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393회

등록 2006.03.22 08:15수정 2006.03.22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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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스물 한 명이군. 이게 전부인가?”

함태감은 탁자 위에 놓여진 두루마리를 펼쳐보다가 눈을 떼고 맞은편 탁자에 앉은 인물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시선을 던졌다. 헌데 놀라운 일이었다. 그곳에 앉아있는 인물은 뜻밖에도 죽었다고 알려진 상대부가 아닌가?


“지금까지 조사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얼굴 왼쪽이 화상을 입은 듯 일그러져 있고, 검흔이 길게 목까지 그어져 있는 모습이었다. 더구나 과거와는 달리 두 눈은 맹수의 그것을 닮은 듯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섬뜩한 느낌이 들게 했다.

“관대학사(寬大學士)까지 끼어 있었다니 놀랍군.”

두루마리에 기재된 명단은 사실 놀라울 정도였다. 육부(六部)에 있는 조신들이 있는가하면 감찰(監察)을 하는 도찰원(都察院) 소속의 인물들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인물이 있겠습니까? 연병문 그 자는 포섭할 인물의 비리를 조사해 협박과 회유로 자기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상대부는 말투마저 달라져 있었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매우 거북하게 만드는 어투였다. 이미 자신은 죽은 목숨이다.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지도 않았고,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다섯 명이 넘지 않는다. 자신을 살려 준 백결이란 인물, 그리고 전연부와 조궁, 마주 앉아있는 함태감 뿐이다.

“이번 일은 조용히 처리하라는 것이 황상의 내심이네. 이럴 때 저들을 죄목을 밝혀 참수하는 것은 오히려 일을 시끄럽게 만들고 일이 커질 수도 있으니 말이네.”


“그러려면 천관을 접수하는 일이 우선입니다. 어느 정도 장악은 했지만 연병문을 처리하지 않고는 완전히 장악하기 어렵습니다.”

“자네가 반드시 직접 해야겠는가?”

상대부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연병문만큼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 남에게 양보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당장이라도 죽일 수 있는 것을 지금까지 참고 있었던 것은 조정에 스며있는 연병문의 연결고리를 파악하기 위함이었고, 무엇보다 함태감의 만류 때문이었다. 함태감이 그것을 모를 리 없다.

“이번 구복의 패전은 무기와 군량에 문제가 있었다고 밝혀졌네. 이번 군수물자는 언제나 그렇듯 산서상인들이 납품했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었단 말이야.”

상대부는 함태감의 표정을 살폈다. 그것은 함태감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추측해보기 위함이었는데, 사실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관료들은, 특히 선택이나 판단에 책임을 져야할 관료들은 대개 자신의 잘못을 다른 사람이나 다른 이유를 들어 책임을 회피하려는 짓을 서슴치 않는다.

분명 패전의 책임은 정로대장군 구복에게 있었다. 그리고 구복과 같은 인물을 발탁한 조정에 책임이 있었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책임은 황제에게 있었다. 그것을 다른 탓으로 돌리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던 것이다. 특히 황제를 모시는 환관의 입장에서는 없는 사실까지도 만들어 황제를 보호하는 것이 그들의 숙명이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게나. 어느 정도는 사실이니까...... 물 먹은 군량과 사용할 수 없는 부실한 무기가 대량으로 발견된 것은 분명하네.”

상대부의 의혹스런 눈길을 이해 못할 함태감이 아니다. 더구나 살아 돌아온 상대부는 자신이 완벽히 제어하기도 어렵다. 허나 상대부가 자신을 배반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 산서상인들도 연루되어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러리라 생각되네. 조정까지 파고든 그들이 산서상인들에 기는 것이 무에 그리 어려울까?“

“하오면....?”

“최소한 미곡(米穀)의 장보현(張寶泫)과 천병정(千兵鼎)의 나종관(羅宗冠), 그리고 그것을 운반했던 설덕조(薛德操)는 혐의를 벗어날 수 없네.”

