어져 무얼 먹든 까칠까칠 지푸라기 씹는 기분이니 이러다가 중도하차하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몇 개월 동안 겨우살이에 적응하느라 긴 밤 지새우다보니 길어진 해를 주체하지 못함이요, 풋풋한 채소 한 번 제대로 먹어주지 못한 탓도 있다. 또한 봄이 되면 길어진 낮을 따라가지 못한 것도 한 가지 이유다.

춘삼월 호시절 헛되이 보내다가는 운전하는 내 친구 사고 날까 염려스럽고 몇 개월 남겨둔 조카 녀석 수능시험이나 잘 보려나 모르겠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봄의 반갑지 않은 불청객 춘곤증에 뭐 좋은 거 없나?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을 살고 있는 자신을 추스르기 위해서라도 뭔가 정신을 빠짝 깨우는 게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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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마늘 무침. 생으로 고추장에 찍어도 입안이 향긋한 노래를 한다. ⓒ 김규환

어렸을 적 졸음병에 걸린 병아리에게 아버지는 매옴한 고추장을 달달 비벼서 주셨다. 먹는 놈은 살고, 받아먹지 못하면 그걸로 생명을 마감하는 광경을 몇 번 목격했다. 커서 따라 해봤더니 실제 효험이 있었다.

2월에 담근 찰고추장이 뽀글뽀글 달큰하게 시큼 털털 쫀득쫀득 익어가는 철이다. 봄 햇살은 장독대와 밭 언덕 나물과 풀에게 뼈와 살이 자라도록 돕는 명약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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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 꽃은 고향의 모습이다. ⓒ 김규환

살랑살랑 불어오는 남녘바람에 마음과 내 몸을 조금씩이라도 움직이라고 야들야들 보드랍게 속내를 쏙쏙 드러낸다. 파릇파릇 우쑥우쑥 쪽쪽 소가 냇가 물을 빨 듯 목을 축이니 지난 긴 겨울을 이겨낸 성장의 세월이 아름답다.

저 멀리 유럽에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3경을 꼽으라면 분홍빛 감자꽃과 여인이 목욕하고 나온 모습에 파 꽃이 핀 풍경인데 때마침 파 꽃이 피기 직전이다. 특히나 대파 꽃은 우주를 향한 평등한 진보의 힘찬 솟구침이다.

하얀 색감이 주는 느낌은 순진무구 자체다. 꽃이 피는 건 자신의 종족을 보존하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일진대 효용가치가 떨어지면 얼른 꽃을 피워 다음 세계를 기약하는 새로운 가치에 투자하는 측면도 강하다. 이때를 놓치지 말고 봄의 향취를 거둬들일 때다.

꽃이 피면 대공 사이가 벌어져 먹기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으며 별 소용이 없다. 씹히는 맛도 별로지만 향과 영양도 현저히 떨어진다. 이 봄 더 깊어 여름으로 치닫기 전에 서두르자꾸나.

대파, 쪽파, 부추, 산부추, 명이나물 산마늘, 양파가 사촌지간으로 한 족속인데 향은 매한가지요, 모양새도 땅에 묻힌 데는 하얗고 햇볕에 노출된 부위는 시퍼렇기 한이 없다. 풋마늘과 양파가 지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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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 김치는 익혀 먹어도 좋다. 파 김치 넣은 김밥도 일품이다. ⓒ 김규환

고조선 때부터 우리 식탁에 자리 잡은 건 이중에서 아무 거나 하나일 터다. 한결같이 요놈들은 백합뿌리 같이 생겨서 맵고도 달며 알싸하고 코를 뻥 뚫어준다.

서양인이 이제야 마늘의 효험을 알게 됐지만, 얼마 전까지 만해도 지네들 노린내는 알기나 하고 그러는 건지 동해에 사는 사람들 흉을 겁나게도 봐왔다. 그 장본인이 바로 발효식품과 파, 마늘 따위이다. 요모조모 생김새야 가늘고 굵고 길이가 약간 차이가 나더라도 김치라든지 된장, 고추장과 만나서는 신기하고 오묘한 조화를 부려 <본초강목> <향약집성방> <동의보감>을 꿰뚫어 몸에 좋기로 우열이 없다고 했다. 다만 꽃비 나리는 봄철이라야 그 향이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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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파를 잘라 고추장에 둘둘 비비면 옆집까지 내음이 솔솔 풍긴다. ⓒ 김규환

겉은 볼품 없지만 겉 줄기만 떼어내면 대파는 가을 쪽파 못지않고, 쪽파는 껍질 벗길 일도 없다. 데쳐서 고추장에 버무리든 그건 맘대로 하라.

