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깨끼!" ... "하드여~"

[동무들의 악다구니 6]입에 들락날락, 흐르는 물도 쭉쭉 빨아댔지

등록 2005.06.07 12:31수정 2005.06.07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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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빠리 자전거에 아이스박스 싣고 산길을 오르던 아저씨 고맙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맛난 것을 주셨습니다.
짐빠리 자전거에 아이스박스 싣고 산길을 오르던 아저씨 고맙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맛난 것을 주셨습니다.김용철
까까머리라 이글거리는 햇볕에 현기증이 난다. 어찌나 어질어질하던지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다. 콧잔등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다. 이런 날이라면 부사리 불알도 축 처져 있을 게 분명하다.


메고 있던 책보마저 풀어버리고 싶다. 오동나무 잎 하나 따서 양산으로 쓰면 좋으련만 구불구불한 논가엔 잡풀만 무성할 뿐 뙤약볕을 가릴 엄두를 내지 못한다. 좔좔 흐르는 개울에 머리를 숙여 한바탕 끼얹으니 한결 살맛이 났다.

더위도 잊은 개미가 부지런히 식량을 나른다. 하얀 밥테기가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저걸 주워 먹어볼까?' 뱀딸기도 축 늘어져 있다. 열매가 유난히 붉어 보인다.

환미(幻味)일까. 고추와 향긋한 오이냄새가 뒤섞여 코를 간질인다. 풋내가 지독히 허기를 자극한다. 소낙비라도 한 번 내려줘야지 밭곡식은 물론이거니와 천수답 논이고 보에서 가까워 물을 대놓은 벼도 잎이 말라비틀어지듯 맥이 없다.

하교 길에 질경이와 웬만해선 소에게 베어 먹이지 않던 '말풀'이 신작로에 깔려 있다. 질경이 꽃자루는 길게 목을 내밀고 씨를 머금고 있다. 반바지를 입고 삼삼오오 책보를 메고 돌부리와 풀을 걷어차며 나른한 오후에 찌든 2학년 아이들이 길 한가운데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야, 우리 놀다 가자."
"언넝 가서 깔 벼야 된디…."
"떠와서(더워서) 못 볌마(베어 임마). 이따가 해름판(해거름)에 벼 오면 되잖어."


다른 아이가 거들었다.

"낮잠 자기도 심들것구먼(힘들겠구만)."
"포리(파리)도 장난이 아녀."
"울 집 변소엔 구데기(구더기)가 드글거려. 아부지한테 살충제라도 쳐라고 해야지 원."
"오동잎 세 장 넣으면 다 죽는다드라."
"그쿠나."


질경이 목을 뽑아 서로 걸어 한 명씩 해치우기 시작했다. 요령을 아는 아이는 뽑을 때부터 남다르다. 밑동까지 뽑아 하얀 속살이 드러난 아랫부분을 상대방 중간쯤에 걸어 두 손으로 쭈욱 당기면 여지없이 끊어지고 만다.

성호가 벌써 다섯 명을 해치웠다. 순서도 없이 마지막에 당겨서 이기면 그만이다. 그때 형근이가 질겨서 낫으로 베기도 힘든 긴 말풀을 묶고 있다. 지나던 사람이 토끼 덫처럼 발에 걸려 넘어지면 얼마나 통쾌했던가. 무던하던 아이가 오랜 시합 끝에 알아차린 듯 기어가는 목소리로 항의를 한다. 생전 처음이었다.

"야 색꺄! 고로코롬허면 되간디…."
"뭣이 어쨌다고 그냐? 글면 형관이 너도 그렇게 혀. 글도 내가 이길 꺼여."
"성호 니가 잘못했응께 앞으로 글지마라."

공정한 게임이 시작되기 전에 문드러진 성호 질경이 줄기가 명을 다한 건지 툭 끊어지고 만다. 구절양장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오면서 나른한 오후를 즐기고 있었지만 배도 고픈데다 기력이 없어 까만 고무신을 질질 끌며 마지못해 집을 향해 간다. 맨발의 청춘들이 신은 검정고무신은 흙과 고무, 발바닥 땀이 뒤섞여 새까맣기 그지없고 걸핏하면 미끄러지고 벗겨지기 일쑤다.

철길도 엿가락처럼 녹이던 폭염에 지칠 대로 지쳐 있는데 "착착착착 철철철철" 신기하게 가위를 움직이며 찰 달라붙는 갱엿에 하얀 쌀엿을 끌을 대고 "탁! 탁! 탁탁!" 쳐대던 엿장수가 올리는 만무하다.

