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 상처 깊은 그곳에선 운동화도 사치

[동티모르 여행기 3] 난민촌 아이들을 만나다

등록 2008.10.29 11:29수정 2008.11.27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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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자리를 얻기 위해 국내 한 기업체가 개최한 '잡페어' 행사에 참가한 동티모르 사람들. 산업시설 기반 자체가 없는 동티모르의 실업률은 40%에 이를 정도.
일자리를 얻기 위해 국내 한 기업체가 개최한 '잡페어' 행사에 참가한 동티모르 사람들. 산업시설 기반 자체가 없는 동티모르의 실업률은 40%에 이를 정도.조경국

여행지에서는 아무리 게으른 사람이라도 부지런을 떨게 마련이다. 이른 시간에 눈이 떠졌다. 우리가 묵은 곳은 딜리 중심가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있는 엘리자베스 호텔. 아주 연한 노란빛 페인트가 칠해진 2층짜리 호텔 건물은 거리에서 볼 때는 규모가 작아 보였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안마당도 있는 제법 큰 호텔이었다.

딜리에서 가장 큰 호텔은 티모르호텔이다. 그곳의 하루 숙박비는 130달러가 넘는다고 했다. 엘리자베스 호텔은 그보다 저렴해서 내가 묵은 방은 하룻밤에 70달러라고 했다. 욕실이 있고, 에어컨과 TV가 갖춰져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호텔의 시설을 상상하면 안 된다. 샤워기의 수도꼭지는 물이 제대로 뿜어져 나오지 않았고 물을 틀 때마다 곰팡내가 먼저 터져 나왔다. 방에 비치된 수건은 오래 빨아 쓴 흔적이 남은 채 찌들어 있었고, 욕실 앞에 깔린 매트는 낡아서 모서리 부분에 구멍이 나 있었다.

동티모르의 한달 평균임금이 150달러정도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하루에 70달러의 숙박비는 엄청나게 비싸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이 호텔의 투숙객은 나와 조경국 기자를 빼고는 대부분 유엔 경찰이었다. 이들은 호텔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면서 볼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 호텔은 아침식사를 제공하고 있었다. 빵과 우유, 치즈, 달걀, 과일, 주스와 티모르 커피가 메뉴의 전부다. 아침식사 시간은 7시부터 8시까지.

 우리가 딜리에서 닷새동안 묵었던 엘리자베스 호텔. 앞에서 보는 것보다 안으로 들어가면 더 크다.
우리가 딜리에서 닷새동안 묵었던 엘리자베스 호텔. 앞에서 보는 것보다 안으로 들어가면 더 크다. 유혜준

 엘리자베스 호텔 안마당.
엘리자베스 호텔 안마당. 유혜준

8시쯤 되면 호텔의 안마당에는 큼지막한 빨래대 2개가 설치된다. 투숙객들의 옷을 세탁해서 말리기 위해서다. 빨래 세탁비는 2달러. 체크 아웃할 때 함께 계산된다. 널린 빨래에는 객실 번호가 적힌 종이가 하나씩 붙여져 있다. 그렇게 해도 빨래가 바뀔 때가 있단다.

동티모르의 더위는 해가 떠오르자마자 시작된다. 순식간에 중천으로 올라간 해는 뜨거운 열기를 마음껏 뿜어내 우리나라 한 여름의 대낮 같은 느낌을 안겨준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지나간 여름을 다시 겪으려니 더 더운 것 같다. 하지만 어쩌랴. 동티모르에 머무는 동안 더위에 익숙해져야 하는 것을. 그 뿐이 아니다. 낯설기 짝이 없는 나라와 도시에도 익숙해져야 한다.

낯선 곳에서 익숙해지려면 아무래도 낯을 익히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터. 아침식사를 하면서도 마음은 이미 딜리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나라도 더 봐야 할 텐데, 하는 조급증마저 일어나고 있었다.


7일 오전에는 동티모르에서 처음 열린다는 '잡페어' 취재가 예정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구직전쟁을 치르고 있는데 동티모르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아니, 동티모르의 구직난은 상상 이상이라고 했다. 실업률이 40%가 넘는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구하고 있지만 일자리는 없고, 노는 사람은 많은 게 동티모르의 현실이었다.

