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받은 피>영림카디널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유명한 탐정이나 형사들 사이에는 한 가지 묘한 공통점이 있다. 이들 중에서 제대로 된 가정을 꾸리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는 점이다. 이들은 모두 나이 많은 노총각이거나 독신녀이거나 결혼을 했더라도 결국 이혼해서 혼자 살아간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다. 범죄소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유명한 탐정을 아무나 꼽아보면 된다. 프렌치 경감, 찰리 챈을 제외하면 거의 백발백중이다.
셜록 홈즈, 파일로 반스, 미스 마플, 에르큘 포와로, 브라운 신부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세 차례의 결혼생활을 모두 실패했던 아르센 뤼팽,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던 네로 울프 역시 마찬가지다.
좀더 현대에 등장한 케이 스카페타, 피트 마리노, 링컨 라임도 한 가지다(링컨 라임은 약간 예외이기는 하다). 30대 노총각으로 부모에게 얹혀 살아가며 사건을 해결하는 아치볼드 맥널리, 앨러리 퀸이 그나마 조금 가정적인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왜 제대로 된 가정을 꾸리지 못했을까? 계속 범죄자를 상대하다 보니 가족의 안전에도 위협을 느꼈던 것일까? 이들은 모두 고집이 세고 외골수이며 자기만의 세계에 푹 빠져 지내는 성향이 강하다. 사건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한밤중이라도 현장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타인의 기분과 감정을 거의 배려하지 않는다. 거기다가 예민하기까지 하다. 이런 인물과 함께 살면서 원만한 가정을 꾸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유능한 형사지만 불행한 삶을 사는 에를렌두르
아이슬란드의 작가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의 '에를렌두르 시리즈'에도 이런 형사가 등장한다. 형사의 이름은 에를렌두르이다. 에를렌두르는 50살이 넘은 나이에 혼자 살고 있다. 아내와는 20여년 전에 이혼했고 원수지간처럼 돼버렸다. 20대의 아들과 딸이 있지만, 이들과도 거의 연락이 없다. 게다가 딸은 마약중독자이고 엉망인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딸은 툭하면 '내가 이렇게 된 건 전부 아빠 때문이야!'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에를렌두르가 인생을 긍정적으로 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집안 청소도 잘 안하고, 항상 인스턴트 음식만 먹고 줄담배를 피운다. 매일 차를 타고 다니느라 운동도 하지 않는다. 관심 있는 이성도 없다. 에를렌두르는 마치 피트 마리노의 아이슬란드 버전 같은 인물이다. 에를렌두르는 과연 무슨 낙으로 인생을 살아갈까?
에를렌두르 시리즈는 아이슬란드를 배경으로 한다. 아이슬란드는 30만 명 정도의 인구를 가진 작은 나라이면서, 교육수준이 높은 복지국가이기도 하다. 이 작은 나라 역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인 만큼, 크고 작은 문제들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에를렌두르는 그런 문제들을 해결해가면서, 딸과의 관계가 다시 가까워지기를 희망하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저주받은 피>의 무대는 아이슬란드의 수도인 레이캬비크이다. 어느 날 아파트 지하방에서 한 노인의 시체가 발견된다. 명백한 타살이다. 처음에는 전형적인 아이슬란드식 살인사건처럼 보였다. 증거조작도 없고 형사를 속이려는 지능적인 범죄도 아닌, 그냥 어설프면서 우발적인 살인사건처럼 보였다. 하지만 죽은 노인은 과거가 깨끗한 인물이 아니다. 수십 년 전에 성폭행 혐의로 고소당한 경력이 있는 인물이다. 어쩌면 이 살인은 그때의 사건과 연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에를렌두르와 수사팀은 이때부터 과거로 과거로 내려간다. 빗속을 뚫고 차를 몰며 아이슬란드의 도시를 돌아다니고, 과거에 대한 진술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탐문수사를 벌인다. 하지만 쉽지 않다. 수십 년 전의 불쾌했던 기억을 다시 되돌리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에를렌두르는 마음 편하게 사건수사에만 몰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마약중독인 딸 에바가 툭하면 집으로 쳐들어와서 속을 뒤집어 놓기 때문이다. 에바는 갚을 능력도 없으면서 돈을 빌려달라고 요구한다. 에를렌두르가 잔소리를 하면 에바도 같이 대들면서 소리 지른다. 이 둘은 이제 싸우거나 고함을 지르지 않고는 대화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에를렌두르는 이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 헤쳐 갈까?
아이슬란드를 배경으로 한 에를렌두르 시리즈
아이슬란드라는 나라는 범죄소설의 무대로 상당히 낯선 곳이다. 아이슬란드에서는 끔찍한 연쇄살인이 벌어지거나 하지는 않는다. 범죄조직이 거리를 휩쓸고 다니는 일도 별로 없다. 하지만 작가가 묘사하는 아이슬란드의 풍경은 꽤 우울해 보인다. 눅눅한 안개가 잔뜩 끼어 있거나 하루 종일 비가 내리기도 한다. 겨울이 다가오기 때문인지 날씨는 점점 춥고 음산해진다. 라디오에서는 몇 십 년만에 찾아온 최악의 비의 저주라고 말하기도 한다.
우울한 날씨의 영향 때문인지 아이슬란드에는 이상한 사람들이 간혹 있다. 친딸을 성폭행하는 아버지가 있는가 하면, 70살이 되어서도 변태적인 포르노를 천 개 넘게 수집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20일 동안 감금하고 폭행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일로 감옥에 가더라도 2년 후면 석방돼서 나온다. 아이슬란드의 판사들은 자비심이 많아서, 중형을 선고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폭력전과를 가진 범죄자들은 선고를 받고 그냥 코웃음을 칠뿐이다. 미국에서처럼 누구를 총으로 쏴죽이거나 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아이슬란드에도 어두운 구석은 있다.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의 에를렌두르 시리즈는 국내에 두 편이 소개되어 있다. <무덤의 침묵> <저주받은 피>가 그 두 편이다. 이 소설은 모두 아이슬란드에서 있을 법한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사건들은 우리 사회에서도 종종 발생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런 폭력이 한 인간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는지, 그리고 그 가족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어 놓는지 묘사한 작품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 쏟아져 나오는 미국이나 일본의 추리물에 식상한 독자에게, 그리고 살점이 튀고 피범벅이 되는 살인사건에 얼굴을 찌푸리는 독자에게, 이 에를렌두르 시리즈는 무척 신선한 작품이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이 에를렌두르 시리즈를 계속 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소설에서 묘사하는 아이슬란드의 모습이 흥미로운 데다가, 에를렌두르와 에바가 어떻게 관계를 회복해갈지 궁금하기도 하다. 작가의 말처럼, 범죄소설의 소재는 단순히 범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덧붙이는 글 |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지음 / 전주현 옮김. 영림카디널 펴냄.
저주받은 피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지음, 전주현 옮김,
영림카디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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