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422회

등록 2006.05.02 09:22수정 2006.05.02 09:23
0
원고료로 응원
"이 정도라면 한 달 이상은 견딜 수 있소. 그 이후에 어찌될지는 모르지만…."

떠나는 사람들은 최소의 건량만을 지닌 채 식량이나 금창약 등 가진 것의 대부분을 부상자들을 위해 남겨두었다. 그렇게라도 자신들의 부담을 덜려 했을 것이다.

백렴은 애써 밝은 미소를 지었다. 이것이 자신의 몫이었고,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결코 화가 나거나 슬픈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히려 기쁘고 가슴 뿌듯함이 전신에 휘돌고 있었다.


"반드시 그 안에 돌아오겠소."

구양휘 등과 함께 기습을 하고 돌아온 담천의가 미안한 듯 말했다. 그들은 곧 떠날 참이었다. 몸이 아직도 성치 않은 백결을 앞세우고 무당의 청송자와 철혈보의 독고문 등이 포함된 선두가 연동의 입구를 장악하고, 경상자들을 데리고 몽화가 이끄는 중진도 이미 떠난 뒤였다. 이제 떠나야 할 인물들은 구양휘 일행 외에는 거의 없었다.

"영주께서는 너무 부담 갖지 마시길 바라오. 오히려 속하가 영주를 끝까지 모시지 못함에 죄송스러울 따름이오."

조직에 속한 사람은 조직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이곳에 남겠다는 백렴의 결정은 조직이 한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 한 것이다. 아니 엄격히 따져본다면 균대위보다는 오히려 귀곡의 영향 때문이었다. 허나 담천의는 고개를 저었다.

"백위장은 나를 따르는 것보다 훨씬 큰일을 하시는 거요. 나는 아직까지 백위장이 균대위를 떠났다고 생각하지 않소. 이런 일은 오히려 내가 부탁하고 싶었던 거요."

그 말에 백렴은 씨익 웃었다. 아마 부탁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중상자들을 데리고 이곳에 남아 있으라는 것은 죽으라는 말과 같다. 자신이 아는 담천의는 수하에게 죽으라고 명령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이해해 주시니 속하로서는 감읍할 따름이오."

백렴은 포권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보고를 드릴 것이 있소. 보고를 해야 할지 아니면 모르시는 것이 좋을지 몰라 망설였지만 아셔야 할 것 같아 보고 드리오."

"……?"

"황원외의 연락에 따르면 주모께서 정주의 손가장에 계신다하오."

송하령을 말함이다. 송하령이 왜 손가장에 간 것일까? 이미 손불이가 모용화천으로 밝혀진 이상, 천동의 동주인 이상 손가장은 이곳 천마곡보다 더 중요한 상대의 근거지다. 부친을 죽인 원수이자 이 모든 음모의 우두머리가 머무는 곳이다. 담천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물었다.

"납치된 것이오?"

그 질문에 백렴은 대답하기 곤혹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미미하게 흔들었다. 그리고는 힐끗 구효기를 보았다가 대답했다.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오. 저들이 주모를 납치하려 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정작 주모를 손가장으로 모신 사람은 요광대(搖光隊)의 조국명 대주였소."

백렴은 분명히 조국명을 전과 달리 균대위 직책으로 불렀다. 그것은 공식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었고, 한편으로는 자신과 조국명과의 형제와 같은 친분관계가 멀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오?"

"감히 속하가 말씀드리기 어려우나… 영주께서는 비원을 절대적으로 믿거나 의지하려 하지 마시오. 전에 밝힌 바와 같이 조국명 대주는 비원에 속한 인물이오."

"지금 사부가 나를 죽이기 위해 하령을 손가장으로 데려갔다고 말하는 것이오?"

"영주를 죽이기 위한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소. 다만 이곳 천마곡에서 저들과 동패구상을 바라는 비원이라면… 만약 영주께서 비원의 예상대로 가까스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면 결국 손가장까지 마무리하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오."

