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로뇨의 밤, 안녕을 고하다

[천진난만하게JH, 산티아고 가는 길 12] 로그로뇨에서 맛본 타파스

등록 2007.11.23 11:37수정 2007.11.24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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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은 어떻게 할 거야?”

언니들의 목소리가 나를 일으켰다. 우리들은 파라솔에 둘러앉아 고대해왔던 타파스를 맛 볼 것을 궁리했고, 우선은 중심가로 나가볼 것을 결정했다. 문득 아까 침대 옆자리에서 길을 걷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던 C가 떠올랐다. 그녀에게도 오늘의 길이 퍽 고되었는지 내일 아침 버스로 바르셀로나 집으로 돌아가게 될 지도 모르겠다고 한다.


나 역시 이 숙소에 도착했을 때 그동안의 강행군에 지쳐 내일은 이 도시에서 하루를 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걷기로 결정하든, 돌아가기로 결정하든 우리는 내일이면 헤어지게 되는 것이다.

C와 처음 만나 함께 팜플로나를 걸어왔고, 그녀의 통역 덕분에 스페인 친구들의 생기 넘치는 경쾌함을 처음으로 느꼈다. 오늘은 함께 뛰고 춤추고 노래 부르며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 짓지 않았던가, 거짓말 같은 시간들을 함께 해왔다. 아쉬웠다. 너무나 아쉬웠다. 나는 무엇인가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너 한국음식 먹어본 적 있니?”
“아니, 먹어본 적 없어.”
“그럼 내일 아침에 한국음식 어때? 잘은 못하지만 꼭 너랑 같이 먹었으면 좋겠어.”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함께 왔던 비상재료들이 떠올랐다. 어떻게든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내일이면 헤어지게 될 언니들께도 아침을 대접해드리고 싶었다. 상황을 말씀드리니 언니들도 괜찮다고 하신다. 내일 아침은 먹고 출발하시겠다고 한다. 그리고 J씨도 이 도시에서 하루를 묵을 예정이란다. 그렇다면 우리 두 사람이 내일 아침을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계획을 짰다.

‘가져온 1인분 건조 육개장에다 달걀을 여러 개 풀고 소금 간을 해서 국을 만들어야지. 한국 쌀과 똑같은 것이 있으니 그것으로 밥을 하고 (냄비에 밥하는 것이 처음이라 불안하지만!) 샐러드를 조금 준비하면 괜찮을 거야. 아침 5시쯤 일어나서 준비하면 적어도 6시 반에 출발하는 언니들 시간엔 맞출 수 있겠지?’


도시 중심가로 나와 인포 센터에서 지도를 얻고 몇 가지 정보를 받은 후 재래시장을 돌아다니며 장을 봐 숙소에 두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렇게도 기다려왔던 타파스를 맛보기 위해 돌진했다.

로그로뇨는 타파스로 유명한 곳


'타파스Tapas'란 와인 등과 함께 먹는 한 접시짜리 요리로 일종의 술안주이다. 그 중에서도 바게트 빵 위에 각종 토핑을 얹은 타파스가 대표적인데 스페인에서만 맛볼 수 있는 돼지 뒷다리 말림인 '하몬Jamon'을 얹거나, 정어리, 올리브 등 온갖 토핑(?)으로 타파스를 만들 수 있다.

로그로뇨는 구 시가지 안에서도 타파스만을 전문으로 하는 가게가 밀집된 거리가 있을 정도로 타파스로 유명한 곳이다. 아마도 라 리오하 지역의 특산품인 비노에 곁들이기엔 타파스가 적격이기 때문은 아닐지?

a 로그로뇨 타파스 거리 이른 시간 한산한 거리, 밤이 되면 넘치는 사람들로 왁자지껄

로그로뇨 타파스 거리 이른 시간 한산한 거리, 밤이 되면 넘치는 사람들로 왁자지껄 ⓒ JH


저녁 7시를 겨우 넘긴 (스페인에서는 이른) 시각, 많은 바는 여전히 굳게 문이 닫힌 채였고, 손님맞이 하기엔 이른 가게들이 하나 둘 문을 열기 시작한다.

가장 사람들이 붐비는 곳으로 가 보자는 작전으로 얼떨결에 처음 도착한 곳에서 나는 타파스가 아닌 보카디요로 고픈 배를 채웠고, 가볍게 한 잔을 비웠다.

모두 첫 주문이라 멍한 채로 이것저것 주문을 했지만 다들 썩 만족하지 못한 표정으로 다음 장소로 옮겼다. 타파스는 각 가게마다의 특색이 있어 한 자리에서 먹는 것이 아니라 이 가게 저 가게를 돌아다니면서 맛보는 것이 제 맛이란다.

길을 걷다 S씨가 버섯 간판이 귀여운 가게를 지목하였다. 바로 저 간판의 버섯이 ‘샴피뇽Champiñon’이라고 하신다. 그러고 보니 이 거리에 오기 전에 어느 가게가 가장 맛있는 곳인지 물어보았을 때에, 샴피뇽을 꼭 먹어보라고 권하던 이 동네 언니의 이야기가 바로 저것인가 보다. S씨 역시 일본에서부터 ‘샴피뇽 타파스’를 기대해왔다고 한다.

