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라일락꽃 그늘 아래 - 49회(8부 : 푸른 낙엽)

첫사랑은 아픈 거예요

등록 2005.05.04 16:54수정 2005.05.04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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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지 / 그림 제공 : 이정남 화백
도라지 / 그림 제공 : 이정남 화백김형태
물망초 4

결혼만이 사랑을 이루는
단 하나의 방법은 아니다
때로는 이별이 사랑을 완성하는
더 좋은 방법일 수 있음을 깨닫는다


물망초 8

노랗고 빨간 단풍 잎새를
하나씩 하나씩 책 속에 끼워 넣듯이
이젠 너를 책갈피에 실어
나의 푸른 책장에 접어 두련다

생각나면 언제나
겨울에도 봄에도 여름에도
그 책갈피의 낙엽에서
애틋한 가을을 호흡하듯이
추억처럼 너의 향긋한 내음을 맡을 수 있게

물망초 9

떨어지는 홍엽처럼
너를 잊어야 할 때다
너를 향한 나의 뜨거운 해바라기를
이제는 꺾어 버려야 한다


어떻게 하면 너를
낙엽처럼, 안개처럼, 이슬처럼 떠나보낼 수 있을까?

일기장과 연습장 그리고 수북이 쌓여있는 저 편지는
불에 태우면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리겠지만


아직도 내 속에 살아 있는 너의 얼굴은
대체 무엇으로 지워버리나

물망초 10

너를 잃고 난 뒤
점점 커져가는 나의 그림자
언제쯤 저 그림자는 닳고 닳아서
헐렁헐렁
헐렁거릴까?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꽉 물고
치떠 본 하늘

그러나
대신 하늘이 시퍼렇게 멍울져
울고 있었다
너무 커서 들리지 않을
오열로…


6월 5일. 가뭄 끝에 모처럼 비가 오고 있었다. 그날도 병원에 계신 아버지에게 갔다가 저녁 무렵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집 앞에 도착해 보니 초희가 서 있었다. 우산도 없이 오는 비를 다 맞아가면서. 나는 갈등이 일었다.

그녀를 외면해야 하는지 아니면 갖고 있던 우산을 씌워 주어야 하는지. 이것이 마지막 고비다 싶어 그냥 스치듯 지나쳤다. 지난번에도 비를 맞고 서 있기에 우산을 가져다 줄까 말까 고민하다 외면했었다.

그렇게 서 있던 그녀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지쳤는지, 포기했는지 가고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러려니 했다. 방으로 들어와 나는 옷을 갈아입고 대충 씻었다. 그리고 나서 밖을 내다보니 여전히 그녀가 비를 맞고 서 있었다.

한참을 나도 창 틈 사이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비는 하염없이 내려 그녀의 머리와 얼굴과 어깨와 등을 사정없이 휘갈기고 있었다. 오는 비를 다 맞을 것처럼 그녀는 그렇게 장승처럼 서 있었다. 그녀의 몸을 통해 흘러내리는 빗물이 마치 그녀가 흘리는 눈물처럼 보였다.

더 이상은 차마 지켜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신발도 신지 않고 달려 나갔다. 그리고 말없이 그녀를 내 방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그렇다고 그녀와 다시 어떻게 해보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비를 맞다가는 병이라도 들까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옷이나 갈아입힌 다음 우산을 씌워 다시 보내리라 그렇게 마음먹었다. 방안은 순식간에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는 빗물로 인해 흥건했다. 나는 수건 몇 장과 전에 할머니께서 놓고 가신 속옷과 그리고 나의 체육복을 그녀에게 건넸다. 그리고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비는 멈출 줄을 모르고 쏟아지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비가 더 내린다면 이번 비는 단비가 아니라 농사를 망치는 쓴비가 될 것만 같았다. 나는 그녀가 이제는 옷을 갈아입었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방문을 열었다. 그랬다가 그만 못 볼 것을 보고 눈을 감고 말았다. 그녀가 알몸인 채로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의 눈을 가린 채 옷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러느냐고 물었다. 정말 오랜만에 그녀에게 건네는 말이었다. 그녀는 나의 물음에 답을 하지 않은 채 여전히 눈물만 퍼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에게로 와서 나의 목을 그녀의 두 손으로 감았다. 나는 그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이번에는 얼굴을 내 가슴에 묻더니 역시 울먹였다. 나도 울음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느라고 혼났다.

"생각해봤어요. 철민씨 말대로 헤어질까도. 하지만 역시 아니었어요. 철민씨 없는 삶은 의미가 없어요. 그러니 제발 나를 다시는 쫓아내지 말아요. 이제는 내가 나가지 않을 거예요. 오늘부터 여기서 살 거라고요. 많은 거 요구하지 않을 게요. 그냥 이렇게 철민씨 옆에 있게만 해줘요. 네 철민씨."

그녀의 말에 나도 참지 못하고 그만 눈물이 터져 나와 두 뺨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나의 체육복 상의를 끌어 당겨 그녀의 몸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이러지마 초희야, 이러면 상처만 더 깊어지고 결국은 불행해질 거야."

"불행이라고 했어요? 나에게는 철민씨와 떨어져 있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은 없어요. 그러니 제발 다시 시작해요 우리. 내가 더 잘할 게요. 몇 배로 노력할 게요. 철민씨 하라는 대로 다할 게요. 그러니까 제발 헤어지자는 말만하지 말아요."

그러면서 그녀는 내가 좀 전에 덮어주었던 체육복 상의를 벗어 던지고 그대로 바닥에 누웠다. 그리고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우윳빛 속살로 인해 온방이 다 환해졌다.

"철민씨 나를 가져요. 전에 갖고 싶다고 했잖아요. 2년 전 여기에서 철민씨가 나를 요구했을 때 그때 들어주었다면 우리가 헤어지는 일은 없었을 텐데. 내가 어리석었어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어서요. 철민씨 말대로 우리 서로 사랑하잖아요. 문제될 게 뭐 있어요. 철민씨가 요구하는 것이라면 더한 것도 들어줄 수 있어요. 어서요, 빨리!"

"초희, 이게 무슨 짓이야. 제발 이러지마. 이러지 말라고! 이런다고 달라질 건 하나도 없어. 너를 떠나보내는 나는 속이 편한 줄 알아. 나도 피눈물이 난다고 피눈물이…."

"그러니 우리 헤어지지 말고 같이 살아요. 나를 사랑한다면서 왜 나를 받아주지 않고 왜 자꾸만 내치려고 하냔 말이에요."

나는 어린애처럼 울면서 보채는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수건으로 젖은 몸을 대충 닦아주고 속옷부터 겉옷까지 하나하나 챙겨서 입혀 주었다. 그녀는 간난아이처럼 내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덧붙이는 글 | * 독자 여러분의 사랑에 감사 드립니다. 50회에서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독자 여러분의 사랑에 감사 드립니다. 50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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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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