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위해서라면 내가 아파도 피하지 않을래

[달팽이가 만난 우리꽃 이야기 57] 보풀

등록 2006.09.07 17:54수정 2006.09.08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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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떨쳐버리고 싶어 몸부림치고 싶지는 않을까?

떨쳐버리고 싶어 몸부림치고 싶지는 않을까? ⓒ 김민수

논두렁밭두렁이 놀이터였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논두렁밭두렁을 걸어본 지도 꽤 오래 되었다. 5년만에 마감을 했지만 40대에 시작했던 제주의 시골생활 덕분에 밭두렁은 참 많이 걸어 다녀 보았다. 제주에도 논이 있긴 하지만 그렇게 많지 않아서 논두렁을 걸어 볼 기회는 거의 없었으니 고등학교 시절 교련복을 입고 농약을 치러 논에 들어갔던 이후로 거의 논두렁을 걸어보질 못했던 것 같다.


a 논두렁을 걷다보면 만나게 되는 단아한 꽃

논두렁을 걷다보면 만나게 되는 단아한 꽃 ⓒ 김민수

고등학교 1학년때였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벼에 벌레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는 농약을 치러 논에 나갔다.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농약 치는 기구는 등에 메고 왼손으로는 노즐을 들고 오른 손으로는 펌프질을 하면서 농약을 주던 것이었다. 물과 농약 비율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논으로 향했다. 열심히 농약을 치는데 어질어질한 느낌이 오기 시작했다. 바람은 등지고 농약을 치는 것을 깜빡하고는 바람을 맞으며 농약을 쳤던 것이다.

이후에 간혹 농약을 치다가 농약중독으로 쓰러진 이들이 있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큰 일 날 뻔 했었구나 가슴을 쓸어내렸었다.

a 이파리의 모양이 동정키가 된다.

이파리의 모양이 동정키가 된다. ⓒ 김민수

그 논에도 보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때는 꽃이 보이지 않았다. 그냥 벼말고는 다 잡초였을 뿐이다. 피살이를 하면서도 물달개비나 보풀을 뽑아내면서도 그들의 존재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얼핏 기억을 해보아도 무수하게 뽑혀져 논두렁에서 말라가던 보풀과 벗풀, 물달개비가 말라가는 흙을 붙잡고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피어났던 아련한 기억이 있다. 그것을 보면서도 그들의 삶의 끈기나 아름다움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이름에도 관심이 없었지만 그들이 논에 존재한다는 것이 귀찮게만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던 사람이 이제는 혹시나 그들이 피어 있을까 논두렁을 걷는다. 부지런한 농부의 논에서는 만날 수 없는 꽃, 조금은 게으른(?) 농부의 논에서 만날 수 있는 꽃이 된 것이다.

a 올해는 그냥 지나칠 줄 알았다.

올해는 그냥 지나칠 줄 알았다. ⓒ 김민수

내가 만난 보풀에는 한 마리 벌레가 기어오르고 있었다. 저걸 떼어줄까 하다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일 같아서 그냥 두었다. 삼십 여분 있다 다시 가보니 이파리를 반 정도나 갉아먹었다. 먹성이 대단한 것으로 보아 하루 이틀이 되기 전에 보풀의 이파리는 모두 벌레의 먹이가 될 것 같았다. 그래도 내가 개입하면 안 될 것 같아 그냥 발걸음을 돌렸다.


자기의 이파리를 갉아먹기 위해 벌레가 기어오를 때 보풀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온 몸에 소름이 돋지는 않았을까? 그를 떨쳐버리고 싶어 안간힘을 쓰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이미 꽃을 피웠고, 열매가 익어가고, 뿌리도 남았으니 그 이파리를 갉아먹어도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삶을 초월한 구도자를 보는 듯했다.

a 가만히 그를 들여다보는 순간 벼익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은 가을소리다.

가만히 그를 들여다보는 순간 벼익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은 가을소리다. ⓒ 김민수

보풀에 대한 어떤 이야기들이 있을까 인터넷 검색창에 보풀이라고 쳐보았다. 다른 꽃들을 검색할 때와는 전혀 다른 결과가 눈앞에 펼쳐지는데 대부분이 '보풀제거기'에 대한 것이었다. 물론 그 보풀은 다른 보풀이지만 이름만으로는 보풀이 꽤 싫어할 것 같은 이름이다.


너를 위해서라면 내가 아파도 피하지 않을거야.
맨 처음에는 떨쳐버리고 싶어, 몸부림치고 싶어,
뜨거운 여름햇살마저 가려버린 구름에게,
따가운 가을햇살위로 불어오는 바람에게,
태풍을 몰고 와, 바람을 몰고 와 나를 흔들어줘 했지.
흔들리면 흔들릴 수록
나를 더 꼭 껴안고 이파리를 너의 먹이를 삼았지.
처음엔 정말 아팠어, 끔찍했어.
그런데 없으면 안 될 것 같았던 이파리 없이도
넉넉하게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것을 알았어.
그게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것도 알았지.
이젠
너를 위해서라면 내가 아파도 피하지 않을거야. <자작시-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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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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