집에 도착해서는 허기를 채우느라 보리와 갖은 잡곡을 빻아 만든 미숫가루 서너 숟가락 넣고 사카린 두세 개 물에 녹여 훌훌 저어 먹던 게 유일한 낙이었던 우리네 입도 도회지에서 온 뭔가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길게 뽑아 "하드여~" 하다가 "하~드!" 하며 짤막하게 끝마친다.

동구 밖에서 시작하여 서너 명이 나올 때까지만 아저씨 왔노라고 하면 동네방네 소문이 쫘악 퍼지고 마니 그 뒤론 '짐빠리' 자전거를 회관 앞이나 서울 명동 롯데백화점 앞쯤에 발판 스프링을 팍 차서 감나무 그늘에 세워 두면 바퀴가 느긋하게 '차르르 차르르' 소리를 내며 햇살에 하얗게 웃고 있다.

'하드'라는 아름답고 달착지근한 외침은 닭울음소리만 간간히 들릴 뿐 폭염에 휩싸인 마을엔 열광의 도가니를 식혀주는 단비와 같은 소리다. 깍정이에 한 겨울 사카린을 녹여 장독대 위에 두고 나무 막대기 꽂아 "달고나!" 하며 먹어대던 시절 구세주가 따로 없다.

이때 어른들은 하루 한 짬을 쉬지 않고 들일을 나가 김매느라 허리가 휘고 뼈마디마디가 윤활유가 부족하여 마찰이 심해지는 고된 농사일에 매달려 있다. 아이들에겐 절호의 기회다. 집안 기둥뿌리 빼고 모두 갖다 바치면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하드-아이스깨끼를 주니 단것에 목말라 있던 시골뜨기에겐 신이 내린 선물이다.

비료부대를 찾으려고 헛간을 뒤졌다. 외양간 위에도 올라갔다. 창고로 쓰는 어둠침침한 광에 들어가도 보았다. 당시 집으로 들어온 건 아무것도 허투루 버리는 일이 없던 어른들은 비닐도 등급을 매겨 차곡차곡 분리를 해놓을 정도로 살림에 각단이 있었다. 구멍 뚫린 것이 한두 개 나돌아 다닐 법 하지만 이미 고물장수 노릇까지 했던 엿장수에게 갖다 바친 지 오래다.

훔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비닐포대 2장을 가져가면 한 개를 줬던 아저씨. 두엄자리에서 간신히 한 장을 꺼내 씼었지만 나머지 한 개는 어쩐다지? 애가 달았다. 아이들이 몰려들지 않으면 옆 마을로 발길을 언제 돌릴지 몰라 급해졌다. 한 개를 들고 무작정 밖으로 뛰었다.

꼴을 베다보면 사정을 훤히 안다. 마을 앞 물고랑에 뱀이 뚫어 놓은 자리를 메우기 위해 어디에 비닐포대가 있는지를.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다리거리 밑에 서너 장 중 한 장을 쭉 잡아당겼다. 흙과 함께 딸려 나온다. 물이 봇도랑으로 콸콸 쏟아져 방천이 날 지경이었다.

'옳지 됐어. 요거야 틀어 막아불면 되제.'

풀을 뜯어 머리통이 들어갈 만한 큼지막한 구멍에 넣고 진흙을 쑤셔 넣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관 앞으로 달렸다. 아이들 대여섯 명이 모여 있고 몇 명은 고샅을 빠져 나오고 있었다.

벌써 동지죽 국물을 얼려놓은 듯 팥 껍질이 듬성듬성 들어 있는 하드를 두 개 들고서 해섭이가 더럽게 입에 넣어다 뺐다를 반복한다. 귀한 집 막둥이는 용돈을 들고 오면 그만이다. 행여 누구라도 뺏어 먹을까봐 침을 칠해 놓은 것이라기보다 원래 그렇게 먹던 아이였다. 두고두고 먹으려면 조금씩 녹여서 바닥에 질질 흐르는 게 아깝기는 하지만 도리가 없었다. 한 모금 먹고 또 빨아 말랑말랑해질 때까지 몽창 밀어 넣었다가 다시 빨아댄다.

나도 얼른 비닐포대를 아저씨께 드렸다.

"깨끼 줏쇼!"

키가 작은 우리들은 신기한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없었다. 스티로폼 박스를 살짝 밀치고 하나를 꺼내신다.

