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02회

등록 2006.12.28 08:26수정 2006.12.28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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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각과는 달리 이곳은 매우 한가하군."


들어선 인물들은 사십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네 명의 중년인들이었다. 백색에다 소매와 옷깃이 검은색의 띠를 두른 모습의 무복(武服)을 입고 있는 인물들은 운중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이었지만 자수로 가슴과 옷깃에 용(龍)과 호랑이가 수놓아져 있는 인물들은 오직 한 부류였다.

바로 교두(敎頭)들. 운중보로 들어온 중원 각 문파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관리하는 선생들이다. 겨우 열한 명에 불과했지만 동정오우를 비롯한 운중보 고수들이 가끔 연무장을 들러 지도해 주는 것을 제외하고는 문하생의 지도와 관리는 전적으로 교두들의 몫이었다.

@BRI@비꼬듯 말을 던진 인물은 어깨가 덕 벌어지고 목이 굵은 네모 턱을 가진 중년 사내였다. 그의 가슴에 세 마리의 용이 얽혀 있는 모습의 자수가 그려져 있음은 수석교두(首席敎頭)라는 뜻. 바로 운중보의 수석교두인 광나한(廣羅漢) 철호(徹虎)가 그였다.

그의 호에 '나한(羅漢)'이란 단어가 따라붙은 것은 그가 소림사 출신이었다는 것에 기인한다. 갓난아이 때부터 소림에 입문하여 일찍이 전대 소림선사(少林禪師)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촉망을 받는 인재였으나 일찍 피운 꽃이 일찍 진다고 했던가? 이미 부패하고 기둥뿌리마저 썩기 시작한 소림은 더는 그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일부 사숙과 사형제들의 시기와 질시는 결국 그를 산문 밖으로 내몰게 했다.

그의 주위로 사사건건 문제가 터지자 어쩔 수 없이 파문을 해야 했던 터. 파문은 시켰지만 전대 소림의 방장은 그에 대한 미련으로 더 이상의 제재는 금했다. 언젠가는 다시 소림으로 돌아올 수 있는 여지를 남긴 것이다. 하지만 호방하고 용맹한 천성을 가진 그는 어차피 승으로 일생을 보낼 인물은 아니었다. 젊은 나이로 십년 이상을 산에 풀어놓은 호랑이처럼 무림에 떠돌다가 철담의 권유로 운중보에 들어온 지 십수 년.


"어차피 철교두도 백호각부터 다녀오신 것 아니오?"

미동도 없이 홀로 앉아있는 백도 자인은 돌아다보지도 않고 감정이 실리지 않은 말투로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아무하고나 말을 섞기 싫어하는 백도가 광나한의 어조가 심상치 않은 다음에야 조문을 왔다 해서 좋게 받아줄 리 만무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조문객이 많지만 정작 정승이 죽으면 조문 오는 사람이 많지 않다더니 그 꼴이군."

이것이 세상인심이다. 인간이 가진 속성이란 것이 정승이 살아있을 때에는 굳이 오지 말래도 찾아간다.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고 눈이라도 한 번 더 마주치면 뭐라도 얻을 것이 있다는 생각 때문. 하지만 후손이 번창하지 못한 정승이 죽으면 찾아가지 않는다. 더는 얻어먹을 것도 없는데 굳이 갈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 때문이다.

광나한이 한 말에는 세상의 인심이 야박함을 지적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철담이 별 볼일 없는 제자를 남겼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었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마다하고 홀로 잘났다고 지내 온 백도를 비난하는 말이다.

"아주 옳은 말이오. 사부님 살아생전에는 죽는 시늉까지 하던 작자들이 이제는 사부님의 시신 앞에서 큰소리를 치는 것을 보니 말이오."

여전히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대꾸한 백도의 말에 광나한은 물론 들어선 나머지 교두들의 얼굴이 굳어지며 갑자기 전신에서 무서운 기세를 뿜어냈다. 실내의 공기가 마치 팽팽하게 당겨진 종잇장이라도 되는 듯 파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여전히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네놈이 수년 전 음교두(陰敎頭)를 망신시키고 쫓아낸 이후로 본 교두들 모두를 싸잡아 업신여기고 있음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만 철담어른의 면목을 생각해 봐주고 있었더니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한 발 나서며 호통을 친 인물은 단양수(斷陽手) 마궁효(馬躬效)였다. 그는 별호와 같이 단양수와 금사선장(金絲線掌)을 익힌 인물이었는데, 두 가지 모두 극음(極陰)의 성질을 가지고 있어 양강지공(陽强之功)과 극성이 되는 무공이었다.

