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안항일운동의 잊혀진 '기억' 살리기

‘해방의 섬’ 소안도를 가다(3)

등록 2005.08.17 17:55수정 2005.08.19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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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기억은 과거의 사실보다는 '과거의 역사'로 구성된다. 즉 선택적 인식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치열한 항일운동, 그리고 한국전쟁기에 민간인 학살, 분단체제에서 강요된 기억의 경험을 갖고 있는 소안도가 최근에 기념탑을 세우고 기념관을 짓는 등 기념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과거에 지워야 했던 기억, 강요된 기억들은 어떻게 되살아났을까.


사적 '기억'에서 공식 '기록'으로

섬 전체 4000여 명의 주민 중 800명이 불령선인으로 일제의 감시를 받았던 소안도. 그곳에 억압된 기억이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이었다. 1980년대 일제강점하 농민운동과 신간회를 연구한 역사학자 이균영(전 동국여대) 교수는 완도일대를 돌면서 답사를 하는데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그때 일이라면 소안도에 가야 할 것이요', '그곳이 어떤 곳인데요.', '하여튼 굉장한 곳이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여튼' 가보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사립소안학교 초대교장을 한 김사홍 선생의 손주 사위였던 정병호(당시 수협중앙회 연수원) 교수의 기록, 당시 배달청년회와 송내호 선생의 대한독립단 재판기록문서, 당시 사진 등이 확보되면서 '사적 공간'에 머물던 기억은 공식적인 기록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소안의 지워진 '기억'을 되살리고 '기록(역사)'으로 바꾸는 일는 일은 조선일보 기자를 했던 김진택의 노력이 매우 컸다. 조선일보 색인집을 통해서 소안 관련 기사를 모으고, 역사학자 이균영 교수를 만나 '역사적 사실'을 복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주민들은 강제로 지워진 기억의 흔적들을 공책에 눌러 쓴 글씨를 지운 후 다시 그리듯 만들어 갔다. 특히 KBS가 1990년 3.1절 특집으로 8일간 현장취재한 후 '소안의 봄'(45분)을 방영한 것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렇게 해서 빛을 본 것이 <소안항일운동사료집>(1990.6)이었다. 이후 역사학자 손형부와 박찬승의 연구가 이어졌고,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소 연구팀이 소안도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대한 조사를 실시한 것이다.


a 완도항일운동사(2000)와 소안항일운동사료집(1990)

완도항일운동사(2000)와 소안항일운동사료집(1990) ⓒ 김준

사료집과 때를 같이 하여 '소안항일운동기념탑'이 건립되었다. 기념비(관) 건립은 1960년대 후반 송내호 선생이 독립유공자로 추서될 무렵, 1970년대 말 재경 소안향우회를 통해 노인당 건립 요청과 관련해 두 차례의 움직임이 있었다. 특히 재경 소안향우회에서는 노인회를 통해 '기념사업'과 노인당 건립을 연계하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10.26사건으로 더 이상 진전 없이 무산되었다.

이후 기념사업과 기념비 건립문제는 틈틈이 언급되었으며, 부분적으로 기금 마련의 노력도 추진되기도 하였다. 그러다 1987년 12월 소안항일운동자 9명이 포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소안노인회가 중심되어 기념사업을 발기하고, 1988년 1월 건립추진위원회가 만들어지면서 본격화되었다.


특히 그동안 '사상' 문제로 누구를 기념할 것인가를 놓고 눈치만 보아온 소안사람들이 정부가 독립운동으로 인정했다는 점에 크게 고무되었던 것이다. 물론 변화된 정치 국면이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언론과 지식인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라 할 수 있다. 노인회에서는 기금마련을 위한 정월보름의 지신밟기와 출향인사들의 기금을 종자돈으로 국가기관(보훈처, 도청, 군청), 언론기관, 유족 등의 출연금 등 6000여만 원이 모아졌다.

a 소안항일운동기념탑(1990, 노인회관앞)

소안항일운동기념탑(1990, 노인회관앞) ⓒ 김준


a 항일운동기념탑(2005, 기념관자리)

항일운동기념탑(2005, 기념관자리) ⓒ 김준

왜 소안사람들은 송내호와 정남국을 진짜 독립운동가로 '기억'할까

소안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소안 항일운동의 지도자는 송내호와 정남국이다. 송내호는 소안도에서는 처음으로 1963년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던 인물이다. 1895년 참봉 직책과 면수를 지낸 송윤삼의 장남으로 태어난 송내호는 1911년 서울의 중앙학교 진학, 1914년 소안도로 귀향해 소안사립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였다.