더 강렬한 원형의 내음을 맡으려거든 파김치를 매콤하게 담가 시기 전 먹어 코가 뻥 뚫리고 정신이 봄비에 개구리가 화들짝 놀라 깨어나듯 바짝 긴장하게 하면 된다. 뭐니뭐니 해도 파김치는 약간 묵혀야 제 맛이지.

이것으로 배부르지 않다면 부슬비 소슬소슬 오는 날 기름기를 팍팍 튀겨도 좋으리라. 먹어서 몇 번 씹으면 징상스럽게 입 안을 자극하여 입김을 불면서 때론 헉헉거리며 허기를 채우리라. 코가 뻥 뚫리는가 싶더니 이내 멈춰 있던 혈관을 자극해 온몸의 기운을 곳곳으로 실어 나르느라 여념이 없다.

쉴새없이 마늘 특유의 알리신이 꼴딱꼴딱 넘어가니 실핏줄을 타고 올라가 머리를 깨우는 도다. 중국 사람들이 음식을 튀기고 볶고 익혀서 먹는 걸 그리 좋아하지만 콜레스테롤을 걱정하지 않는 것도 파로 쌈 싸 먹고 양파를 날로 먹은 습관 때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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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내리거든 식구들끼리 부추전 한번 부쳐보자. ⓒ 김규환

우린 마늘로 다져졌기에 다행이지만 이도 저도 아니면 쓴 나물 몇 가지 더 올려 계절 변화에 따라 미각을 전환하는 지혜를 발휘하면 된다. 봄나물 동무들 중 대표적인 씀바귀, 고들빼기, 취나물, 상추, 돌미나리, 두릅, 엄나무싹, 오갈피싹, 쑥, 머위 따위가 쓰지 않은 것이 없다.

왜일까? 달달한 것보다 쓰디쓴 것에 몸에 좋은 비타민과 철분 등 각종 미네랄이 고루 들어 있어 우리 몸을 일깨우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 여기에 야생 나무 몇 가지 줄기를 잘라 약 단밥을 만들어 마시면 쌉싸래한 맛에 절로 입맛이 돌고 올 한 해를 잘 헤쳐나갈 원기를 제공한다.

모든 건 자연에 있다. 피로가 풀리지 않거든 다섯 꽃잎 매단 벚꽃으로 술을 담가 꾸준히 마시면 보릿고개 넘길 힘도 생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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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들로 산으로 나가 봄의 향취를 불러들여 몸을 일깨울 때다. ⓒ 김규환

바야흐로 파, 마늘, 양파, 부추, 명이나물, 달래 향이 그득하니 이것 몇 번 먹으면 스태미나 식품으로도 좋으니 꿩 먹고 알 먹는 격이다.

고향 뜰로 찾아가면 금상첨화 널려 있으니 늙고 힘 없고 외로우신 부모님 찾아뵙는 일만으로도 운동이 부족함이 없지만 택배로 부쳐주신 정성 날름 받아먹기 송구스럽다. 마침 고추두둑 만들 때니 나물만 축내지 말고 손자손녀 보여줄 겸 가서 안 쓰던 근육 놀리면 이 얼마나 좋을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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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땅에 심어진 파가 겨울옷을 벗을 채비를 하고 향을 가득 머금고 있다. 이 때라야 가장 맛있는 파를 먹어볼 수 있으니 서둘러야 한다. ⓒ 김규환

덧붙이는 글 | 김규환 기자는 <잃어버린 고향풍경1>(하이미디어 刊)을 냈다.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cafe.daum.net/hongaclub)대표이다. 올 연말 쯤 전남 화순 백아산으로 귀향하여 산나물 백화점 <산채원 山菜園>(cafe.daum.net/sanchaewon)을 만들 꿈을 현실화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김규환 기자는 <잃어버린 고향풍경1>(하이미디어 刊)을 냈다.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cafe.daum.net/hongaclub)대표이다. 올 연말 쯤 전남 화순 백아산으로 귀향하여 산나물 백화점 <산채원 山菜園>(cafe.daum.net/sanchaewon)을 만들 꿈을 현실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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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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