실업률 40%, 동티모르의 구직난은 상상 이상

 난민캠프라고 해서 사는 모습이 일반 마을과 별반 다르지 않다. 삶의 터가 유엔에서 지원한 텐트라는 것 뿐. 난민캠프 자투리땅에서 할아버지가 구멍을 파고 아이가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 한 아이는 무심한 듯 지나가고.
난민캠프라고 해서 사는 모습이 일반 마을과 별반 다르지 않다. 삶의 터가 유엔에서 지원한 텐트라는 것 뿐. 난민캠프 자투리땅에서 할아버지가 구멍을 파고 아이가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 한 아이는 무심한 듯 지나가고. 조경국

9시까지 렌트한 차량이 호텔에 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 사이에 짬을 내서 호텔 주변을 돌아보기로 했다.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앉아 있을 수 없어 무작정 나서보기로 했다.

호텔 문을 나서자 길 건너편으로 커다란 성당 건물이 보였다. 본당으로 보이는 큰 건물과 뾰족 지붕 건물 하나와 높은 종탑이 있다. 동티모르는 국민의 98%가 가톨릭이라고 했다. 그러니 동네마다 크고 작은 성당이 있는 건 당연지사. 동티모르를 여행하면서 성당 건물 참 많이 봤다. 대부분 문이 굳게 닫혀 있었고.

성당을 목적지 삼아 가던 길에 텐트가 잔뜩 들어선 곳을 볼 수 있었다. 성당 바로 옆이었다. 직감적으로 이곳이 난민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커다란 건물 옆에 족히 80개는 되어 보이는 텐트가 줄지어 서 있었다.

 유엔이 나눠준 텐트에 기대어 놀고 있는 아이들.
유엔이 나눠준 텐트에 기대어 놀고 있는 아이들.조경국
동티모르는 지난 2006년 내전으로 15만 명이상의 난민이 생겼다고 했다. 내전의 발단은 군인 600명이 근무조건과 지역차별 등의 불만을 품고 군을 이탈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동티모르에서는 동쪽 지역과 서쪽 지역의 갈등의 골이 상당히 깊다고 한다. 어느 나라나 지역감정이라는 게 있는 모양이다. 동티모르 사람들 역시 자신이 사는 곳이 아닌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배타적이라고 했다.

내전으로 가장 타격을 입은 사람들이 누구인지 굳이 짚어가면 알려주지 알아도 알 수 있다. 가난하고 힘 없는 국민들 아니겠는가. 집을 잃고 길 위에 선 사람들은 난민이 될 수밖에 없다. 인도네시아로부터 힘겹게 독립을 얻어냈는데 이 나라 사람들의 비극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허술한 쪽문을 지나 텐트촌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하얀색이거나 그 비슷한 색이었을 텐트는 때가 잔뜩 타서 지저분해 보였다. 땅바닥에서는 마른 먼지가 풀썩이고 있었다. 어느 텐트에선가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장작이 타고 있었고, 그 위에는 밑바닥이 새까맣게 그은 냄비가 올라가 있었다. 아침식사를 준비하는가 보다.

난민촌 안으로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갔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사진기를 메고 나타난 낯선 이방인을 반길 것 같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낯선 사람들의 출현을 재미있어 하는 것 같았다. 특히 어린아이들은 환하게 웃거나 수줍은 미소를 띠면서 우리를 반겼다.

텐트 앞에서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 하나가 교복을 입고 있다가 우리와 시선이 마주치자 활짝 웃어 준다. 이 아이, 운동화에 양말까지 신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동티모르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엄지발가락을 끼우게 되어 있는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어른이나 아이,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그나마 슬리퍼라도 신고 있으면 다행이다. 산간지역의 아이들은 맨발이 더 많았다.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 아이들은 이후에도 많이 보았다. 동티모르의 초등학교 취학률은 90%가 넘는다고 했다. 하지만 중학교는 절반으로 줄어들고, 고등학교는 중학교의 절반으로 진학률이 줄어든단다. 사립대학을 제외하고는 원칙적으로 학비가 면제된다지만 학교에 다니려면 수업료 이외에도 돈이 들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에 진학을 포기하는 것이 이들의 현실이다.