함태감의 입에서 산서상인연합회의 오대수장 중 세 명의 이름이 거론됐다. 그들이 연루되었다고 판명되거나 누명을 쓴다면 산서상인들은 다시 재기할 수 없을 지경에 빠진다. 함태감은 재차 입을 열었다.

“어차피 자네가 앞으로 조사할 사안이야. 관련이 있는 자가 분명 있을 것이야.”

그 말에 함태감이 단순하게 패전의 책임을 산서상인들에게 돌리려 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내부 일에 몰두하는 동안 패전에 대한 조사를 시켰던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곧 조사토록 하겠습니다.”

“연병문 이 놈도 그 사실을 알고 있어. 내일 정도면 좋겠지?”

“예....?”

“내일 그 놈더러 직접 조사하도록 지시를 내리겠네. 우선은 천병정부터 조사하도록 시키지. 그 놈을 태운 마차는 아마 내일 저녁쯤 황궁을 빠져나가게 될 것이네.”

함태감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상대부 자신이 판단을 하라는 말이다. 어차피 상대부가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연병문의 숨통을 끊겠다고 한 이상 연병문을 마차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던지 아니면 그 놈이 만나는 인물들을 추적해 조사를 한 연후에 죽이던지 마음대로 하라는 말이었다.

처음으로 얼굴이 일그러지며 상대부의 입가에 미소라 할만한 것이 떠올랐다. 검흔과 함께 불에 그슬린 흉터가 일그러지자 더욱 섬뜩해 보였다.

“자네는 이미 죽은 몸이야. 나서지 않겠다는 자네의 생각은 옳아. 자네 생각대로 연병문을 대신해 천관의 관리는 전연부와 조궁을 내세울 것이야.”

전연부와 조궁은 상대부의 수족과 같은 인물들. 후에 동창(東廠)으로 다시 태어날 천관에 제독동창(提督東廠) 아래에 두 명의 첩형(貼刑)이 있게 됨은 이 때부터 비롯된 것.

“감사합니다.”

“대신 자네는 보이지 않는 천관의 수뇌가 되겠지. 세상 사람들은 천관의 모든 일을 본관이 처리한다고 믿을 것이고.....”

모든 것을 맡긴다는 의미다. 허나 그 말에 상대부는 막중한 책임을 느꼈다. 만약 천관의 일이 잘못되면 그 책임은 함태감이 모두 뒤집어쓰게 되는 것이다.

“실수 없이 처리하겠습니다.”

“언제쯤이면 모두 처리될 것 같은가?”

한태감이 두루마리를 턱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조용히 숙청하는데 얼마나 걸리겠느냐는 뜻. 상대부는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연병문은 내일 자시(子時)를 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나머지 자들도 칠주야(七晝夜)를 넘지 않게 하겠습니다. 대신 그들의 사인(死因)은 누구나 납득할 수 있게 하겠습니다.”

“그래야지. 알만한 자들은 모두 알겠지만 대놓고 떠들지는 못하도록 만들어야지. 황상께서는 이미 대군을 이끌고 친정(親政)에 나서겠다는 마음이시던데......”

함태감은 말끝을 흐렸다. 영락제의 무용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한편으로는 이번 전쟁에서 참패한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상대부는 그 말이 산서상인들 조사에 박차를 가하라는 말처럼 들렸다.

“패전 원인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조사하도록 하겠습니다.”

“흣.... 우습구먼. 귀신이 천관을 움직이니 말이야.......”

상대부를 바라보는 함태감의 눈길에는 애처로움이 배어있었다. 자신만을 믿고 따랐던 아이였다. 자신의 명이라면 불 속이라도 뛰어든 아이였다. 그래서 사신 일행에 넣었던 것이었는데 저 꼴이 되어 돌아왔다. 이제는 떳떳하게 얼굴을 내밀지도 못하게 된 아이. 나이가 오십이 되어도 함태감의 눈에는 여전히 아이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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