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꽃을 보면 왜 이렇게 슬플까

[달팽이가 만난 우리꽃 이야기 71] 백정화

등록 2006.11.05 19:48수정 2006.11.05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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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이 꽃을 볼 때마다 나는 백정(백장)을 떠올렸다.
백정이란 소, 돼지나 개를 잡은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백정은 직업으로서 인정받기 보다는 가장 천한 직업 중의 하나로 취급받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역사에서는 사회적으로도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백정만도 못한 놈'이라는 말에는 사람의 가장 밑바닥이 백정임을, 그 보다 더 내려가면 사람도 아닌 의미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제주에 있을 때 뜰에는 곳곳에 백정화가 있었다. 5월이나 6월에 꽃을 피우고 심지어는 한 겨울에도 꽃을 피우곤 했었다. 화분에 심겨져 서울로 이사온 백정화는 무럭무럭 자라 제법 쌀쌀한 기운이 도는 요즘들어 꽃을 피우고 있다. 그런데 그 꽃을 볼 때마다 참 슬프다. 그 이름때문에 슬프다. 그 옛날 백정들의 고단한 삶도 그렇고, 오늘 우리 사회에서야 백정은 사라졌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여전히 백정 같은 삶을 강요당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어서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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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그래서일까?
가장 밑바닥 삶을 살아본 이들, 그러나 체념하지 않고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절규하는 이들을 떠올린다. 1970년 11월 13일 노동자들도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며 분신자살한 전태일 열사를 위시해서 이 땅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서 싸우다 꺾여버린 혹은 스스로 삶을 꺽어버린 이들이 떠오른다. 그래서 이 꽃을 보면 슬프면서도 한편으로 "그러니까 살아야지"라는 오기가 생기게 하는 꽃이다.

슬프고 결연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댕강댕강 바람에 꽃 떨어지더라도 한 겨울에도 따스한 햇살 사나흘이면 풍성하진 않아도 꽃소식을 전해주는 기특한 꽃이다. 본래는 남부지방에서 월동을 하지만 제법 굵어진 것들은 중부지방에서도 넉넉하게 노지에서 겨울을 난다고 한다. 그러니 단순한 늙어짐이 아니라 세월이라는 무게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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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봄날이면 백정화 주변에는 작은 백정화의 새싹들이 무성하게 올라온다. 맨 처음에는 여느 여린 풀의 새싹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여름이 지나고 나면 서서히 그들의 본성이 드러나는데 일년생 풀이 아니라고 그리 굵지 않은 줄기임에도 불구하고 나뭇가지처럼 변해가기 시작한다. 꽃은 그리 예쁜 줄 모르겠는데 번갈아 이파리갈이를 하여 늘 푸른 나뭇잎이 예쁘고, 간혹 무늬가 들어가 있는 이파리들은 꽃보다 아름답다. 백정화를 원예종으로 키우시는 분들 가운데서는 꽃보다는 이파리를 보기 위해 키우는 분들도 많다고 하니 꽃만 예쁜 것이 아니라 이파리까지도 예뻐서 팔방미인인 셈이다.

대략 4년 전 그 중 하나를 화분에 옮겨심었다.
그런데 그 나무가 지금은 무성하게 되어 큰화분도 비좁다고 아우성이다. 갇혀 살아가는 아픔에도 불구하고 잘 자라준 것이 고맙기만 하다.화분에 심었던 백정화는 서울로 이사올 때 함께 올라왔고, 지금 제법 쌀쌀한 가운데서도 꽃을 피운 것이다. 아마도 올 겨울만 실내에서 나면 내년부터는 노지에서도 넉넉하게 겨울을 날 수 있을 것 같다. 세월의 무게, 그것이 그를 고난의 시간도 넉넉하게 이길 수 있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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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성서에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니라"는 말씀이 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의 진의를 무시한 채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매달린다. 신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뜻대로 이뤄졌을 때에만 응답 받았다고 감사하는 것이다. 타인에 대해서도 그런 눈으로 바라봄으로 고난 중에 처한 이웃들의 삶을 안타까워하기 보다는 회개해야 할 뭔가가 있는 것 아니냐는 눈길을 보낸다.


이와 비슷한 말 "하면 된다"라는 말도 우리 사회에 풍미하고 있다.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면 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성서의 말씀과 동일하다. 그런데 정말 치열하게 살아가도 안되는 일, 할 수 없는 일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을 개인의 신앙심의 부재나 노력의 부재로 몰아붙일 수는 없는 일이다.

아무리 할 수 있다고 해도, 하면 된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는 것이다. 그걸 간절히 원해도 아무리 강한 의지와 노력이 있어도 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그걸 인정해 줄 수 없는 사회니 종교는 결코 건강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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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그들이 한창 피었을 때에는 마치 나무에 흰눈이 쌓인 듯하다. 그런 때에는 한창 꽃을 피울 5월 무렵이다. 그 하얀꽃은 마치 소복을 보는 듯 하여 80년 5월의 죽음을 슬퍼하는 울음들 같다. 그래서 또 슬프게 느껴진다.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꽃들이 있다. 슬픈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수많은 꽃들도 있다. 그런데 나는 아직 이렇게 깊은 슬픔으로 다가오는 꽃은 없었다. 아무리 슬픈 전설을 간직한 꽃이라도 이내 지워져 버리는데 백정화는 꽃말도 없고, 전설도 없건만 왜 이렇게 슬픈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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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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