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06회

등록 2007.01.04 09:27수정 2007.01.04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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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감의 첩인장이 아니야…."

용추의 상세를 꼼꼼하게 살피고 난 중의가 고개를 흔들었다. 너무나 단정적인 말투에 상만천과 용추는 놀란 기색을 보였다.

"재보(財珤)… 머리가 지나치게 좋은 사람들은 간혹 성급하고 단정적일 수 있다네.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을 너무 과신하기 때문이지. 더구나 이번 자네의 완벽한 정보력은 오히려 성급한 판단을 가져오게 하였네."

중의는 상만천을 재보(財珤)란 별칭으로 부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고, 또한 하대하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상만천 역시 드물기는 하지만 형님이라 대접하는 특별한 인물이 중의였다. 그것은 과거 두 번에 걸쳐 중의에게서 구명지은(救命之恩)을 입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완벽한 것이 오히려 실수를 가져오게 했다…? 용추의 등짝에 난 장인이 첩인장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소제는 실수를 인정할 수밖에 없구려."

상만천은 중의의 말에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을 느끼며 고개를 끄떡였다. 대답은 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머리 속에 다른 생각들이 복잡하게 오고가는지 중얼거리는 말투였다. 말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것은 용추 역시 충격으로 다가왔다.

상만천이나 용추 같은 부류의 인간들은 완벽을 추구한다. 완벽하다는 것이 아름다움과 같은 것이라 생각해왔다. 그리고 스스로 완벽에 가깝다고 생각해왔다. 헌데 그 완벽이란 뒤에 또 다른 불완전함이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 충격이 분명했다.

반박할 일은 없었다. 중의가 지적한 완벽함 뒤에 있는 불완전함을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용추가 기습을 당하고 그에 따른 조사와 정보의 취합은 완벽했다. 비록 어제 이곳에 들어왔다 해도 상만천은 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오히려 운중보주보다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만한 완벽한 정보력을 가지고 있었다.

신태감의 부상과 그 뒤의 죽음 역시 상만천은 모두 알고 있었고, 이것이 함정이란 사실은 너무나 분명했다. 더구나 용추의 등짝에는 첩인장이라 볼만한 장흔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었다.

"신태감의 첩인장은 분명 아니라는 말이네."

"신태감이 손을 쓰지 않았다는 정도는 소제도 아오."

"또한 그 누구의 첩인장도 아니라는 말이지. 아니 첩인장의 장흔(掌痕)이 아니란 말이네."

"……?"

"교묘하기는 하지만 분명 첩인장과 다르네. 첩인장이 특이한 장흔을 남기는 것은 장력을 내뿜을 때 파도가 치듯 연속적으로 몰아치는데 그 특징이 있네. 따라서 첩인장에 맞으면 첫 번째 장흔이 뚜렷하게 새겨지고, 뒤이어 이어지는 여력에 의해 옆으로 장흔의 음영이 새겨지는 것이지."

중의는 말을 하며 침상에 엎드려있는 용추의 옷을 다시 걷어 올렸다. 용추의 등짝에는 뚜렷한 장인 세 개가 연이어 새겨져 있었다.

"보게나. 이 세 개의 장흔은 첩인장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네. 세 개의 장흔이 모두 일정하다는 말이네. 다시 말하면 첩인장의 장흔처럼 보이기 위해 아주 교묘하게 연속적으로 삼장(三掌)을 발출했다는 증거지."

첩인장의 장흔이 첫 번째 것보다 두 번째 것이, 그리고 그 뒤에 따르는 잔영이 점차 희미해지는 것에 반해 용추의 등에 난 장흔은 세 개가 모두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었다.

"소제는 너무나 간단한 것을 간과했구려."

"첩인장은 신태감만이 익혔어. 회에서 다른 인물을 배출했다면 몰라도 아직까지 나는 첩인장을 익힌 인물을 보지 못했네."

"또 한 번 보기 좋게 당했군."

