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기에는 졌지만, 진실의 보석을 캔 아이들

청소를 마치고 돌아가는 그 아이의 멋진 뒷모습

등록 2007.04.20 09:45수정 2007.04.20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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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아이들과 내기를 했다. 진실의 실험이랄까? 사실 나는 그 내기에서 내가 이기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도 막상 내가 이기자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아이들과 어떤 내기를 한 것일까? 그 자초지종은 이렇다.

이틀 전 청소시간이었다. 여느 때처럼 아이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빈둥거리다가 부담임인 내가 버럭 소리를 질러야만 겨우 청소하는 시늉을 내었다. 그러다가 내가 지나가면 마치 태엽이 감긴 인형처럼 원상태로 다시 되돌아가 있곤 했다.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나의 관심은 아이들을 장악하거나 통제하여 청소를 잘하는데 있지 않았다. 그것이 목적이라면 청소를 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육체적인 벌을 가하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되면 아이들은 벌을 받지 않기 위해 청소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다가 벌을 주지 않는다면? 당연히 아이들은 다시 과거의 습관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것이 체벌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학교에서는 모든 순간순간들이 다 교육의 기회로 제공된다. 위기가 기회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곳도 바로 학교이다. 그런 소중한 기회들을 허망하게 놓치는 일이 다반사지만 말이다. 다행히도 그날은 내 마음 상태가 차분했던 모양이다. 나는 한 호흡의 여유를 가지고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나는 여러분들에 대한 불만은 없어요. 여러분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여러분을 거부하거나 싫어할 권리가 교사인 나에게는 없다고 생각해요. 다만, 나는 여러분이 책임감 있는 아름다운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아직 그렇지 못하다면 내년이라도, 아니 학교를 떠나고 난 후에라도 여러분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어쩌면 그것이 선생님의 가장 간절한 소망이기도 해요.

오늘 나하고 내기를 한 번 해요. 청소시간에 선생님 눈치 보며 빈둥거리는 것이 행복한지, 아니면 청소시간에 열심히 청소를 하는 것이 행복한지. 그동안 빈둥거리는 것은 많이 해봤으니까 오늘은 열심히 청소를 한 번 해봐요. 청소를 하기 싫어도 실험삼아 한 번 해봐요. 알았지요?"


내가 진실의 힘을 다소 과신하는 이상주의자라는 사실 말고도 아이들과의 내기에 자신감을 갖게 된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청소시간마다 빛이 나는 한 아이 때문이었다.

윤대상. 그는 청소시간만 되면 누가 시키고 말 것도 없이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묵묵히 청소를 했다. 혼자서 열 사람 몫을 했다. 그 덕에 다른 애들이 빈둥빈둥 놀아도 별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


내가 주목한 것은 청소를 마치고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이었다. 뭐라고 할까? 행복의 뿌리를 움켜쥔 아이 같다고나 할까? 거기에는 나의 칭찬도 한 몫을 했다. 그는 자신의 수고에 대해서 스스로 대견해하고 행복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참으로 지혜로운 선택이었다. 쉬운 행복이랄까? 청소시간에 10여분 남달리 수고한 대가로 행복의 뿌리를 움켜 쥔 것은 정말 잘한 일이 아닌가.

하지만 청소시간 내내 빈둥거리다가 돌아가는 아이들은 그런 쉬운 행복을 알지도 누리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그것을 알고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하지 않겠는가.


그날 청소시간에 아이들은 실로 눈부셨다. 청소시간이면 늘 하늘을 쳐다보곤 했던 한 아이는 청소를 다 마친 뒤 빗자루를 내려놓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얼른 물었다.

"어때? 청소 시간에 빈둥빈둥 노는 것이 행복해? 아니면 오늘처럼 열심히 청소하는 것이 행복해?"
"열심히 청소하는 것이 더 행복합니다."


정말 그런 대화가 오고 갔을까 싶게 그 아이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의 대답도 단순명료했다. 나와 내기를 하자고 했으니 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속마음을 감추고 짐짓 농을 주고받을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럴 깜냥도 없이 아이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마치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땅 속에서 진실의 보석을 하나씩 캐어 든 아이들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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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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