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224회

등록 2007.06.28 08:26수정 2007.06.28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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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곡은 자신의 방에서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창가에 놓여있는 탁자에는 몇 장의 손바닥만한 종이가 놓여 있었고, 거기에는 깨알만한 글씨가 가득 써 있었다. 그는 가끔 창밖을 바라보기도 했는데 그것은 밖의 풍경을 보기 위함이 아니라 무언가 풀리지 않는 생각에 자기만의 세계 속에 빠져있는 듯 했다.

“……!”


간혹 바로 옆에 누군가 있었다 하더라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입안에서 중얼거리기도 했는데 그는 너무나 생각에 골몰해 있는 나머지 누군가 그의 뒤로 다가와도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고민되는 일이 있는 모양이군.”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함곡은 놀라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의 얼굴에 당황스런 기색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이런 표정은 함곡에게 있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더구나 목소리의 주인공이 친구인 풍철한임에도 이런 표정의 변화는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더구나 함곡은 급히 탁자 위에 놓인 종이들을 황급히 주워들며 소매 속으로 넣으려 했는데 그 중 하나에는 벌써 풍철한의 검지가 누르고 있었다.

“자네…? 언제…들어왔나…?”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의 우측 뒤에 서 있는 풍철한을 보며 당황스런 어조로 물었다. 함곡의 표정변화는 정말 애매했다. 뭔가 들켰다는 당황스러움과 어색함이 교차되고 말까지 더듬거리고 있었다.

“금방….”


풍철한이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함곡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자 함곡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허나 그의 얼굴에는 이미 당황스러운 기색이 사라지고 평상시의 표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들어오려면 기척을 내든가…. 묻는 것이 예의가 아닌가? 아무리 친구지간이라고 해도 말이네.”

어느새 표정을 회복하고 짐짓 나무라는 말투였다. 자신의 당황스러움을 감추고 지금의 어색한 상황을 바꾸려는 의도였지만 풍철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종지쪽지 하나를 여전히 검지로 누른 채 그의 옆에 놓여있는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기척을 내고 싶지 않았네. 도대체 자네가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었지.”

의도적으로 기척을 내지 않고 들어왔다는 말이다. 솔직하다고 하기보다는 노골적인 말이었다. 함곡의 포정이 잠시 어두워졌다. 풍철한의 태도로 보아 뭔가 알고 자신을 의도적으로 찾아왔고,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 그에게 들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퍼뜩 뇌리를 스쳤다.

“무슨 말인가?”

“확인하고 싶었네.”

“무엇을 말인가?”

“끝까지 잡아떼는 것은 자네답지 못 한 태도네. 이제 좀 더 솔직해지는 게 어떤가?”

함곡은 풍철한의 검지에 눌려있는 종이 쪽지로 슬쩍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풍철한을 바라보았다. 이 친구는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더구나 의도적으로 찾아온 것을 보면 지금 당장 뭔가 안 것도 아니다. 언제부터 짐작하고 있었던 것일까?

“……!”

“나를 이 운중보로 끌어들이겠다는 것은 자네의 생각이었나?”

“자네…?”

“대답하기 곤란한가? 그럼 이렇게 질문을 해야겠군.”

풍철한의 얼굴에 미세하게나마 서운한 기색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함곡은 놓치지 않았다. 뭔가 알았다면 당연히 서운했을 것이다. 갑자기 친구에 대해 함곡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왜 자네는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가?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사건을 일으킬 생각을 하고 있나? 그 목적은 무언가? 그리고… 자네가 바라는 마지막 결말은 어떤 것인가?”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묻는 것이 아니다. 함곡은 풍철한의 질문에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풍철한은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그동안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의문을 쏟아내고 있는 듯 보였다.

함곡은 친구를 응시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 그의 유일한 친구가 풍철한이었다. 자신의 허물을 드러내도 굳이 그 상처를 헤집어 놓지 않는 친구가 풍철한이었다. 동생 선화와의 일이 뒤틀리지만 않았다면 그리 뜸한 왕래를 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이 모든 일을 계획함에 있어 풍철한이라는 존재가 있었기에 든든한 마음을 가졌던 것도, 그리고 불행하게도 일이 뒤틀린다 해도 자신을 책임져 줄 수 있다는 최후의 방패막이라는 믿음도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눈치가 빠른 친구이니… 끝까지 감출 수는 없는 게 당연하지….”

풍철한과 선화를 다시 맺어지게 하는 기회를 주기 위한 것도, 또한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자신이 아내가 아닌 여동생 선화를 데리고 들어온 것도 풍철한을 끌어들이려 했던 의도를 부인하기 어려운 일임에는 분명했다.

“언제부터 알게 된 것인가?”

시인이었다. 그 말에 풍철한은 미소를 더욱 크게 지었다.

“그래야 자네다운 태도지. 얼마 되지 않았네. 자네가 설가 그 놈에게 용봉쌍비를 주자고 할 때부터 뭔가 감을 잡기 시작했네.”

“그것이 그렇게 이상했던가?”

“당연하지. 내가 설가 놈이 누구라는 사실을 몰랐을 때에는 그냥 넘어갈 수 있었겠지. 하지만 나는 그 설가 놈을 만나고 나서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단 말이네. 내가 자네에게 그런 적이 있었지? 내가 그 녀석을 데려온 일은 우연 같지만 누군가 의도한 필연적인 것이었다고…. 내 성격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는 누군가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말 말일세.”

“그랬군.”

“이 세상에서 내 성격을 나보다 더 잘 꿰뚫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네야…. 그때부터 나는 자네를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네.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더군.”

“이야기 해 보게.”

어차피 시인한 일이었다. 느긋하게 풍철한이 어디까지 알게 되었는지 파악할 필요도 있었다.

“우선 자네는 이 운중보에 처음 들어왔으면서도 운중보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네. 언뜻언뜻 자네의 말을 들어보면 이해하지 못할 말이 나오더군. 하지만 조금 지나 파악해 보면 내가 모르고 있었던 것을 자네가 알고 있더란 말이지.”

“그 정도로 나를 이 사건의 주모자로 파악할 수 있었다면 자네는 정말 누구보다 더 뛰어난 추리력을 가진 사람이로군.”

함곡이 소리 내서 웃었다. 부인을 하는 것이 아니었고, 풍철한이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도록 장단을 맞춰주는 말이었다.

“내가 확신했던 사건이 바로 어제 홍교(虹橋)와 당화(棠花)란 시비 계집들의 일이었네. 홍교를 다그칠 때의 자네의 소극적인 태도와 우리가 같이 식사를 하면서 그토록 사건 해결에 있어 중요한 계집이라면 자네답지 않게 허술하게 그녀를 왜 홀로 남겨두었을까? 아니 왜 의도적으로 그녀를 남겨두었을까 하는 의문…. 유향이 그녀들의 신분을 밝혀낼 때의 미세하지만 당황하던 자네의 표정…. 당당하게 나타났던 당화란 계집의 태도…. 이런 것들은 자네와 그 계집들 간 사전에 밀약이 없었다면 보일 수 없는 것이었고 나는 그 간의 의문과 함께 고개가 끄떡여졌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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