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425회

등록 2006.05.08 09:12수정 2006.05.08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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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앉으십시오."

담천의는 자신의 감정을 내색하지 않고 자리를 권했다. 그 목적이야 어찌했든 자신의 궁금증에 대한 실마리를 처음으로 풀어준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 가장 필요한 사람이었다.


"자네에게 짐이나 되지 않을지 모르겠군."

기껏 자리래야 그냥 석로 위에 비집고 앉는 것이 고작이지만 군웅들이 몰려 있는 상황에서 수뇌들이 회의하는 장소를 비집고 들어갈 만한 여유는 그리 많지 않았다. 담천의가 자리를 내주자 다른 인물들도 백결 주위로 섭장천 일행이 앉을만한 공간을 비웠다.

"섭노야 같은 분을 짐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인물은 이 중원에 존재치 않을 겁니다."

"이제는 혀도 매끄러워졌군."

섭장천은 보면 볼수록 대견하다는 듯 담천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무엇을 가늠해 보려고 하는 것일까? 섭장천이 담천의가 내 준 자리를 앉자. 백결 역시 섭장천에게 예를 취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노야…."

"고생은 자네가 했지. 몸은 괜찮은가?"


"견딜 만합니다."

백결은 대답과 함께 뒤따라 온 장철궁을 부축했다. 천하제일의 무골이자 절대구마의 대군이 감탄하듯 무신이라고 칭했던 장철궁의 몸은 썩 좋지 않아 보였다. 부상이 심했다고는 하나 꽤 시일이 흘렀는데도 회복되지 못하고 있음은 무슨 연유일까?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장철궁은 외상은 물론 내상까지도 완전하게 회복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얼굴에 진 그늘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아마 그래서 섭장천 일행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던 것 같았다.

만약 장철궁이 완전하게 회복되었다면 그들 몇 명만으로 충분히 방백린의 이목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을 터였다. 섭장천이 자리를 잡자 제일 먼저 모용화궁이 물었다.

"섭노선배… 이 후배는 모용화궁이외다. 예의에 벗어나는 줄은 알지만 지금 천마곡을 수중에 넣은 방백린이란 자가 모용백린이라니… 손불이에게 자식이 있었단 말이외까?"

고개를 돌린 섭장천이 모용화궁을 잠시 주시하더니 고개를 끄떡였다.

"으음… 자네가 모용가의 현 가주로군. 아무래도 모용이라는 성을 쓰는 자들이 있으니 신경 쓰이겠지. 허나 분명 그러하네. 손불이는 자식을 가지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노부가 파악한 바로는 그에게 자식이 둘 있네."

확실히 소문은 믿을 것이 못되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손불이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하지만 실상 손불이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손불이에 대해 알았던 모든 것이 진정한 손불이를 알지 못하게 하는 가면과도 같았다.

사람들은 항상 이렇다. 사람들은 그저 겉모습만 보고 누군가를 판단해 버리는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에 대해 누가 말하는 것만 듣고 선입관을 가지게 되거나 마치 비밀이라도 되는 듯 은밀하게 들려오는 소문을 진실이라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하나는 바로 방백린이라고 불리었던 모용백린이고, 또 하나는 조양궁(朝陽宮)에서 자란 모용정이라는 여아라네."

몽화의 거처에서 이혼권 언무탁과 함께 담천의를 기습했던 여인이 모용정이었다. 조양궁의 독문장법인 조양장(朝陽掌)으로 담천의의 등짝에 선명한 장인을 남겼던 여인. 담천의의 뇌리에 모용정의 모습이 스쳤다.

"모용정이라는 여인은 지금 본대에 잡혀 있소."

"그렇지 않네. 그녀는 균대위를 탈출했고, 지금은 정주의 손가장에 있네."

어찌하여 풍철한과 단사는 그녀가 탈출하게 만드는 실수를 범한 것일까? 자신이 우려하던 일이 터진 것일까? 아니면 비원의 조국명이 장난친 것일까? 담천의는 잠시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모용화궁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떡이며 입을 열었다.

"그랬구려… 그래서 불효한 자식 놈이 자신에게도 의지할 형이 있다고 말한 것이구려. 지금껏 자식 놈이 말한 그 형이 무적철검(無敵鐵劍)을 가리키는 것으로만 알았소."

