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보다도, 가을보다도 더 천천히 오는 것

시와 사랑, 그리고 속도에 대한 사색

등록 2007.07.25 19:22수정 2007.08.01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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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풍경

풍경 ⓒ 안준철

긴 여름 해가 기울 무렵, 나는 방천길을 걷고 있었다. 지인의 시집 출판기념회가 열리는 식장을 향해 가는 길이었다. 식장은 걸어서 이삼십 분이면 닿을 수 있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구도심에 살다보니 이런 행운도 흔한 일은 아니어서 마치 저녁 산책이라도 하듯 가벼운 기분으로 집을 나섰던 것이다. 출판기념회 행사를 핑계로 그곳까지 걸어가는 것을 더 즐길 요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늘에 드리워진 구름 때문인지 여름치고는 꽤 선선한 날씨였다. 게다가 방천길에는 그늘을 짙게 내린 벚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 푸른 나뭇가지 아래로 느리게,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냇물이 보였다. 그 느린 냇물보다도 더 천천히 걷는 걸음으로 방천을 거닐다가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저 느린 냇물보다도, 내 천천한 걸음걸이보다도, 어쩌면 가을의 속도보다도 더 느린 것은 시인이 시를 쓰는 속도가 아닐까?'

a 풍경

풍경 ⓒ 안준철

a 풍경과 사람

풍경과 사람 ⓒ 안준철

느리다 못해 아예 멈춘 듯이 보이는 냇물도 시가지를 벗어나는데 한나절이면 족할 것이다. 내 걸음이 아무리 느려 터져도 시간 안에 행사장에 도착할 것도 자명한 일이다.

그렇다면 가을의 속도는? 한반도 남쪽의 단풍은 9월 말 즈음 설악산과 오대산의 산 머리에서 시작하며, 산 아래쪽으로는 하루 40m씩, 남쪽으로는 하루 25Km씩 이동한다고 한다.

이에 비해 시의 속도는 얼마나 느리고 답답한가. 하루 25Km는커녕 밤을 꼬박 새우고도 단 한 개의 시어도 건지지 못한 채 시간만 허비하고 마는 일이 부지기수다.

아, 좋은 시를 빨리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나는 그런 꿈을 포기한 지 이미 오래다. 나의 한계를 일찌감치 알아버린 탓도 있지만, 언제부턴가 나에게는 뽐내고 싶은 한 편의 빼어난 시보다도 시가 만들어지는 그 과정의 시간들이 더 소중해졌기 때문이다.


시를 쓰다 보면 몇 번이고 떠올렸던 일을 다시 떠올리고, 매만졌던 시어를 다시 매만지는 일을 반복하게 된다. 심지어는 시상이 떠오른 최초의 시간이나 현장으로 되돌아가, 이미 사라졌거나 시들해진 그때의 감동을 다시 되살리기 위해 몸부림을 쳐야 할 때도 있다.

그렇게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시간은 이 광속의 시대에 유일하게 나를 돌아보게 하는 사색의 시간이요, 나의 한계를 뼈저리게 절감케 하는 성찰의 시간이다.


a 풍경

풍경 ⓒ 안준철

a 풍경

풍경 ⓒ 안준철

꽤 오래전의 일이다. 나는 주번 교사 완장을 달고 아침 일찍 학교 교정을 한 바퀴 돌고 있었다. 수돗가 근처 측백나무 울타리에 종이 쓰레기가 버려져 있어 주우려고 보니 그것은 종이쓰레기가 아닌 하얀 장미였다. 아니, 조금 전에는 분명 종이쓰레기였는데 내 손이 닿는 순간 하얀 장미로 변하고 만 것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마술이었다. 그러니 그 순간의 감동을 어찌 시의 언어로 번역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시가 내게 온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었다. 마술 같은 순간이 전광석화처럼 내 이마를 스쳐간 뒤에도 나는 며칠째 쉬는 시간만 되면 현장으로 달려가 있곤 했다. 수십 번씩이나 측백나무 울타리를 탐색하고 종이 쓰레기가 흰 장미로 변하던 순간을 재연한 뒤에야 비로소 이런 알량한 시를 한 편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주번교사 하던 날이었지
흰 종이 쓰레기 한 점
장맛비에 젖어
측백나무 울타리에 걸려 있었어
누군가 손에 쥐었다가
무심코 버렸으리라
생각하며 허리를 굽히는데
세상에, 그게 흰 장미인거야
이슬 같은 물기를 머금고
생글 웃고 있지 않겠어?
자세히 보니 제 몸에 가시를 박은
한 줄기 초록빛 가녀린 선이
측백나무 울타리 속을 비집고 올라와
흰 장미 한 송이를 후끈 피워놓은 거야
나는 생각했지
처음에는 그 흰 장미가
정말 종이 쓰레기였을지도 모른다고
장맛비에 젖어 측백나무 울타리에 걸린
찢겨진 한 영혼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누군가 허리를 굽혀
다가가기 전까지는 말이지.

- 자작시, '하얀 장미'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도 '제 몸에 가시를 박은/한 줄기 초록빛 가녀린 선이/측백나무 울타리를 속을 비집고 올라와/흰 장미 한 송이를 후끈 피워놓은' 기특하고 아름다운 아이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장맛비에 젖어 측백나무 울타리에 걸린/찢겨진 한 영혼'의 모습도 간간히 목격되기도 한다. 아, 나는 그들에게 허리 굽혀 다가간 적이 있었던가.

때로는 시가 먼저 오고 삶이 그 뒤에 오는 경우도 있다. 그날 나는 흰 종이 쓰레기가 장미꽃으로 변하는 장면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다가 문득 알게 되었던 것이다. 무엇엔가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자연스레 허리를 숙여야 한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전존재로 다가가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a 꽃

ⓒ 안준철

a 아이들

아이들 ⓒ 안준철

방학 선언식을 하던 날이었다. 나는 마지막 수업이 든 여학생 반에 들어가 종이를 한 장씩 나눠주었다. 한 학기를 돌아보고 방학을 설계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아이들의 정직한 눈을 통해 나의 수업을 평가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아예 종이를 한쪽에 치워두고 잡담을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혼자만의 진지한 시간을 가져보라고 애원 조로 말을 해도 그때뿐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깨알 같은 글씨로 편지를 써서 내게 전해준 아이도 있었지만, 나는 이미 기분이 상해버린 뒤였다. 그동안 아이들과 내가 나눈 것이 과연 무엇인지, 나는 심히 의심하고 낙담한 상태에서 방학을 맞이했던 것이다.

지금 나는 마음이 편안하다. 내가 한 잘못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너무 성급했던 것이다. 사랑의 과속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나는 몰랐던 것이다. 시보다도 가을보다도 더 천천한 걸음으로 내게 다가오는 것도 있다는 것을.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지 <사과나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월간지 <사과나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시 #가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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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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