상만천이 입맛을 다셨다. 이미 조사를 하러 온 함곡과 풍철한에게 첩인장에 의한 것이라 인정했고, 그것은 함정이라 항변은 했지만 신태감의 부상이나 죽음에 대해 일정 부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다 보니 함정인 것을 뻔히 아는 함곡에게 거래를 하자고 사정을 할 수 밖에 없었던 터. 누군지 몰라도 보이지 않는 흉수에게 스스로 당한 꼴이 된 것이다.

만약 용추가 첩인장에 당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당연히 오히려 용추의 부상에 대해 운중보에 따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미 인정한 지금에 와서 다시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상만천의 성격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첩인장이 아니라 더욱 걱정이 되는군."

"무슨 말씀이시오?"

"장인(掌印)이 심상치가 않아. 장인을 남긴 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가공할 무위를 가진 인물이라는 말이네. 어찌 보면 혼원잠(混元潛)의 기운이 섞여있는 것도 같고..... 분명한 것은 그 자가 마음만 먹었다면 용추를 그 자리에서 충분히 죽일 수도 있음에도 장력의 수위를 조절하며 그저 그 짧은 순간 일장을 퍼붓듯 삼장을 펼쳤다는 것이지."

중의의 지적에 상만천보다 용추가 더욱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자신은 분명 일장을 맞았다고 느꼈는데 그 순간 삼방을 발출했다니 흉수의 무공수위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밀려들었다. 언제든지 자신을 죽이려 한다면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에 자신을 살려두었을 것이다.

"혼원잠의 기운이 섞여있다면…?"

상만천의 심각한 목소리가 용추의 고막을 울렸다. 그리고는 중의의 손이 자신의 몸을 더듬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용추는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중의가 수혈(垂穴)을 짚은 것이다.

"아무래도 몸속에 있는 허혈(虛血)과 막혀있는 경락을 뚫으려면 매우 고통스러울 게야. 푹 자고나게. 하루만 지나고 나면 거동하기엔 문제가 없을 걸세."

중의의 말이 아득하게 멀리서 들려오는 듯 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용추는 중의가 자신의 수혈을 짚은 것이 아마 치료의 고통보다는 상만천과의 자유로운 대화를 위해 그랬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구룡 중 잠룡(潛龍)의 혼원잠이네. 기(氣)와 혈(穴)을 산산이 흩어놓아 내력을 끌어올리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움직이는 것조차 어렵게 만드는 것이지. 용추가 전혀 거동을 할 수 없었던 것이 혼원잠 때문이라는 생각이네."

상만천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단순히 구룡의 무공이 또 나타난 것에 대한 충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잠룡의 무공은 나타나서는 안 될 무공이었다. 그것이 나타났음은 과거 언제가 회에서 어쩔 수 없이 외면했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확실한 것이오?"

이미 용추의 몸을 면밀하게 진단한 후이기에 중의의 진단이 틀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혼원잠의 기운을 정확히 알아보거나 진단해 낼 수 있는 인물도 중의 외에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상만천은 중의의 진실한 능력을 아는 극히 적은 사람 중 하나였다. 절대 그럴 리 없을 것이라 믿으면서도 그는 중의가 진단이 틀렸다는 말을 해주길 간절히 바라며 다시 물은 것이다.

"오래전 혈간이 혼원잠에 당한 적이 있었네. 아니 당한 것만은 아니었지. 오히려 혈간이 약간 유리했다고 인정한 승부였으니까… 하지만 혈간은 그 뒤 삼 개월을 두문불출할 수밖에 없었네. 당시 나는 혼원잠의 괴이함에 자칫 혈간을 잃을 뻔했기 때문에 그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껴 보았지."

의원이 치료를 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일은 정확한 진단이다. 진단이 올바르지 않으면 치료를 하지 못할 뿐 아니라 환자의 병세를 악화시키거나 심지어 죽일 수 있는 것이다. 중의 같은 명의가 혼란에 빠질 정도였다면 혼원잠의 무서움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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