"옛다."

시누대에 꽂힌 동그란 아이스깨끼는 1학년이던 지난해 8월에 먹어보고 처음이다. 학교 앞 점방에서도 팔지 않던 꿀맛 덩어리다. 딴에는 얌전하게 먹는다고 입에 조금씩만 넣었다 뺐다. 아까웠지만 조금 베어 먹어도 보았다.

이가 무척 시렸다. 팥도 씹혔다. 입천장이 시원해지더니 목울대를 반쯤은 얼려 놓은 듯 얼얼하다. 환상으로 빨려들어 가는 맛에 반해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니 하나 더 먹고 싶은 맘 간절하여 아저씨께 물었다.

"아자씨, 긍께로 거시기 뭐시다냐 음…."
"뭐?"
"딴 게 아니고라우, 양재기도 받는다요?"
"그럼."
"글면 째까만 지달리쇼. 절대로 그냥 가시면 안돼라우. 알았지라우?"
"걱정 말고 댕겨오니라."

엿장수 아저씨. 엿치기도 뺄 수 없는 재미였지요.
엿장수 아저씨. 엿치기도 뺄 수 없는 재미였지요.김용철
그래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손님이 없으면 나 혼자 보고 마냥 기다리기도 그렇잖은가. 집 뒤뜰로 가서 보습이며 밥 그릇 찌그러진 것, 양재기를 주섬주섬 삼태기에 담았다. 땅에 묻힌 녹슨 숟가락도 보였다.

"아자씨!"

숨을 할딱거리며 삼태기째 내놓았다. 멀리서 코흘리개 꼬마들은 깨진 플라스틱 바가지와 할머니가 쓰던 요강을 들고 나온다. 집에서 쓰고 있던 놋그릇도 보였다. 요모조모 골라보더니,

"이건 아녀. 양은은 쇳덩어리가 아닌께 도로 가져가."
"왜라우?"
"잉, 요따우는 쇠가 아니랑께."

무쇠와 비철을 구분할 줄 알게 된 것은 그 일이 있은 뒤로 한참 뒤였다. 더 가져올 게 없는지라 한쪽에 챙겨두고 아쉬움에 치를 떨었다. 허탈한 나머지 처음에 샀던 걸 찬찬히 먹을 걸 그랬다는 후회를 해도 이미 지난 일이었다.

바람 한 점 없어 어찌나 더운지 아이스박스도 땀을 졸졸 흘리고 있었다. 안팎 기온차이로 성에가 녹아내린 물이다. 아쉬움에 어쩔 줄 몰라 혀로 입술을 훔치던 까맣게 배꼽 때가 낀 아이들은 집채만한 자전거 옆으로 살금살금 모여든다.

"야 내가 먼처 섰잖아."
"아따매. 그만 밀쳐야."
"내 차려잖녀?"
"아까 니가 딴데 갔다 왔잖어."

순간 예닐곱 명이 실랑이를 벌이는 통에 기우뚱 자전거가 움직인다.

"얌마들아 자전거 넘어지겠다. 줄 서서 지달려야제. 니기들 학상(학상) 아니냐?"

줄줄이 서서 대기하고 있는 아이들은 시원한 추억을 파는 아저씨 지시에 따라 작은 아이부터 아무 맛대가리도 없는 줄줄 새는 물을 두 번씩 쭉쭉 빨아댔다. 맹물이었지만 시원한 맛에 먹어보는 것이다. 숫기가 없었던 나는 두 번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힘 있던 아이 두어 명은 다시 빨아 먹고는 신이 나 있다.

아이들 발길이 뜸하자 옆 마을로 떠날 채비를 한다.

이구동성으로 "아저씨 낼 오시제라우?" 물으니 "낼은 딴 데로 가봐야 됭께 모레 올 것이여!" 하시고는 양지마을을 떠나갔다. 넋이 나간 듯 꽁무니를 쳐다보는 아이들에겐 둘도 없는 그리움이었다.

덧붙이는 글 | <산채원> 예정지인 고향 화순에 내려가서 죽순도 꺾어오고 딸기 오디도 따먹었습니다. 죽순을 같이 나눠 먹고 싶습니다. 제 연락처는 011-9043-4549입니다.

덧붙이는 글 <산채원> 예정지인 고향 화순에 내려가서 죽순도 꺾어오고 딸기 오디도 따먹었습니다. 죽순을 같이 나눠 먹고 싶습니다. 제 연락처는 011-9043-4549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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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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