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8시에야 깨어나는 스페인 마을

[산티아고 일기 4] 드디어 에스테야 도착

등록 2005.07.13 19:31수정 2005.07.15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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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쿠이 마을로 들어서는 순례자
시라쿠이 마을로 들어서는 순례자김남희

2005년 6월 24일 금요일 맑음
오늘 걸은 길 : 오바노스(Obanos)-푼테 라 레이나(Puente Ra Leina) 3킬로미터
오늘 쓴 돈 : 숙박 4유로 + 인터넷 1유로 + 볼펜 0.5유로 + 점심, 저녁 장 본 비용 6.65
유로 + 우표 두 장 1.56유로 + 전화 3유로 = 16.71 유로

눈을 뜨니 6시 반.늦었다.
아침 해 먹고 배낭 꾸려 길을 나서니 이미 7시 반. 오늘도 하늘은 청명하다. 어제 놓친 교회를 보러 갈까 망설이다 그냥 푼테 라 레이나를 향해 걷기 시작한다. 다시 아파오는 오른쪽 다리. 3킬로미터 걷고 나니 푼테 라 레이나. 오른쪽 무릎으로 인해 더 이상 갈 수가 없다.


결국 이곳 알베르게에 짐을 푼다. 알베르게는 빨라야 12시에나 문을 여는데, 절뚝거리는 내 다리를 본 아줌마가 들어와서 쉬라며 방을 내준다.

짐을 내려놓고 멍하니 다리를 내려다본다.내가 이 다리로 끝까지 걸을 수 있을까?
까를로스, 소냐, 마리안느, 로베르따…. 정들었던 사람들과도 이제 완전히 헤어져 다시 혼자다. 몸과 마음이 다 위축되어 있다.



근처 카페에서 아침 먹고, 동네를 한 바퀴 둘러보고 들어오니 그 새 사람들이 들어왔다. 옆 침대의 아줌마가 내 다리를 보더니 침대에 누우라고 한다. 내 팔과 발가락에 연고를 바른 후 정성껏 마사지를 해주신다. 중학생 조카를 데리고 남자친구와 함께 이 길을 걷고 있는 이태리인 아줌마, 말은 한 마디도 통하지 않지만 같은 길을 걷는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이미 친구다.

푼레 타 레이나의 다리. 11세기에 지어진 다리가 아직도 튼튼하게 서 있다.
푼레 타 레이나의 다리. 11세기에 지어진 다리가 아직도 튼튼하게 서 있다.김남희

성당 앞을 지나가는 순례자. 오후의 햇살에 지쳐 고개를 숙이고 걷고 있다. 에스테야
성당 앞을 지나가는 순례자. 오후의 햇살에 지쳐 고개를 숙이고 걷고 있다. 에스테야김남희
이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건네는 미소와 타인에 대한 조건 없는 친절.
내가 이 길에서 얻고 가는 최고의 것이 될 것 같다. 이 길에는 진정 신의 마음을 닮은(창세기에 나오는 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셨다는 구절은 그 외모보다는 내면, 신의 영혼을 닮음을 의미하는 걸 거라는 오강남 교수의 말은 정말 맞는 것 같다) 사람들이 걷고 있다.


식당에서 처음으로 같은 피부색깔과 비슷한 외모를 가진 사람들을 만났다. 프랑스인 여자 친구와 함께 여행 중인 중국인 따하이, 자전거로 혼자 여행하는 일본인 에이지, 프랑스에서부터 이미 800킬로미터를 걸어온 일본인 아줌마 미치코.

우린 다들 처음 만나는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서로 반갑다. 게다가 따하이는 내 짐을 일부 들어주겠다는 제안까지 해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 마음이 더워졌다.


위 침대의 마리아.
스웨덴에서 온 스물여덟 살 간호사.
부모는 핀란드인, 자기는 스웨덴사람인데 일은 노르웨이에서 하고 있단다.
사람들이 내게 보이는 궁금증을 그녀 역시 그대로 드러내며 말을 걸어왔다.

