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길은 신이 지켜보고 계신 게 틀림없어!

[산티아고 일기 5] 로스 아르코스에서 '멋진 식사'

등록 2005.07.20 15:13수정 2005.07.25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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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의 속도로 걷고 있는 나.
달팽이의 속도로 걷고 있는 나.김남희

2005년 6월 26일 일요일 맑음

오늘 쓴 돈 : 물 0.9 + 수프 0.9 + 숙소 6유로 + 기부 1유로= 9.5유로
오늘 걸은 길 : 에스테야(Estella) -로스 아르코스(Los Arcos) 21km



다섯 시에 일어나 복숭아 두 알과 율무차로 아침을 먹었다. 다섯 시 사십오 분에 출발. 날은 이제 밝아오고 있다.

오른쪽 무릎의 통증은 여전한데다 이제는 왼쪽 복숭아뼈까지 부어올랐다. 거의 달팽이의 속도로 걷는다.

30분쯤 걸었을까. 이라체(Irache) 수도원의 전설적인 수도꼭지가 나온다. 이 수도원의 수도꼭지는 왼쪽을 틀면 붉은 와인이 나오고, 오른쪽을 틀면 물이 나오는 걸로 유명하다. 역시 길 가던 순례자들이 다들 신기해하며 왼쪽 꼭지에 입을 댄다.

순례자들에게 전설처럼 회자되는 이라체 수도원의 수도꼭지. 왼쪽은 와인, 오른쪽은 물이 나온다(왼쪽). 붉은 와인이 줄줄 흐르는 수도꼭지를 보며 즐거워하는 순례자. 이라체
순례자들에게 전설처럼 회자되는 이라체 수도원의 수도꼭지. 왼쪽은 와인, 오른쪽은 물이 나온다(왼쪽). 붉은 와인이 줄줄 흐르는 수도꼭지를 보며 즐거워하는 순례자. 이라체김남희

일곱 시쯤 잠시 휴식. 아픈 다리만 아니라면 나는 얼마나 상쾌한 기분으로 이 아침을 즐기고 있을까? 인터넷도, 우체국도, 내 몸도, 아무것도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스페인. 나는 지금 시험에 든 걸까?

"난 지금 지팡이가 필요해. 정말 필요하다구. 오늘따라 길가에 나무토막 하나 보이지 않다니 너무한 거 아니야?"


중얼거리며 걷는 길.




아께스따라에서 만난 '산신령'

아께스따라는 마을에 들어섰다. 동네 입구에 러닝셔츠에 파란 작업복 차림의 할아버지가 앉아 계신다. 인사를 건넨다.

"부에노스 디아스(좋은 아침이에요.)"
"좋은 아침. 산티아고 가는 길인가?"
"씨(네)."
(여기까지는 완벽하게 알아듣고 스페인어로 답했다.)

"어디서 왔나? 중국 사람?"
"아니, 한국 사람이에요."
"북한? 남한?"
"남한요."
"내 인생에 여길 지나가는 한국 사람은 처음 봐. 근데 에스파냐어는 할 줄 알아?"
"아니요."
"아니, 스페인어도 못 하면서 스페인을 여행해? 욕 보네, 욕 봐. 근데, 다리는 왜 절어? 무릎 다쳤어?"
"예."
"지팡이가 하나 있어야겠네. 요로코롬 따라와 봐. 지팡이 하나 마련해줄테니."
"네."
(여기까지는 추리력과 상상력을 발휘했다.)

할아버지를 따라 좁은 골목을 지나 정원을 지나 창고 앞에 다다르니, 세상에, 지팡이용 나뭇단이 가득 쌓여 있다.

날씬하고 가벼운 놈을 고르더니 내 키에 맞춰 톱질까지 해주신다. 그런 후에는 손잡는 부분에 사포질까지 해주시는 할아버지. 그 모습은 완전히 산신령 그대로다.

걷는 법까지 시법으로 보여주시는 할아버지.

"요렇게 땅을 디딘 다음에 네 발을 띄는 거야. 그 다음에 다시 또 요놈으로 땅을 디디고. 알겄제?"
"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걸어. 어여 가."

아무래도 이 길에는 신이 지켜보고 계신 게 아닐까?

지팡이가 생기고 나니 그래도 힘이 좀 난다. 이제 주린 배를 채우는 일만 남았다.

9시가 다 되어 빌라 마요르(Villamayor)에 도착. 문이 열린 집으로 들어섰다. 카페인 줄 알고 들어간 곳이 알베르게였다.

아줌마가 내 배낭을 내려놓더니 "앉아서 밥 좀 먹고 가" 하신다. 하늘에서 누군가 나를 지켜보다가 아무래도 내가 무릎을 핑계 대며 중도하차할 것 같아 이렇게 기적을 마련해놓은 걸까?