모용화궁은 턱으로 구양휘를 가리켰다. 무적철검은 구양휘의 별호. 구양휘와 형제가 되었으니 그렇게 오해할 만했다. 모용화궁은 자신을 자책하듯 중얼거렸다. 아마 모용수가 그런 말을 했을 때 좀 더 신중하게 생각했더라면 일찍 알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 때문인 것 같았다.

"자네는 실제 모르는 사실이 많기도 하지만 자네가 애써 외면해 버린 사실로 인해 일을 더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네. 도대체 자네가 말하는 그 불효한 자식 놈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가?"

"어디에 있소이까?"

"바로 이곳… 천동의 연무관에 있네. 폐관수련하고 있지. 천하제일의 비공이라는 천동의 무공을 익히고 있단 말이네."

"으음…."

"이런 자리에서 말하기 거북스러운 일이지만 노부는 아직도 자네의 진심을 알 수가 없네."

섭장천의 눈빛이 강렬해지고 있었다. 모용화궁의 얼굴에 얼핏 당황함이 스쳤다.

"무엇이 말이오?"

"모용수는 모용가의 무공을 익혔지. 헌데 그는 무정비도(無情飛刀)라는 외호를 얻었다네. 물론 모용가의 독문무공 중에는 비도술도 있다고 들었네. 하지만 그가 사용하는 비도술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보았는가?"

모용화궁은 섭장천의 예리한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섭장천이 무엇을 추궁하고 있는지 이미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애써 모른 체 하려 했던 문제였다.

"섭노선배께서 이 후배를 나무라신다 해도 변명은 하지 않겠소. 아마 섭노선배께서 생각하시는 그대로일 거요."

"모용수가 익힌 비도술은 본교의 고수인 비도탈명(飛刀奪命) 마운(碼暈)의 비기이지. 또한 모용수는 본교에서도 몇 사람 외에는 알지 못하는 가운데 은밀하게 본교의 십대제자 중 여덟째로 키워졌네."

그 말이 섭장천의 입에서 나오자 주위에 있던 인물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좌중의 냉랭한 시선이 모두 모용화궁의 얼굴에 꽂혔다. 모용화궁은 질식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이제 자칫하면 자신은 물론 모용가는 영원히 중원 무림의 적이 될 판이다. 그는 내심 심호흡을 하며 간신히 입술을 떼었다.

"그… 그 사실은 거의 최근에 와서야 눈치챌…."

섭장천이 모용화궁의 말을 잘랐다.

"물론 자네는 자세히 알지 못했겠지. 허나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어. 자네는 분명 천동의 존재도 진작부터 알고 있었을 게야."

"으음…. 부인하지 않겠소."

모용화궁은 신음성을 토하며 순순히 인정했다. 그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애써 피하려 한 모든 일이 밝혀지고 있는 이상 부인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것은 아니었다. 또한 자식 놈의 잘못은 어차피 부모의 책임이다. 그 책임마저 회피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자신만큼은 중원무림과 제마척사맹을 배반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자네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네. 자네에게 죄가 있다면 자네가 모용가의 현 가주라는 점이겠지. 조부나 선부의 일로 인해, 그리고 자네의 자식으로 인해 어설프게 알고 있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사실도 이해할 수 있네. 하지만 자네는 그런 사실들을 눈치 채고 있으면서 자네 자식 때문에…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네의 형일지도 모르는 모용화천이 중원을 장악하게 되면 자연 모용이라는 성을 가진 인물들이 중원을 지배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안고 그러한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비난만큼은 피할 수 없네."

모용화궁은 변명하지 않았다. 실상이 그러했다. 모용화천을 형이라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었다. 모용수가 모용가의 무공이 아닌 다른 무공을 익히고 있음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 점에 있어서는 변명하지 않겠소. 군웅들께서 비난을 퍼붓고 본 가의 희생을 요구한다면 기꺼이 감수하겠소."

그럼에도 모용화궁은 섭장천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섭장천은 지금 오히려 모용화궁을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있었다. 언젠가 밝혀질 사실을 정확하게 짚어내 군웅들의 오해를 걷어 내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잔인한 질문이지만 한 가지만 묻겠네. 자네는 이곳 군웅들의 가슴에 겨눈 모용화천과 모용백린, 그리고 자네 자식인 모용수의 검을 거두게 할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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