“어디서 왔니?”
“한국.”
“산티아고 걸으려고 온 거야?”
“응.”
“산티아고는 어떻게 알았어?”
“프랑스인 책을 읽고서.”
“대단하다. 끝까지 걸을 거야?”
“응. 무릎이 허락하는 한.”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녀가 들려주는 미국인 아줌마 레베카 이야기.
너무 재밌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배낭을 메고 다니는 그녀. 그 가방 안에는 엄청난 두께의 매트리스, 추석 선물세트크기의 화장품 가방, 병원을 차리고도 남을 구급약통, 일주일 내내 다른 옷으로 파티에 갈 수 있을 만큼의 의상 등등.

배낭 속 내용물의 압권은 다름 아닌 커다란 땅콩버터 한 병. 마리아는 그 배낭의 내용물이 너무나 재미있어 친구들에게 보여주려고 사진까지 찍었단다. 나 역시 그 사진을 들여다보니 웃음이 절로난다.

“전형적인 미국인이야. 겁 많고, 뭐든지 다 갖춰지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그 미국인 아줌마는 피레네 산맥을 넘던 첫날, 도로에 주저앉아 엉엉 울며 배낭 속의 물건을 하나씩 꺼내 집어 던졌단다. 마침내 앰뷸런스가 출동, 그녀의 내던져진 짐을 도로 배낭 속에 쑤셔 넣고, 그녀를 태우고 마을로 왔단다.

산 후안 성당. 에스테야.
산 후안 성당. 에스테야.김남희
알베르게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순례자. 휴지통에도 순례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에스테야.
알베르게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순례자. 휴지통에도 순례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에스테야.김남희
미국인 아줌마의 이야기를 교훈 삼아 나도 오늘 짐을 꾸렸다.
배낭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샤워젤도 빼고 (이제 빨래, 샤워, 세수 모두 비누 하나로 해야 한다) 가이드북 빼고는 유일한 책인 ‘도덕경’도 빼고, 선글라스도 빼고, 하다못해 지퍼백까지 뺐다. 2킬로그램은 줄인 것 같아 뿌듯해하며 우체국에 갔더니 오후에는 문을 안 연단다. 허탈해라.

2005년 6월 25일 토요일 맑음
오늘 걸은 길 : 푼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에스테야(Estella) 22킬로미터
오늘 쓴 돈 : 숙박 4유로 + 점심 4.6유로 + 주스 1.8유로 + 택시 배달 서비스 8유로+ 엽서 1세트 8.2유로=총 26.6 유로

옆 침대 아저씨가 새벽 두 시부터 삼십 분 간격으로 손전등을 켜대는 바람에 나도 덩달아 잠을 설쳤다. 결국 4시 45분이라는 믿기지 않는 시간에 일어났다. 어제 사다놓은 재료로 아침 해 먹고, 5시 반에 숙소를 나섰다. 나 혼자 걷는 어두운 골목길. 새벽 공기는 놀랍도록 서늘하다.

오늘은 배낭 없이 걷는 날.
마치 큰 반칙이라도 하는 듯 마음이 껄끄럽다. 하지만 끝까지 이 길을 가기 위한 조처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배낭 무게로 인한 부상자가 속출하는 이 길에서는 택시 회사들이 배낭을 옆 마을로 배달해주는 서비스를 하고 있다. 먼 옛날 아무런 짐도 없이 하루에 50~60킬로미터씩 걸으며 이 길을 갔을 순례자들을 생각하면 부끄럽기도 하지만, 살아서 이 길의 끝까지 가야한다는 압박감에 결국 짐을 맡기고 말았다.

황금색 밀밭, 시라쿠이 마을 가는 길.
황금색 밀밭, 시라쿠이 마을 가는 길.김남희
밀밭 사이를 가로지르며 걷는 길. 아침 햇살을 받은 밀밭이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문득 여우가 어린왕자에게 한 말이 생각난다.

