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라일락꽃 그늘 아래 - 48회(8부 : 푸른 낙엽)

첫사랑은 아픈 거예요

등록 2005.05.01 09:29수정 2005.05.0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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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포  / 그림 제공 : 이정남 화백
창포 / 그림 제공 : 이정남 화백김형태


5월초. 아버지가 계신 병원에 들렀다 집으로 가보니, 초희가 우리 집 대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깐만 시간을 내달란다. 할말이 있단다. 잠깐만? 잠깐만이 아니라 밤을 새워서라도 그녀와 얘기하고 싶은 것이 나의 속 타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내색하지 않은 채 그냥 돌아가라고 매몰차게 말했다.


그리고는 나의 방으로 향했다.

"철민씨가 어떻게 나한테 이렇게까지 모질게 할 수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나의 뒤통수를 때리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온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엉엉 울어 버렸다. 한참이 지난 후에 창문 틈으로 보니 그녀는 여전히 대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나가고 싶었다.

나가서 그녀를 데리고 들어오고 싶었다. 그러나 참았다. 여기서 무너지면 지금까지 공들인 모든 일이 한순간에 깨져 버린다고 생각했다. 이 고비만 잘 넘기자 그런 마음으로 이겨내고 있었다.

그녀는 벌써 며칠째 나의 집 앞에서 나와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번번이 그녀를 차갑게 물리쳤다. 마음이 아팠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그녀를 위한 참길이라고 여겼기에.


내가 귀뜸을 해주어서일까? 두 번인가는 노진이 우리 집에 우연히 놀러오는 척하면서 그녀를 설득해서 데리고 갔다.




멍울진 진주 2

너의 구심력과
나의 원심력 사이에서
갈 곳 몰라 방황하는
사랑의 미리내



라일락꽃그늘 아래에서


라일락 꽃잎의 진한 향기에 취해
선풍기 머리 뒤에 바람이 빨려가듯
몽유환자 되어 그 꽃그늘 아래에 서면
마음의 촉수를 통해 아련히 피어오르는
그대와의 추억

첫사랑은 라일락 잎사귀를 깨물 때의 뒷맛처럼
아리고 쓴 것이라고 그대가 말했던가
그대만 생각하면 괜시리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심혼(心魂)이 저려오며
혼자 남겨졌다는 고독에 찬바람 앞에 선다
아, 이 아픈 기억을 씻어 줄 한 자락의 비라도 내렸으면

라일락 꽃향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 무성한 향기로 사람을 취하게 하건만
그대의 따뜻한 손과
빛나는 눈동자,
그리고 감미로운 입술은
지금은 어디에

내 마음의 동산에 처음으로 사랑의 불을 지핀 그대이기에
오월만 되면 도지는 지병처럼 라일락꽃그늘을 헤매돈다

아, 이맘때면 어김없이 일어서서
열병처럼 앓아눕는 촉망상심!



대통령의 '4.13 호헌 조치'로 인해 온 대학가가 집회와 시위로 들끓기 시작했다.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 만무했다. 강의실엔 20%도 안 되는 소수의 학생들만이 강의를 듣고 있었다. 이러다간 모두 출석미달로 유급을 당할 처지였다. 그러나 시위에 참가하는 학생들 어느 누구도 그것을 걱정하는 이는 없었다.

'광주 만행의 원흉! 전두환 노태우를 처단하자'는 현수막까지 내걸렸다. 시위는 점점 과격해져 시내 진출은 물론 도청 앞 또는 대전역 앞에서 기습시위도 벌어졌다.

시위 진압 차량이 화염병에 전소되고, 시위 진압 전경들이 시위대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고, 또 벌써 몇 개의 파출소가 화염병에 맞아 유리창이 깨지거나 기물이 파손되었는지 모른다.

대학 교수들 뿐만 아니라 종교인, 예술가 등의 시국선언문도 연이어 발표되었다. 전에는 시위를 하는 학생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던 일반시민들도 이번에는 박수를 쳐주고, 빵이나 음료수를 사주는 등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저 방관자처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집회와 시위가 벌어지는 현장마다 초희의 얼굴이 보였다. 그것도 늘 맨 앞자리에 있었다.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나쁜 일도 아니고 의로운 일인데 말릴 수도 없었다.

여자도 역사와 시대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하며 그녀를 시위 현장에 동참시켰던 내가 이제 와서 그러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그런 것을 떠나서 이제는 내가 그녀에게 이래라 저래라 상관하고 간섭할 입장이나 위치에 있지도 못했다. 그저 우려 섞인 눈길로 바라볼 수밖에.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 이후 정국은 급속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거기에 엎친 데 겹친 격으로 6월 9일, 시위 도중 이한열군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지자 정국은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최악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고 있었다.

캠퍼스뿐만 아니라 주요 대도시가 돌과 쇠파이프, 화염병, 최루탄 가스로 뒤덮였다. 매일같이 계속되는 대규모의 집회와 시위로 정국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혼란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고 있었다.

곧 계엄령이 선포될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소문처럼 떠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무서운 소문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좀처럼 수그러들기는커녕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가기만 했다.

대학생들은 오전에는 모여 시국 토론과 탈춤, 연극 등을 공연하고 오후에는 캠퍼스 곳곳을 돌며 소위 민중가요를 목 터지게 외치며 학생들의 동참을 요구했다.

학생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들면 거창한 출정식을 갖고 마침내 큰 대열을 이루어 교문 밖으로 진출했다. 저녁 늦게까지 격돌을 벌인 그들은 밤이 되면 다시 캠퍼스로 되돌아와 학생회관에서 밤샘농성을 하였다.


물망초 1

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처럼
세월이란 차에 오르면
너의 얼굴이 지워질까?


물망초 2

내가 두 손을 내밀기만 하면
언제라도 달려올 당신이지만

당신의 행복을 위해
당신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까닭에
사랑을 짓눌러야 하는 이 아픔 이 쓰라림

지금 내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
아니 발기발기 찢겨져 가고 있습니다


물망초 3

밤새도록 창문을 때리는 저 빗줄기
그것은 전율처럼 내 몸을 더듬고 다니는
당신의 목소리입니다

도대체 나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 독자 여러분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49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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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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