비좁은 가게의 안쪽에서는 우리네 양송이버섯과 꼭 닮은 것이 연신 철판 위에서 구워지고 있었고, 과연 명성만큼 사람들은 줄을 서서 타파스와 와인을 받아 가게 바깥까지 진을 치고 먹고 있었다. 우리는 사람들을 비집고 겨우 주문을 마치고 가게 바깥에 탁자 대용으로 놓여있던 커다란 나무 술통에 원을 둘러 모여 섰다.

그런 가운데 자전거를 끌고 거리를 이리저리 가로지르며 도착한 꼬마아이가 ‘우노 샴피뇽!’ 하며 타파스 하나를 받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타파스란 술안주라기보다는 꼬마들도 와서 배고프면 하나씩 사먹고 가는, 남녀노소가 다 같이 즐기는 요깃거리에 가까웠다.

조금 기다리자 바게트 빵 위에 세 개의 구운 양송이가 이쑤시개 같은 꼬치에 주르륵 꽂힌 모습의 샴피뇽 타파스 다섯 개와 다섯 잔의 비노가 술통 테이블 위에 나타났다. ‘이건 제가 살게요. 얼마 안 돼요. 7유로 정도?’ 사하라 씨가 내신 덕분인지 샴피뇽과 비노는 오늘 힘들었던 하루의 피곤을 싹 잊을 만큼 감미로웠다.

a 다섯 조각의 행복 그리고 다섯 잔의 달콤함, 로그로뇨 샴피뇽 타파스 집에서

다섯 조각의 행복 그리고 다섯 잔의 달콤함, 로그로뇨 샴피뇽 타파스 집에서 ⓒ JH


스페인 순례자들과 함께 어울리다

술통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신나게 수다를 떠는 사이, 길가로 C와 모녀 순례자 어머니 V와 딸 A등 일군의 스페인 친구들이 나타났다. ‘와 반가워!’, ‘역시 너희도 여기 왔구나?!’ 반가운 우리들은 뻑적지근하게 인사 키스를 나누었다.

갑자기 A는 카메라를 흔들며 사진을 찍자고 했고, 길거리를 지나가던 사람 한 명을 불러 세워 카메라를 맡겼다. 유럽에서 카메라를 부탁하는 것은 곧 훔쳐 가란 것과 마찬가지란 이야기에 잔뜩 긴장했던 나 역시 이때다 싶어 들고 있던 카메라를 A를 통해 같이 부탁했다.

“자, 하나, 둘 셋, 파따따~”

우리네 ‘김치’처럼 이들은 ‘파따따Patata(감자)’를 외쳤다.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고 난 후 우리 일행은 자연스럽게 스페인의 순례자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샴피뇽 타파스도 비웠겠다, 다음은 어디가 좋을까? 그때 크리스티나가 지나가던 바에 걸려있던 메뉴를 물끄러미 보다가 내게 이야기했다.

“내가 전에 ‘파따따 브라바Patata Brava’ 얘기한 것 기억해?”
“그럼! 우리 둘 다 걷다 지쳐서, 먹고 싶은 것 얘기하던 때에 네가 나한테 말해준 거잖아.”
“응. 그거 여기서도 먹을 수 있대. 한 번 먹어볼래?”
“진짜? 좋지~”

그렇게 따라 들어간 바의 테이블에 기대어 그녀가 요것저것 주문하는 것을 쳐다보았다. 또 한바탕 웃음을 나누며 왁자지껄한 때였다. 갑자기 노트며 종이 같은 것들이 이리저리 오고간다. 서로의 연락처를 나누는 것 같았다.

“A랑 저기 P 아저씨 네는 오늘 여기서 순례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간대.”
“그렇구나. 나도 이메일 주소 알 수 있을까?”

가방 속에서 일기장 겸 노트를 꺼내 열심히 메일 주소를 받아 적었다. ‘이 파따따 브라바는 바르셀로나의 그 맛이 아니야’ 하며 귀여운 투정을 부리는 C, 그리고 내일 당장 비행기 타고 한국에 가서 나와 결혼하겠다는 귀여운 농에 순례를 끝내고 기다리겠다고 답하며 함께 사진을 찍었던 P 아저씨, 오늘이 순례의 마지막이란 생각에 눈물을 흘리는 A…, 나 역시도 마음속으로 내일부터는 이들과 헤어져 홀로 걸을 마음을 다지며 조용히 석별의 정을 나눈다.

어느덧 시계는 숙소의 통금시간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우리들은 거나하게 취해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하늘을 바라보며 로그로뇨의 구 시가지를 걸어간다. 타파스로 잔뜩 배를 채우고도 달콤한 것이 그리워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숙소로 와서 한 스푼씩 맛을 보고, 오늘 참 정신없고 또 재미있었죠. 하며 조용한 식당 테이블에 불을 밝히고 이야기를 조곤조곤 나눴다.

내일을 위해 침상으로 돌아갈 시간, 나는 내일 아침밥을 지을 것들을 확인하기 위해 냉장고를 열어보고 계단도 없는 2층 침대의 위로 아슬아슬 뛰어올라갔다. 발치에 열린 창가 너머로 들려오는 이제 깨어나기 시작한 동네사람들의 밤의 복작거림과 숙소 안을 울리는 드르릉 코고는 소리와 함께 잠이 들었다. 왁자지껄한 이별전야였다.
#산티아고가는길 #스페인 #도보여행 #성지순례 #카미노데산티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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