“저기 밀밭을 봐. 난 밀은 먹지 않아. 밀은 나에게 아무 것도 생각나게 하지 않아. 하지만 넌 금빛 머리칼을 가졌으니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밀밭을 볼 때마다 난 너를 떠올리게 될 거야.”
지금 밀밭이 내게 떠올리는 건 뭘까? 금빛 머리칼을 가진 어린왕자 대신 떠오르는 얼굴 하나. 머리를 흔들며 애써 지우는 나.

밀밭 사이를 걸어 두 시간 만에 시라쿠이 마을에 도착했다. 로마시대의 돌길이 아직도 남아있는 예쁜 마을. 밀밭과 포도밭 사이를 걸어 언덕 위에 그림처럼 서 있는 마을로 진입. 그냥 가기 아쉽지만 갈 길이 멀기에 마을을 빠져나온다.

이제 길은 포도밭 사이로 이어진다. 갓난아기 손톱만한 포도알이 다 영글 무렵이면 나도 이 길의 끝에 서 있을까?

9시 반. 로르카(Lorca) 마을에 들어섰다. 가방도 없이, 휴식도 없이 걸었는데 4시간 동안 겨우 14킬로를 걸었다. 광장에서 밥을 먹고 있던 따하이와 리리가 나를 불렀다. 점심 먹고 가라고. 그들이 싸온 빵과 버터를 나눠 먹었다.

무릎의 통증은 여전하다.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오르막과 내리막은 너무나 고통스러워 한 발을 떼기가 두렵다. 12시. 드디어 에스테야 도착. 고난의 행군이 이로써 완료됐다. 다리야, 수고했다.

낮잠 자고 일어났는데도 짐이 안 와 걱정했는데, 산보하고 오니 짐이 와 있다. 그제야 씻고, 짐을 풀고, 빨래를 했다.

순례자들이 다리 위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에스테야
순례자들이 다리 위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에스테야김남희
스페인의 모든 마을이 아직 잠든 시간. 길을 나서는 순례자들. 에스테야
스페인의 모든 마을이 아직 잠든 시간. 길을 나서는 순례자들. 에스테야김남희
다리 때문에 의기소침한 요즘, 간절히 친구들의 응원이 필요한데 인터넷을 할 수가 없다. 스페인의 산골마을마다 인터넷이 된다기에 좋아했었는데 그림의 떡이다. 여기 인터넷은 자판기처럼 박스 안에 들어가 있어 우선 1유로를 넣어야지 20분을 쓸 수 있다.

막상 동전을 넣어보면 영어와 스페인어밖에 안 되고 언어변환을 할 수도 없다. USB 포트를 쓸 수도 없게끔 앞뒤가 다 막혀서 잠겨있다. 사진이나 원고 전송은 꿈도 꿀 수 없고, 편지를 읽을 수도 쓸 수도 없는 이런 말도 안 되는 환경이라니!

빨래하고 나서도 해가 중천이라 결국 다리를 질질 끌며 동네 산책을 다시 나섰다. 스페인의 마을들은 낮에는 죽은 듯 잠들었다가 저녁 8시가 넘어야 깨어난다. 건물의 모든 창문들은 덧문까지 꼭 닫혀 있다. 빛이 들어오는 걸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서란다. 낮 동안 그렇게 침묵 속에 닫혀 있던 마을이 밤이 올 무렵 깨어나 순식간에 활기를 되찾는 걸 보면 신기하기까지 하다.

스페인의 마을이 잠에서 깨어날 무렵 순례자들은 잠자리에 들고-보통 9시면 다들 잠자리에 든다-, 스페인의 마을이 아직 단잠에 빠져있는 새벽 5시에 우리는 깨어 다시 길을 나선다.
첨부파일 산티아고일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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