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들에게 전설처럼 회자되는 이라체 수도원의 수도꼭지. 왼쪽은 와인, 오른쪽은 물이 나온다(왼쪽). 붉은 와인이 줄줄 흐르는 수도꼭지를 보며 즐거워하는 순례자. 이라체김남희
일곱 시쯤 잠시 휴식. 아픈 다리만 아니라면 나는 얼마나 상쾌한 기분으로 이 아침을 즐기고 있을까? 인터넷도, 우체국도, 내 몸도, 아무것도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스페인. 나는 지금 시험에 든 걸까?
"난 지금 지팡이가 필요해. 정말 필요하다구. 오늘따라 길가에 나무토막 하나 보이지 않다니 너무한 거 아니야?"
중얼거리며 걷는 길.
아께스따라에서 만난 '산신령'
아께스따라는 마을에 들어섰다. 동네 입구에 러닝셔츠에 파란 작업복 차림의 할아버지가 앉아 계신다. 인사를 건넨다.
"부에노스 디아스(좋은 아침이에요.)"
"좋은 아침. 산티아고 가는 길인가?"
"씨(네)."
(여기까지는 완벽하게 알아듣고 스페인어로 답했다.)
"어디서 왔나? 중국 사람?"
"아니, 한국 사람이에요."
"북한? 남한?"
"남한요."
"내 인생에 여길 지나가는 한국 사람은 처음 봐. 근데 에스파냐어는 할 줄 알아?"
"아니요."
"아니, 스페인어도 못 하면서 스페인을 여행해? 욕 보네, 욕 봐. 근데, 다리는 왜 절어? 무릎 다쳤어?"
"예."
"지팡이가 하나 있어야겠네. 요로코롬 따라와 봐. 지팡이 하나 마련해줄테니."
"네."
(여기까지는 추리력과 상상력을 발휘했다.)
할아버지를 따라 좁은 골목을 지나 정원을 지나 창고 앞에 다다르니, 세상에, 지팡이용 나뭇단이 가득 쌓여 있다.
날씬하고 가벼운 놈을 고르더니 내 키에 맞춰 톱질까지 해주신다. 그런 후에는 손잡는 부분에 사포질까지 해주시는 할아버지. 그 모습은 완전히 산신령 그대로다.
걷는 법까지 시법으로 보여주시는 할아버지.
"요렇게 땅을 디딘 다음에 네 발을 띄는 거야. 그 다음에 다시 또 요놈으로 땅을 디디고. 알겄제?"
"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걸어. 어여 가."
아무래도 이 길에는 신이 지켜보고 계신 게 아닐까?
지팡이가 생기고 나니 그래도 힘이 좀 난다. 이제 주린 배를 채우는 일만 남았다.
9시가 다 되어 빌라 마요르(Villamayor)에 도착. 문이 열린 집으로 들어섰다. 카페인 줄 알고 들어간 곳이 알베르게였다.
아줌마가 내 배낭을 내려놓더니 "앉아서 밥 좀 먹고 가" 하신다. 하늘에서 누군가 나를 지켜보다가 아무래도 내가 무릎을 핑계 대며 중도하차할 것 같아 이렇게 기적을 마련해놓은 걸까?
뜨거운 차에 잼과 버터를 바른 바게트를 허겁지겁 먹어치운다. 주인아줌마는 영국에서 20년을 산 브라질 아줌마. 산티아고를 걷고 난 후 이 길에 매료돼 스페인에 정착, 이렇게 작은 알베르게를 운영하며 순례자들을 돕고 있었다.
이제는 배까지 든든하겠다, 걷는 일만 남았다. 오늘의 목적지인 로스 아르코스(Los Arcos)로 가는 남은 여정. 마지막 한 시간은 정말 주저앉고 싶었다. 그늘이라고는 한 점도 없는 땡볕에, 다리는 아프지, 물도 떨어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