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문덕, 살인사건을 추적하다

[서평] 정명섭의 팩션 <적패>

등록 2007.04.04 09:32수정 2007.04.04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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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적패> 1권

<적패> 1권 ⓒ 랜덤하우스

우리나라의 역사를 장식했던 쟁쟁한 인물들은 대부분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상반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런 부정적인 평가가 거의 없는 인물이 바로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이다. 소위 말하는 '안티'가 없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을지문덕이다.

을지문덕은 612년의 살수대첩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살수대첩으로 유명하다'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살수대첩을 제외한 을지문덕의 행적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을지문덕이 몇 년에 태어나서 몇 년에 죽었는지, 그의 조상이나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살수대첩 이후에 그의 거취는 어떻게 되는지 등은 알 수 없다.


다만 을지문덕은 살수대첩의 영웅이라는 점, 백만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에 쳐들어온 수양제 조차도 을지문덕을 경계했다는 점 등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을지문덕이 '안티'가 없는 이유는 살수대첩의 성과도 성과이지만, 어찌보면 그 외의 행적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명섭의 고대사 팩션 <적패>는 이런 을지문덕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고구려를 배경으로 한 팩션인만큼, 이 소설에는 고구려의 실존인물들이 다수 등장한다. 을지문덕을 포함해서 태학박사인 이문진, 수나라 군대를 임유관에서 격파했던 강이식 장군, 연개소문의 증조부뻘 되는 막리지 연광, '바보'라는 수식어가 앞에 붙는 온달 장군 까지.

때는 서기 598년, 고구려 영양왕 9년의 일이다. 전성기가 지난 고구려에 조금씩 쇠퇴의 기미가 보이던 시절이다. 몇년 전에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는 호시탐탐 고구려를 노리고 있고, 국내성 귀족과 평양성 귀족 간의 갈등은 점점 깊어져 가고만 있다. '외우내환'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을 만큼, 고구려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이때 고구려의 시조인 추모성왕을 모시고 있는 사당에서 끔찍한 변사체가 발견된다. 이 사당은 워낙 신성한 곳이라서 감히 일반인은 접근하기도 어려운 장소이다. 얼마나 대담한 범인이기에 이곳에서 이런 잔인한 살인을 저질렀을까?

살인사건을 추적해가는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


<적패>는 이렇게 시작한다. 재미있게도 이 작품에서 을지문덕은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일종의 탐정역할로 등장한다. <적패>에서 을지문덕의 직책은 추모성왕을 모시고 있는 사당의 당주이다. 공교롭게도 을지문덕이 당주로 부임한 첫 날에 이 시신이 발견된다.

을지문덕은 당주로 부임하던 당시에 이미 이름난 수사관으로 명성을 얻고 있던 시점이었다. 평양성에서 이보다 더 교묘한 살인사건도 수차례 해결했던 을지문덕이다. 하지만 이 사당의 살인사건은 정황으로 보아서 을지문덕에게 어려운 사건이다.


이제 열흘 후면 고구려의 왕이 제를 올리기 위해서 이 사당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태왕이 오기 전까지 열흘, 그 안에 을지문덕은 이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 태왕의 이복동생인 건무는 을지문덕에게 윽박지르면서 열흘 안에 범인을 잡아들이라고 명령한다. 그러지 못하면 사당을 관리하는 벼슬아치들, 묘를 지키는 수묘인들까지 모두 죽은 목숨이 된다.

하지만 사건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을지문덕이 본격적으로 조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또 다른 살인사건이 터진다. 잔인하게 살해당한 수법으로 보아서 동일범의 소행일 가능성이 많다. 이제 사건은 연쇄살인으로 변했다. 열흘이라는 한정된 시간과 연달아서 터지는 연쇄살인. 이 두 가지 장치만으로도 <적패>는 흥미로운 팩션이 될 수 있다. 거기에 더해서 작가가 묘사하고 있는 을지문덕의 모습도 꽤 입체적이다.

술을 좋아하는 을지문덕은 사건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왜 하필 오늘이냐고 분통을 터뜨린다. 그러가하면 가난한 삶을 살아가는 수묘인의 아이들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고, 엄청난 권세를 가지고 있는 태왕의 이복동생 앞에서도 당당한 모습을 잃지 않는다.

'나는 살인사건 현장에서 죽은 자의 목소리를 듣는다네'라는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가 하면, 건무의 협박에 벌벌떠는 관리들에게는 '가족에게 작별인사나 해두시죠'라고 말을 하기도 한다.

이런 을지문덕을 도와주는 인물이 바로 이문진이다. 이문진은 을지문덕을 도와서 피해자가 죽은 곳을 현장검증하는가 하면, 용의자를 찾아서 새벽부터 말을 타고 달리기도 하고 대저택에 몰래 침입해 들어가기도 한다.

을지문덕과 이문진은 사건현장을 검증하면서 몇 가지 단서를 알아낸다. 죽은 자의 몸에 난 상처를 통해서 범인이 사용한 칼의 종류 및 검법을 파악해내고, 현장에서 발견된 발자국의 무늬를 통해서 신분을 유추해낸다. 하지만 이렇게 단서를 파고들수록 이상한 점 투성이다. 어쩌면 이 사건은 단순한 살인사건이 아니라, 을지문덕이 감당하기 힘든 커다란 음모의 일부 아닐까?

철저한 자료조사를 거쳐서 소설로 복원한 고구려의 모습

<적패>를 흥미롭게 만드는 세 번째 장치가 여기에 있다. 사소해보이던 사건이 점점 커다랗게 증폭되어 간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을지문덕과 이문진은 영문도 모른채 커다란 사건에 휘말려 간다. 어쩌면 고구려 전체를 뒤흔들게 될지도 모르는 거대한 사건에.

<적패>는 팩션인만큼, 이 사건 그리고 을지문덕의 모습도 모두 허구이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사실과 허구를 뒤섞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작가의 능력일 것이다. 작가인 정명섭은 이 작품을 위해서 수 년간에 걸친 자료조사와 고증을 거쳤다. 그래서인지 <적패>를 읽다보면 당시 고구려 각계각층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묘를 지키며 살아가는 수묘인들의 삶, 궁을 벗어난 기쁨에 대낮부터 술을 마시는 타락한 관리들, 그런 관리의 욕심 때문에 억울하게 죽어가는 힘없는 백성, 권력을 놓고 복마전 같은 싸움을 벌이는 세도가들, 죄인을 처형하는 형장의 광경까지.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헉헉거리며 오녀산성에 오르는 을지문덕, 해뜨기 직전 호태왕비와 태왕릉의 모습, 수나라가 보내온 협박에 가까운 외교문서를 두고 입장이 나뉘는 귀족들, 그리고 요동지방의 지도를 놓고 작전을 구상하는 을지문덕과 강이식의 대화.

작가가 <적패>를 통해서 묘사하고 있는 고구려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 작품을 위해서 작가가 얼마나 많은 조사를 했는지 알 수 있다. <적패>는 저자의 고대사 팩션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여러가지 면에서, 저자의 후속작을 기대하게 만드는 작품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 적패 1, 2. 정명섭 지음. 랜덤하우스 펴냄.

팩션은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을 합성한 신조어. 역사적 사실이나 실존인물의 이야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덧붙여 새로운 사실을 재창조하는 문화예술 장르다.

덧붙이는 글 적패 1, 2. 정명섭 지음. 랜덤하우스 펴냄.

팩션은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을 합성한 신조어. 역사적 사실이나 실존인물의 이야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덧붙여 새로운 사실을 재창조하는 문화예술 장르다.

적패 1 - 피로 물든 시조묘

정명섭 지음,
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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