그가 말한 음교두 사건은 백도를 죽음의 그림자로 만들었던 두 가지 사건 중 하나였다. 철담과 함께 문하생을 지도하러 갔던 백도와 당시 섬전지(閃電指)로 명망이 높던 음학성(陰學成)과 시비가 붙은 적이 있었다.

웬일인지 철담이 제지하지 않은 가운데 결국 두 사람은 정식 비무를 하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백도의 잔인함과 가공함이 만인에 공표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섬전지 음학성은 지공에서는 중원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였지만 백도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는 사십이 초 만에 양 손가락 여섯 개를 잘리는 비운을 당했고, 다시는 그가 자랑하는 섬전지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것은 무림인에게서 생명을 잃는 것보다 더한 치욕이었다. 그 길로 음학성은 운중보를 떠나게 되었고, 그때 이후로 교두들에게는 마치 자신들이 당한 것 같은 치욕스러움이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었고, 백도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좋지 않았던 것이다.

"당신도 두 손을 잘리고 싶다면 언제든지 도전해도 좋다."

처음으로 백도가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아무런 색깔도 없었는데 그 눈길을 받은 단양수 마궁효는 마치 예리한 비수가 눈을 파고드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수년 전과 또 달라졌다!'

마궁효는 일시적으로 자신이 위축됨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자신이 위축되었다는 사실 하나로 기분이 극도로 나빠진 단양수가 맹렬한 살기를 뿜어냈다.

"버르장머리 없는 놈. 정말 죽고 싶은 게냐?"

당장이라도 손을 쓸 기세였다. 마궁효가 서서히 손을 쳐드는 순간 옆에 있던 광나한이 그의 팔을 잡았다.

"저런 놈의 말에 신경 쓸 것 없네. 잠시만 참게. 어차피 저놈의 버릇은 고쳐주어야 위신이 서겠지만 아직 때가 아니네."

"그래도… 저런 놈을…?"

"일단 철담 어른의 명복을 비는 것이 우선이네."

광나한 철호는 힐끗 백도를 쳐다보고는 그를 무시한 채 단양수를 비롯한 나머지 두 명의 교두와 함께 상청 앞으로 다가갔다. 한 움큼의 향을 쥐고 불을 붙이고 하늘을 향해 세 번을 흔들고, 땅을 향해 세 번을, 그리고 좌우로 똑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불이 붙었던 향에 불꽃이 사그라들며 향연(香煙)을 짙게 피워낸다.

술을 붓고 지전(紙錢)에 불을 붙여 흔들다가 향로에 집어넣는다. 나머지 교두들 역시 지전을 태우며 조문하는 모습이 절도가 있고 정중하다. 고인에 대해 그 간 매우 존경해 왔음을 그들의 태도에서 알 수 있을 정도. 뒤쪽에 놓인 쇄금도의 시신을 향해서도 같은 동작을 마친 그들은 비로소 조문을 모두 마치고는 백도 쪽으로 다가갔다.

"자네와의 묵은 감정을 털어내기에는 시기나 장소가 좋지 않군. 존경했던 철담어른을 보아서도 잠시 참겠네."

백도의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희미하고 찰나 간이어서 그가 정말로 미소를 띠었는지 장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행인 것은 백도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던 점이었다. 만일 백도가 그들의 비위를 한 번 더 긁는 말을 했다면 이 자리에서 당장에라도 칼부림이 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말만큼은 해 두는 것이 좋겠군. 그 간 철담 어른을 흠모해 왔던 사람으로서 이런 상황을 그냥 지나치기에는 내 마음이 편치 않아서 말이야."

광나한 철호는 노기를 참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백도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저 상대를 기분 나쁘게 만드는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는데 그것은 상대할만한 가치가 없다는 듯한 모습처럼 보였다. 하지만 광나한 철호는 그런 백도의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자네의 사부와 사제가 누군가에게 살해를 당했네. 그런데도 지금 자네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지켜보고만 있네. 오히려 사부와 사제가 죽기를 바란 것처럼 말이지."

"풋… 그렇게 안타까우면 직접 나서보는 게 어떻소?"

여전히 철호의 말이 같잖다는 태도였다. 철호의 굵은 검미가 꿈틀거렸다. 기껏 생각해 말을 해주는데도 달갑지 않다는 백도의 태도에 더욱 기분이 언짢아졌다. 처음 이곳에 들를 때는 이런 감정대립을 벌이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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