뜨거운 차에 잼과 버터를 바른 바게트를 허겁지겁 먹어치운다. 주인아줌마는 영국에서 20년을 산 브라질 아줌마. 산티아고를 걷고 난 후 이 길에 매료돼 스페인에 정착, 이렇게 작은 알베르게를 운영하며 순례자들을 돕고 있었다.

이제는 배까지 든든하겠다, 걷는 일만 남았다. 오늘의 목적지인 로스 아르코스(Los Arcos)로 가는 남은 여정. 마지막 한 시간은 정말 주저앉고 싶었다. 그늘이라고는 한 점도 없는 땡볕에, 다리는 아프지, 물도 떨어졌지….

알베르게에서 순례자들이 저녁을 함께 나눈 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비아나
알베르게에서 순례자들이 저녁을 함께 나눈 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비아나김남희

내가 만난 '최고의 프랑스인들'과 저녁 한 끼

겨우 겨우 마을에 들어섰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알베르게를 지나 두 번째 알베르게로 오니 손님은 아직 한 명도 없다.

6유로라는 조금 비싼 가격 때문인가? 씻고, 빨래하고 난 후 슈퍼에서 아스파라거스 크림스프를 사다가 끓여먹었다.

두 시간쯤 자다가 온 몸의 통증과 열로 깼다. 아직 저녁 7시 반. 올케가 보내준 잣죽을 꺼내 끓여 먹었다. 심심하다. 김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생각해보니 국토종단 할 땐 얼마나 천국이었던가. 배낭도 너무나 가벼웠지, 다리도 안 아팠고, 방은 늘 독방이었지. 무엇보다 음식 걱정은 안 해도 됐었고, 말도 너무나 잘 통했고, 태양도 훨씬 순했으니. 그땐 전화도 있었는데, 여기선 인터넷조차 안 되고….

조금 서러운 마음으로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머리가 하얀 백발의 할아버지가 인사를 건넨다.

"나는 프랑스에온 온 대니. 넌 어디서 왔니?"
"한국요."
"대단한데! 여기까지 오다니. 오늘 저녁 그대를 식사에 초대하는 영광을 베풀 수 있는지?"
"감사하지만 저 이미 밥 먹었는데요."
"그건 밥이 아니지. 겨우 수프 한 그릇 먹었잖아. 그러지 말고 이 길에서 그대가 만난 최고의 프랑스인들과 저녁 한 끼 하는 게 어때?"

할아버지의 정중한 태도와 유머가 재미있어서 결국 초대에 응했다.

식탁의 일행은 나까지 네 명. 대니와 조엘 할아버지는 알제리 전쟁에서 만난 50년 친구이자 원수라고 한다. 조제트 아줌마는 산티아고를 걷던 중에 만난 인연. 아줌마는 프랑스 남부의 아를에서 시작해 지난 한 달간 이미 800km를 걸었다.

샐러드와 파스타, 과일, 맥주와 토속주 로즈와인 한 잔. 할아버지들과 웃으며 이야기하는 사이 밤이 내리고 있다.

순례자들의 길 이정표가 되는 조개껍질 문양.
순례자들의 길 이정표가 되는 조개껍질 문양.김남희

2005년 6월 27일 월요일 흐림

오늘 걸은 길 : 로스 아르코스(Los Arcos)-비아나(Viana) 19km
오늘 쓴 돈 : 귤 1.1 + 진료비 50 + 인터넷 2 + 과일 1.62 + 전화 1 + 숙소 5 = 60.72유로


새벽 5시에 기상. 5시 40분에 숙소를 나선다. 밥도 안 먹고 출발했는데 한 시간 동안 길을 못 찾고 헤맸다. 알베르게로 향하는 표지를 길안내 표지라 착각하고 따라 들어가는 바람에 길을 잃었다.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니 벌써 무릎이 아파온다.

절룩거리는 무릎을 끌고 걷는 길. 모든 사람들이 나를 스쳐간다. 나보다 느린 사람, 내 뒤에 오는 사람은 없다.

달팽이보다 느린 속도. 달팽이는 제 곁을 스쳐 달아나는 존재를 보며 슬펐을까. 화도 났을까. 제 존재에 절망하기도 했을까. 아니, 달팽이는 남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고 그냥 묵묵히 제 갈 길을 갔을 거야.

약해지는 스스로를 추스르며 걷는 길. 얼마나 느린 속도로 걸으면서, 얼마나 자주 쉬었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다리의 통증은 점점 심해지고 있다. 조금만 발을 잘못 디뎌도 무릎 뒤로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찾아온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내 몸이 원망스러워서, 무릎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파 걷다가 멈춰 서서 울었다.

