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놈의 망구가 왜 안 온다냐"

낙안읍성 노부부의 초여름날 스케치

등록 2005.07.07 14:21수정 2005.07.07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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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낙안읍성 빙기등 아래 헛간 옆, 자두나무에 자두가 익어가고 있다.

낙안읍성 빙기등 아래 헛간 옆, 자두나무에 자두가 익어가고 있다. ⓒ 서정일

낙안읍성 빙기등 아래, 헛간 주위에 자두나무 하나가 있다. 근처에 살고 있는 이옥례 할머니는 세숫대야를 옆에 끼고 긴 장대를 들고 자두나무로 향한다. 얼마 전부터 자두가 먹고 싶다고 보채는 할아버지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나무에 가 보니 아직은 설익었다. 실망하는 빛이 영력하다.


"이번 비에 많이 익었을 줄 알았는디…."

a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자두를 줍기 위해 숲을 헤치고 있는 할머니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자두를 줍기 위해 숲을 헤치고 있는 할머니 ⓒ 서정일

할머니는 혼잣말을 내뱉는다. 그리고 행여 떨어진 게 있을까 하고 주위를 두리번 거린다. 풀 속에 숨어 있는 것, 처마 밑에 들어가 꼭지만 내놓고 있는 것, 찾아 보니 제법 된다. 사실 칠십 평생을 살아온 할머니의 눈을 섣부른 자두가 피해갈 리 없다.

긴 장대를 담장에 걸쳐 놓고 가져간 세숫대야를 땅에 내려 놓은 후 흩어져 있는 자두를 한 곳에 모은다. 처음엔 한두 개 정도인 줄 알았는데 모으고 보니 꽤 된다. 금세 세숫대야가 가득하다. 개중엔 더러 익지 않은 게 있는데 그래도 가져다 놓으면 익겠지 하는 맘으로 전부를 담는다.

"할머니, 뭐예요?"

평일이라 찾아오는 관람객들이 적은 편이지만 서울에서 왔다는 한 가족의 꼬마아이가 신기한 듯 할머니에게 묻는다. 그런데 할머니는 이름 대신에 한 움큼 자두를 집어 꼬마에게 쥐어 준다.


하지만 옆에 서서 수줍은 듯 바라보던 여동생의 표정은 뾰루뚱해진다. 눈치가 이상해서인지 할머니는 다시 한 움큼 집어 그 여동생에게도 쥐어 준다. 고맙다고 인사하고 싱글벙글 떠나는 가족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흐뭇해하지만 씻어 당장 먹을 수 있는 것만을 줬으니 남은 건 푸르딩딩한 설익은 것들뿐이다.

a 관람객들에게 나눠 줬더니 할아버지에게 가져 갈 자두가 없어 할 수 없이 장대를 들고 나무가지를 흔든다.

관람객들에게 나눠 줬더니 할아버지에게 가져 갈 자두가 없어 할 수 없이 장대를 들고 나무가지를 흔든다. ⓒ 서정일

할 수 없이 담장에 걸쳐 놓았던 장대를 들어 이리저리 가지를 휘젓는다. 자두는 한여름날 소낙비 오듯 후드득거리며 세차게 떨어진다. 다시 한번 흩어져 있는 것들을 주워 담는다. 어떤 것은 땅에 떨어지면서 짓무른 것도 있고 어떤 것은 나중에 떨어지면서 할머니의 허리를 친다.


"에구, 지들도 화가 나는갑다."

나뭇가지에 붙어 있다가 장대에 맞아 억지로 떨어지며 심술을 부리는 꼬마 자두에게 한마디 말을 건넨다. 다시 가지에 붙일 수만 있으면 붙여 놓으련만 그러지 못하니 미안해서인지 허리를 아프게 한 그놈은 넌지시 처마 밑으로 밀어 넣어 놓고 다른 것들만 줍는다.

a 할머니가 없으면 안절부절하는 할아버지는 오늘도 할머니의 외출을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

할머니가 없으면 안절부절하는 할아버지는 오늘도 할머니의 외출을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 ⓒ 서정일

할아버지는 안절부절 못한다. 금방 다녀올 줄 알았는데 시간이 많이 흘렀기 때문이다. 마당을 서성이다가 평상에 앉았다가 시계를 쳐다보다가 구시렁 구시렁 한다. 할머니가 문밖을 나가기라도 하는 날이면 마음이 늘 편치 않았던 할아버지. 오늘도 마찬가지다.

사실 10여 년 전부터 중풍을 앓고 있기에 할머니가 곁에 없으면 좌불안석이다. 또 다시 마당을 서성이다 이윽고 평상에 걸터앉으며 푸념 섞인 말을 내 뱉는다.

"이놈의 망구가 왜 안온다냐."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말이다. 속으론 잠시도 떨어져서는 안될 만큼 할머니를 생각하면서도 겉으로 '이놈의 망구'라고 거침없이 소리치며 화를 내는 김 할아버지. 사회 생활을 하면서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을 '이중인격'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보면 김 할아버지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할아버지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할아버지의 속마음이 무엇인지를….

이윽고 문 밖에 인기척이 있다. 할머니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린다. 노부부만이 살아가는 외로운 단칸 초가집. 병마와 싸우고 있는 할아버지 곁을 말없이 지키며 며칠 전부터 할아버지가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자두를 따오는 할머니.

a 궁시렁 궁시렁 잔소리를 하던 할아버지는 빨간 자두를 두고 멀찌감치 물러나 심술을 부리고 있다

궁시렁 궁시렁 잔소리를 하던 할아버지는 빨간 자두를 두고 멀찌감치 물러나 심술을 부리고 있다 ⓒ 서정일

궁시렁 궁시렁 하는 소리를 듣고 있는 건지, 무시하는 건지 할머니는 잠자코 부엌으로 향한다. 그리고 설익은 것들을 따로 바구니에 담아 올려 놓고 잘 익은 것들만 골라 바가지에 담아 깨끗이 물로 씻는다.

"할아범, 자두 자셔."

할아버지를 향해 할머니는 자두를 내놓는다. 하지만 멀찌감치 앉아 심술을 부리는 할아버지. 그토록 먹고 싶다고 할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더니 막상 따오니 늦었다고 입에 대지 않는다. 잘 익은 빨간 자두가 바가지에 담겨 마루에 놓여져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한없이 바라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낙안읍성 www.nagan.or.kr

덧붙이는 글 낙안읍성 www.naga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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