1916년에는 인근 노화에 '영흥학원'을 설립하고, 소안도에서 1919년 3월 15일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그리고 1920년 대한독립단 전라도지단 조직책임을 맡았지만 다음해 발각, 검거되어 징역 1년을 받고 복역하였다.

이후 출옥한 후 소안 최초의 운동조직인 '수의위친계', 이어서 배달청년회, 소안노농연합대성회를 조직하였다. 특히 소안노농연합대성회 주도혐의로 다시 검거되어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복역을 했다. 이후 조선민흥회 등에 참여하였고, 비밀결사조직인 '살자회'를 주도하였다.

그의 전국전인 활동은 1927년 신간회 창립시 본부 총무간사를 했던 것에서 확인된다. 1927년 배달청년회사건으로 완도경찰에 검거되어 재판과정에서 폐결핵이 악화되어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지만 1928년 세브란스 병원에서 34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았으며, 장례가 신간회동지회장으로 치러졌다.

a 정남국(좌). 송내호(우).

정남국(좌). 송내호(우). ⓒ 김준

정남국은 소안면 부상리에서 정익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완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4년 광주농업학교에 진학하였지만 가정이 어려워 중퇴하였다. 이후 수의위친계, 배달청년회 등에 참여하였다.

특히 수의위친계의 결정에 따라 임재갑 등을 이끌고 간도 용정에 파견되어 그곳 운동을 지원하고 1년만에 귀향하였다. 이후 소안노농연합대성회에 참여한 혐의로 송내호와 함께 검거되어 1년간 복역하였으며 출옥 후 살자회에 참여하였다.

특히 정남국은 일본에서 활동이 두드러진다. 1926년경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와 도쿄에서 노동운동에 참여하였다. 특히 1927년 1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도쿄서부지부 위원장, 5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집행위원장 등을 맡아 활동했으며, 조선공산당(제3차당) 일본총국에 당원으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8월에는 소안학교복교동맹 실행위원으로 일본 정부 문부대신을 방문하고 소안학교 폐교조치에 대해 항의를 하기도 하였다. 귀국하여 소안학교 복교를 위해 총독부 학무국장을 만나 항의하였다. 1928년 4월 '신의주공산당사건'으로 검거되어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8월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에도 일본에서 조선인실업자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해 노동운동을 주도하다 1934년 친이단체 상애회 테러사건으로 나고야 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였다. 이후 소안에 귀향해 송내호의 처제 김동개와 재혼하였으며, 해방 후 완도에서 2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1955년 59세로 사망하였다.

a 정남국선생이 태어난 자리(부상리)

정남국선생이 태어난 자리(부상리) ⓒ 김준

송내호의 항일운동 등 민족운동은 사회주의운동에 기반하고 있다. 그런 그가 1963년 독립유공자로 일찍 추서될 수 있었던 것은 젊은 나이에 병사함으로 인해 해방 전후 그리고 한국전쟁의 과정을 겪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정남국의 경우도 사회주의운동에 깊숙이 관여했지만 한국전쟁 기간에는 국회의원으로 활동했고, 분단이 고착화되어 소안사람들에게 집단적 기억을 강요하던 시기에는 생존하지 않았다. 이들이 모든 소안인들에게 항일운동의 지도자로 추앙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활동과 지도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른 죽음이 강요된 기억의 밖에 존재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념관'을 넘어

1990년 소안의 항일탑 건립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소안 내부에서는 어디에 기념탑을 세울 것인지와 기념탑에 누구의 이름을 새겨 넣을 것인지가 문제가 됐다.

특히 자기 선조나 문중 중심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왜곡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문제는 단지 소안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심지어는 친일을 하고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고 체포하던 사람들이 버젓이 항일운동가로 둔갑하는 사례도 우리는 듣고 있지 않는가. 그런가 하면 항일운동 참여자 중 후손이 없어, 사회주의에 관여하거나 원치도 않던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 등은 당시 명단에 포함되지 못했다는 의견도 제시되었다.

