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꼬 비싼 돈 들여 단풍 구경 가능교?

달내일기(80)-산이 불 타고, 내 마음도 불 타고

등록 2006.11.13 14:05수정 2006.11.13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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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큰길에서 마을로 내려서자마자 보이는 낙타봉의 단풍. 11시부터 3시까지 요염한 모습을 뽐낸다

큰길에서 마을로 내려서자마자 보이는 낙타봉의 단풍. 11시부터 3시까지 요염한 모습을 뽐낸다 ⓒ 정판수

산이 불타고 있다. 달내마을 주변의 모든 봉우리가 불타고 있다. 벌겋게 붙은 불은 그 자체로 훨훨 타오르고 있다. 연기 없이 붙은 불은 문필봉(붓 모양의 봉우리)에서 낙타봉(낙타등 모양의 봉우리)을 거쳐 순식간에 온 산으로 옮겨 붙었다. 오늘 아침 만난 어른이 던져 준 말이 실감난다.


"말라꼬 비싼 돈 들여 단풍 구경 가능교?"

우리나라 가을 산의 단풍이 아름답지 않은 곳이 있겠냐마는, 그래서 강과 산을 비단으로 수놓은 땅이란 뜻의 금수강산(錦繡江山)이란 이름이 붙었지마는, 이즈음의 달내마을은 정말 '가을산은 이런 것이다'는 걸 과시하려는 듯 온 산이 활활 불타올랐다.

설악산, 내장산, 금강산 단풍을 보았고, 또 많은 이들이 그 아름다움을 글로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내가 사는 이곳 달내마을의 단풍보다 더 나을까? 이 조그만 골짜기에 어떻게 이만큼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을 자아낸단 말인가?

a 마을 뒷산에 물든 단풍

마을 뒷산에 물든 단풍 ⓒ 정판수

재작년 여름에 땅을 사놓고 아내와 집을 지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실랑이 벌이다가 짓기로 결정한 계기가 바로 이맘때 들렀기 때문이다. 그 며칠 전 부슬비 내리는 날 계곡 아래서 밀려오는 안개에 취했다가 그날 또 본 단풍의 아름다움에 아내는 결국 내 뜻을 허락해 주었다.

달내마을에는 소나무와 같은 상록수가 적은 대신 잡목이 많다. 잡목이 많은 건 산으로서, 경제적 가치로서 떨어지지만 단풍 빛깔은 오히려 다채로우면서 화려해진다. 누구의 표현 그대로 점점이 단풍이요, 곳곳이 붉은 빛이다.


그곳에 살면 그곳의 아름다움을 잘 느끼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이사오고 난 뒤 사실 단풍의 참맛을 못 느꼈다. 숲 속에 살면 나무를 못 느끼듯이 우리 집 자체가 온통 숲에 둘러싸여 있었으니 진작 가을은 왔건만 그걸 깊이 못 느끼고 지낸 것이었다.

a 온통 단풍으로 물든 당산나무

온통 단풍으로 물든 당산나무 ⓒ 정판수

그러다 어제(12일) 미사 본 뒤 돌아오는 길에 큰 도로에서 마을로 내려가는 길목에 들어섰을 때 갑자기 눈앞이 환해졌다. 산이 불타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브레이크 잡는 바람에 아내가 깜짝 놀랐다.


나는 갓길에 차를 대고 말없이 내렸다. 그리고 앞산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아내도 나의 행동을 이해했는지 곁에 섰다.

"곁에 있어도 여기 단풍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네."
"그만큼 살기 바빴다는 말이죠."

이것저것 만들어 놓느라고 진작 먼저 살펴보고 느껴야 할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a 뒷산에서 내려다본 마을 앞산의 단풍

뒷산에서 내려다본 마을 앞산의 단풍 ⓒ 정판수

부산 살 때는 한 달에도 몇 번 가던 태종대가 그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다. 그런데 아름답다고 소문난 다른 해변을 가보고서야 왜 태종댄가 하는 의문을 풀 수 있었다. 오가는 길목에 보는 울산시 동구 주전-정자 몽돌해변도 마찬가지다. 늘 대하기에 그냥 좀 보기 좋구나 하는 정도였다. 그러다 역시 이름난 몽돌해변을 다녀와서야 그곳이 결코 평범한 곳이 아니구나 하는 결론을 얻었고.

달내마을도 그렇다. 능숙한 프로 사진사가 아무리 잘 찍어도 불타는 산야를 그대로 담을 수 없다. 그런데 초보가 찍은 사진이야 오죽하랴. 그래도 경치를 죽이는 한이 있어도 그냥 있을 수 없어 셔터를 눌렀다.

a 우리 집에서 바라본 앞산의 단풍. 보이는 집은 우리 바로 아랫집 김사장댁

우리 집에서 바라본 앞산의 단풍. 보이는 집은 우리 바로 아랫집 김사장댁 ⓒ 정판수

달내마을에 붙은 산불은 이번 주를 끝으로 불길이 꼬리를 내릴 것 같다. 그 불이 꺼지면 어둠으로 잠길 테고, 그러면 마을은 다시 새로운 봄을 잉태하기 위하여 긴 겨울잠을 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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