딜리 시내 곳곳 난민 캠프, 내전 상처 아직 깊어

 이른 아침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어린이.(왼쪽) 동티모르의 초등학교 취학률을 90%이상으로 매우 높은 편이지만 중고등학교로 갈수록 취학률이 급격히 낮아진다. 슬리퍼를 한쪽씩 나눠신다 친구에게 돌려주고 있는 모습.(오른쪽) 시골로 갈수록 아이들이 맨발인 경우가 많았다.
이른 아침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어린이.(왼쪽) 동티모르의 초등학교 취학률을 90%이상으로 매우 높은 편이지만 중고등학교로 갈수록 취학률이 급격히 낮아진다. 슬리퍼를 한쪽씩 나눠신다 친구에게 돌려주고 있는 모습.(오른쪽) 시골로 갈수록 아이들이 맨발인 경우가 많았다. 조경국

  내전으로 집을 잃고 난민캠프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딜리 시내 곳곳에도 난민캠프를 발견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도 동티모르는 동-서 지역간 갈등으로 국민들의 감정의 골이 깊다.
내전으로 집을 잃고 난민캠프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딜리 시내 곳곳에도 난민캠프를 발견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도 동티모르는 동-서 지역간 갈등으로 국민들의 감정의 골이 깊다.조경국

아이 셋이 텐트벽에 기대앉아 있었다. 여자애가 둘, 사내애가 하나. 아이들은 손에 먹을 것을 들고 앉아 먹고 있었다. 우리를 향해 아이들은 환하게 웃었다. 옷은 비록 남루하고 얼굴에는 땟국이 흐르고 있었지만 아이들의 웃음은 맑고 아름다웠다.

이 아이들은 사흘 뒤 난민촌을 다시 찾았을 때 또 만날 수 있었다. 전에 만났을 때와 다른 옷을 입고 있었지만 표정만은 여전히 밝았다. 이 아이들은 맨발이었다.

10일 아침에 다시 난민촌을 찾았던 것은 이들이 사는 모습을 더 꼼꼼하게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한 텐트 앞에서는 젊은 아낙네가 아침준비를 하고 있었다. 밑바닥에 그을음이 잔뜩 앉은 냄비에서는 김이 한창 오르고 있었다. 연료는 장작. 동티모르에서는 길가에서 장작을 쌓아놓고 파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더운 지방이니 난방용은 아니고 대부분 취사용이다. 난민촌에서도 한쪽에 장작이 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열심히 뜨게질을 하고 있는 아주머니. 저렇게 짠 것들은 시장에다 내다 판다고.
열심히 뜨게질을 하고 있는 아주머니. 저렇게 짠 것들은 시장에다 내다 판다고.조경국
어느 텐트 앞에서는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가 뜨개질에 열중하고 있었다. 사진기를 들이대자 활짝 웃으면서 뜨개질을 한다. 한 텐트는 입구가 활짝 열려 안이 들여다 보였는데 어린 여자애가 무릎을 꿇은 채 열심히 머리를 빗고 있었다.

빨간 공을 끌어안고 있는 소년과 할아버지도 봤다. 할아버지는 지팡이 같은 것으로 땅을 파고 있었다. 왜 땅을 파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판단다. 그런데, 의사소통이 정확이 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해서 땅을 팔 수도 있지만 우리가 모르는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 않나.

이들은 낯선 사람들을 조금도 낯설어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기해하기까지 했다. 우리가 그들을 보러 간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우리를 보여주러 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어딜 가나 사람들은 호기심이 잔뜩 담긴 눈으로 우리를 보았기 때문이다.

동티모르 사람들은 사진기를 보면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사진을 찍어서 액정 화면을 보여주면 어찌나 재미있어 하는지, 아이나 어른이나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그런 그들이 고마웠다. 그들이 낯선 이방인을 경계하거나 배척했더라면 그들 안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거나 구경을 하거나 말을 걸기 쉽지 않았을 테니까.

덧붙이는 글 | 지난 10월 5일부터 15일까지 10박 11일동안 동티모르를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덧붙이는 글 지난 10월 5일부터 15일까지 10박 11일동안 동티모르를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동티모르 #난민촌 #동티모르내전 #알프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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