1990년 기념탑을 세우면서 가장 아쉬워했던 점은 사립학교 터에 자리를 잡지 못한 점이었다. 3년 전 국가보훈처와 완도군의 지원을 받아 과거 사립학교 터에 학교를 복원하고 옆에 기념관을 지었다.

그리고 노인회관 앞에 있던 기념탑과 같은 모양의 새로운 기념탑도 세웠다. 기념탑을 옮기는 문제, 새로 조형을 하는 문제 등이 논의되었지만 이미 소안도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점을 고려해 같은 모양의 기념탑을 다시 세우기로 했다고 한다. 복원된 사립학교 한쪽은 서예실로 운영되고 있고 나머지는 전시관이나 복합센터 등 다양하게 운영하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얼마 전 도올 선생의 강의가 그곳에서 열렸는지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을 하며 꼭 TV를 볼 것을 권하기도 하였다.

a 소안항일운동기념관

소안항일운동기념관 ⓒ 김준

기념관 내부는 영상실과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영상실에서는 10분 정도의 소안항일운동 영상물을 감상할 수 있으며, 전시관에서는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분들의 얼굴조각상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소안도 항일운동 기록이 정리되어 있으며, 소안학교 졸업장을 비롯한 몇 가지 전시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기념관이 지어지고 기념사업이 논의되고 있지만 손이 끊기거나 돌볼 사람이 없어 술잔을 따를 사람도 없는 경우도 있다. 소진리 마을 꼭대기에 간도에서 같이 활동했던 동지들이 세운 박화국의 불방비도 그렇고,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지만 손이 없어 연금은 고사하고 무덤마저 돌보기 어려운 부흥리 뒷산에 모셔진 '박흥곤' 선생의 묘지가 그렇다. 박화국은 중화학원 출신으로 수의위친계의 결정에 의해 정남국과 함께 파견되었던 인물이다. 박흥곤은 배달청년회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a 박흥곤선생묘지(부흥리 뒤산)

박흥곤선생묘지(부흥리 뒤산) ⓒ 김준

a 박화국 선생의 불망비(소진리)

박화국 선생의 불망비(소진리) ⓒ 김준

강요된 기억, 지워진 기억이 '기념'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해방 후 40여 년 동안 곳곳에 세워진 기념탑, 박물관이 이를 더욱 부채질했다. 오죽하면 전쟁 '기념관'까지 생겼겠는가. 우리는 기억과 기념을 구별해야 한다.

일제강점기는 '기억'할 대상이지 기념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기념해야 할 것들은 '지우기'를 강요하고, 기억해야 할 것은 '기념'이 되고 있다. 기억은 '사적 영역'이지만 기념은 '공적 영역'이다. 기념탑에서 기념관까지 지어진 소안도에서도 아직 항일운동의 많은 부분은 '사적 영역'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전쟁과 반공을 국시로 무자비한 폭력과 탄압을 일삼은 지난 정권에서 겪은 집단적 경험과 사회적 기억 때문이다.

8·15민족대축전 때 북한대표단이 서울을 방문해 머물다 갔다. 북한대표단의 현충원 방문은 파격적인 행보라며 모두 놀라워했다. 북한대표단이 가는 곳에 환영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현충원 방문 반대를 비롯해 인공기 소각 시도 등 우익세력의 집회도 있었다고 한다. 급격하게 정세가 변하고 있다.

기념탑이건 기념관이건 모두 사회적 기억의 반영물들이다. 기념탑에서 기념관으로 발전하면서 소안학교 자리도 찾았고, 건물도 복원했다. 이제 남은 문제는 강요된 기억에 의해 잊혀져가는 소안사람들의 '해방'의 기억을 복원하는 일이다. 이것은 건물을 짓는 기념사업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해방의 기억을 재구성하고 기념탑과 기념관 안에 담지 못한 새로운 소안의 항일운동역사를 써야 한다.

덧붙이는 글 | '해방의 섬' 소안도를 가다 연재를 마칩니다.

덧붙이는 글 '해방의 섬' 소안도를 가다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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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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