나는 과연 이 길의 끝까지 갈 수 있을까? 이렇게 가다가 심하게 무릎을 다치게 되는 건 아닐까? 오늘 처음으로, 돌아가는 걸 고려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비아나 성당 입구의 조각. 13세기.
비아나 성당 입구의 조각. 13세기.김남희

'열흘 휴식' 처방...한 일주일 쉬어버려?

8시 40분. 산돌(Sandon)에 도착.

먼저 와 계시던 조엘과 대니 할아버지가 무릎에 약을 바른 후 무릎보호대로 감아주셨다. 벨기에인 아저씨 애디도 먹는 약과 빵, 치즈를 나눠주셔서 배를 채우고 알약을 삼켰다.

산돌을 떠난 지 네 시간 만에 비아나(Viana)에 도착했다. 11km를 걷는데 네 시간이나 걸린 셈이다. 교회 옆 알베르게는 침대도 없이 매트리스만 깔려 있는 작은 곳이었지만 자원 봉사하는 아저씨 아르뚜로의 친절은 '홍보대사'급이다.

절룩거리며 들어서는 나를 보자마자 내 배낭을 받고, 의자를 내주며 쉬라고 하신다. 그리고 음식을 내주며 이걸 먹고 병원에 가보자고 한다. 아저씨가 요리한 파스타를 먹고 함께 병원에 갔다.

50유로라는 엄청난 진료비를 내고 만난 의사는 열 마디도 안 했다. 십자인대가 늘어났다는 것, 최소 열흘의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 무리하면 파열할 수 있다는 것, 알약 아침 저녁에 두 번씩 먹으라는 것. 그게 다였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한 이틀 쉬고 배낭을 택시에 배달시키고 하루 10km씩 걸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이 기회에 바르셀로나에 내려가 까를로스와 페드로도 만나고 시내관광이나 즐기며 한 일주일 쉬어야 하는 걸까?

마음이 어지럽고, 생각의 갈피는 잡히지 않는다.

거센 바람이 불더니 비가 내린다. 비가 그치고 나니 바람이 한결 서늘해졌다. 광장의 바에서 조엘, 대니 할아버지, 조제트 아줌마를 만나 레모네이드를 탄 맥주를 한 잔 마셨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리아를 만나 잠시 수다.

마리아는 땅콩버터 병을 들고 다니던 미국인 아줌마의 뒷이야기를 해준다. 마침내 그녀는 뭔가 교훈을 얻었는지 짐의 상당부분을 알베르게에 기증하고, 지금은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교회순례'로 목적을 바꾸었단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까를로스에게 전화했다. 의사로부터 열흘 휴식이라는 처방을 받았다는 내 말을 듣자마자 "그럼, 바르셀로나로 와. 우리 집에서 쉬면 되잖아. 당장 내려와"라고 한다.

결국 바르셀로나로 가기로 했다. 페드로도 만나고, 지영이가 부탁한 가우디 건축물 사진도 찍고, 푹 쉬고 다시 산티아고로 돌아오는 수밖에!

결정을 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로마까지 2000km 걷는다는 아르뚜르 할아버지

이곳 알베르게는 다 함께 모여 식사를 하는 게 전통이다. 9시에 다들 둘러앉아 아르뚜르가 직접 준비한 식사를 함께 나눴다. 목사들은 식탁에서 '6명에 와인 한 병'을 적정량으로 권하지만 난 목사가 아니니까 더 마시자며 와인을 연달아 내놓는 아르뚜르.

저녁을 먹은 후 설거지를 돕고 광장에 앉아 아르뚜르 할아버지와 수다를 떨었다. 그는 전에 선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인천항에도 여러 번 왔었다고 한다. 35년간 갑판 위에서 산 생활이 지겨워 이제는 땅 위를 걷는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산티아고를 무려 4번이나 각기 다른 길로 걸었다. 짧게는 750km에서 길게는 1500km까지.

화장실도 치워주고, 요리도 해주는 자원봉사자들 덕분에 그 길을 행복하게 걸을 수 있었기에, 이제는 그걸 갚을 때라고 생각해 1년 간 자원봉사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

이 일이 끝나면 그의 고향인 빌바오에서부터 로마까지 2000km를 걸어갈 거라는 아르뚜르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로마까지 무사히 다녀오기를 기원해본다.

뺨을 스치는 서늘한 바람이 너무나 좋다. 아르뚜르 할아버지 덕에 '오루호'라는 술도 맛 봤다. 포도의 껍질로 만든 38도짜리 스페인 북부지역의 전통주. 아무래도 나는 '알코홀릭'이 되어가는 것 같다. 식사에 곁들이는 술이 점점 맛있어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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