그 말이 그 말이다. 옆에서 듣고 있는 구효기는 눈을 감았다. 눈이 아니라 차라리 귀를 막고 싶었다. 백렴은 아주 점잖게 말을 하고 있었지만 비원의 의도를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다. 비원이 직접 나서지 않고 균대위의 수장인 담천의가 모든 것을 처리하도록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설사 담천의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담천의의 역할이 끝나면 그 후에 자신들이 나서 정리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어차피 손불이는 불공지대천의 원수인 것을…."

담천의가 탄식처럼 혼자 중얼거렸다. 어차피 자신이 살아있는 한 손불이와의 대결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그를 철저히 이용하기 위해 비원이 모든 상황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그랬다.

부친이 돌아가신 이후… 아니 부친이 살아계셨을 그때에도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였을지 모른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상황에서 부친은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피하거나 도망치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 자신도 역시 마찬가지. 비원의 의도가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이 비원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백렴이 다시 입을 열었다.

"풍철한 대주가 검저유혼을 움직여 기습해 오는 적들을 가까스로 막아냈다고 하오. 검저유혼을 움직인 것은 영주께서 허락하신 일이오?"

담천의는 고개를 끄떡였다. 당시만 해도 미지의 적은 완벽한 힘을 가지고 움직일 것이 분명한데 균대위의 힘은 미약했다. 힘이 필요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전대 균대위 어른들을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말해 주지 않았지만 전대 균대위의 어른들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했다. 초혼령을 그에게 준 이유였다. 결정적인 순간에 검저유혼을 불러내라고….

"막았다니 다행스러운 일이구려."

"피해가 막심한 모양이오. 풍대주를 비롯한 모든 위장들이 손가장으로 집결하고 있소. 아마 주모를 구출해 내려는 것 같은데 신검산장과 황가마장에 계시는 전대 어른들까지 들썩이고 있소."

그 말에 담천의는 고개를 저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부탁이라니…? 속하는 아직 영주의 수하요. 명령을 내려주시오. 즉시 수행하겠소."

"풍대주와 위장들에게 연락을 취하시오. 하령을 구해내는 것 따위의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라고 하시오. 하령은 내 개인적인 일이오. 나는 개인적인 일에 균대위의 힘을 낭비하고 싶지 않소. 힘을 집결하되 절대 움직이지 말라고 전하시오."

"존명…! 필히 그렇게 연락하겠소."

"거기에 덧붙이시오. 만약 이번 명령을 어기면 균대위의 율령에 따라 엄벌에 처할 것이라고…."

백렴은 그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풍대위 위장들은 송하령을 구출해 내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적인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었다. 자신들이 보호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으로 더욱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명령이 떨어져도 그것은 인사치레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았다.

"알겠소이다."

다시 한 번 백렴이 포권을 취하며 허리를 깊게 숙였다. 담천의 역시 포권을 취하며 마주 예를 취했다.

"사내끼리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고맙소."

"별 말씀을…."

그 때였다. 감고 있던 눈을 뜨며 구효기가 담천의에게 말했다.

"노부 역시 이곳에 남겠소. 비록 의술은 익힌 바 없지만 그래도 이곳저곳에서 귀동냥한 것은 많소. 빈손이라도 이곳에 있는 부상자들에게 필요할 거요."

이미 비원의 의도가 밝혀진 이상 제마척사맹의 군웅들과 같이 동행하기에는 껄끄러웠을 것이다.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더라도 그 역시 가슴 깊숙한 곳에서 피어오르는 회의(懷疑)에 시달렸던 터였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와 저 인생의 후반기를 풍미하게 될지도 모를 무협작품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 천지는 만인의 것이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새벽 3시 편의점, 두 남자가 멱살을 잡고 들이닥쳤다 새벽 3시 편의점, 두 남자가 멱살을 잡고 들이닥쳤다
  2. 2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3. 3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4. 4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5. 5 휴대폰 대신 유선전화 쓰는 딸,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휴대폰 대신 유선전화 쓰는 딸,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